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박 Mar 14. 2017

나이의 길이보다 지점을 바라보는 삶

비르지니 그리말디의 <남은 생의 첫날> + 다큐 영화 <인생은 백살부터>

사람들은 보통 현재에 만족하며 살지 못한다. 지난날을 그리워하고, 앞으로의 나날을 꿈꾸며(꿈이라도 꾸는 인생은 그나마 다행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오지도 않을 날들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하다) 산다. 과거에 대한 미련과 미래에 대한 상상을 움켜쥐느라, 정작 현재의 삶은 건조한 모래가루처럼 손가락 틈으로 빠져나가 버린다.


현재를 놓치며 사는 것은 “어리석은 중생(?)의 삶"임에 틀림없다. 소위 말하는 "현자"들만이 현재를 살아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현재에 집중하라고 충언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부처님은 과거에 대한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망상을 버리고 “지금”을 살라하신다. 나이는 어리지만 미니멀리즘의 대가인 곤도 마리에는 "지금"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물건을 과감히 버리라고 조언한다. 불멸의 고전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의 자유를 동경하는 “나"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오기도 전에 미래를 엿보려 했던 아침의 지각없는 내 짓거리가
신에 대한 모독이라도 된 것 같았다


여기 익숙한 과거 속에서 정해진 목표를 향해 살던 세 여자가 있다. 자신들의 예측대로 흘러갈 것이라 믿었던 삶이 뜻밖의 돌부리를 맞닥뜨리자, 그들은 여행을 하기로 결심한다. 삶의 전환이 필요할 때 사람들은 정착보다 여행을 택한다. 여행이란 몸과 마음을 움직여야 가능하고, 낯선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람을 만나야 하는 꽤 적극적인 행위다. 따라서 여행지에서 만난 여행자들은,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을 겪었을지라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마리와 안느, 그리고 카밀은 누구보다 삶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낯선 곳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탄 것이다.


세 여자가 “고독한 사람들을 위한 크루즈 여행”을 선택한 이유도 주목할만하다. ”고독한 사람들”을 위한다는 것은 이 여행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만을 위한 것임을 뜻한다. 또한  “크루즈 여행"은 계속해서 새로운 기항지를 거치면서 어떤 공간에서도 익숙할 틈을 주지 않는다. 세 여자는 누군가의 사람이 아닌, 오롯이 "나"로서 익숙함을 벗어나 새로움과 마주치기 위해 이 여행을 선택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인생은 백살부터“ 속 다그뉘 할머니의 100세 인생도 “고독한 사람들을 위한 크루즈 여행"과 같다. 남편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았고, 어린 시절부터 쌓여온 열등감으로 스스로를 보잘것없이 여기며 살아온 할머니는 새로운 인생여행을 시작한다. 100세 노인은 절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컴퓨터를 배우고, 이메일을 쓰고, 블로그를 운영한다. 할머니의 용기 있는 여행은 100년이란 긴 시간 동안 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매일 선사한다.


*사진: 다큐멘터리 영화 <인생은 100살부터> 중


그러나 고독하려고 떠난 세 여자의 크루즈 여행과 홀로서기를 위한 다그늬 할머니의 인생여행은 그들을 고독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세계 곳곳을 떠돌며 마리와 안느와 카밀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고, 새로운 연인과 잃어버린 연인까지 다시 만난다. 다그늬 할머니는 그녀처럼 컴퓨터를 배우고 싶어 하는 젊은 노인들과 100세의 스타 블로거를 만나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을 매일같이 마주친다. 고독한 여행을 선택한 이들의 인생에 왜 더 많은 만남이 나타나는 것일까?


이들은 이웃집 혹은 텔레비전 속 드라마나 다큐를 보며 타인의 삶을 동경하던 습관을 탈피했다. 익숙한 생활보다 낯선 시공간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세상에 둘도 없는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몸을 움직이고 이동하면서 체험하는 삶을 통해 이전에는 알지 못하던 행복까지 맛보게 되었다.


이러한 삶을 선택함에 있어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나이든지 과거, 현재, 미래를 가지고 있다. 누적된 나이보다 중요한 것은 과거나 미래를 선택하느냐 혹은 현재를 선택하느냐의 문제다. 세상은 경제적 또는 사회적 이슈로서 나이를 평가한다. 많은 사람들이 고령화 사회에 대비하여 경제적 문제와 사회적 인프라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논한다. 그러나 그 논의 이전에 고령화 사회가 정말 문제인지, 어떤 문제가 가장 중요한지가 먼저 고민되어야 한다. 오래 사는 것이 문제인지, 어떤 나이에서도 제 나이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적 의식과 환경이 문제인지 말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현재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어떤 과거에서 태어나고 자라왔는지로 사람을 평가하고, 앞으로의 삶이 중요하고 두렵다며 현재의 삶을 끊임없이 협박한다. 그렇게 희생된 현재들의 누적으로 행복은 잡을 수 없는 이상이 되고, 치유의 반복이 현재라는 빈자리를 메꾸어 나간다. 고령화 시대가 두려운 이유는 늙은 몸으로 오래 살아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오지도 않은 늙은 미래를 상상하느라 현재를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인생의 길이를 바라보기보다, 어떤 길이의 인생도 사는 순간마다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어떤 나이에서도 각자의 나이이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시스템이 다져졌으면 한다. 과거 때문에 또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않고, 지금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평범함의 폭력성을 깨닫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