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지 Jul 18. 2019

'외계인 공무원'

동 주민센터 시간제 근무 8

'아..오늘 꽤 힘든? 하루였!'


지난 6개월, 동 주민센터 근무에서 가장 난감한 사건이 오늘 나에게 일어났다. 갑자기 찾아온 방문객들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고 많이 당황했다. 진땀이 났다. 심지어 말까지 더듬었다. 올해 11년 차 공무원인 내가 직장에서 그렇게 당황한 적이 언제였나 기억조차 희미하다. 오늘 나는 민원실에서 누굴 만났을까?




갑작스러운 불청객들은 오전 11시가 조금 넘어서 민원실로 들이닥쳤다. 한꺼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세 개 그룹으로 나뉘어 인솔자까지 20여 명 남짓 되어 보였다. 옆자리 동료 직원이 이미 내게 이 방문객들에 대해 귀띔해 주었다. 자기보다는 내가 이들을 상대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며 특별히 부탁을 했다.


첫 번째 그룹이 민원실 입구에 도착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먼저 공무원증을 가방에서 급하게 뒤져서 목에 단단히 걸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민원실 대기의자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나 만큼 이 방문객들도 많이 긴장돼 보인다. 한 명은 대기실 소파에 훌쩍 뛰어 올라가더니 뒤돌아서 나를 빤히 바라본다. 나머지는 아무 말 없이 신기한 듯이 나를 빙~둘러싸고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다. 그렇게 두 번째, 세 번째 그룹까지 이 방문객들로 작은 동 주민센터 민원실이 꽉 들어찬다. 이제 나의 차례. 긴장된 몇 초의 시간이 흐르고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 "OO유치원 어린이 여러분! OO동 주민센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웃으며 반짝반짝 손인사)
아이들 : "..."(뭐지? 하는 표정 ㅠㅠ)
나 : "얘....얘들아 안녕?"
(어색한 적막이 흐른다)
출처 : 픽사베이


그랬다. 내가 맞이 한 방문객들은 동 주민센터 바로 옆에 위치한 유치원을 다니는 5~6살 작은 천사들이었다. 인솔 교사들까지 20여 명이 견학을 위해 민원실을 방문한 것이다. 처음 현관 앞에 속속 도착하는 아이들이 보일 때만 해도 나는 그다지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하지만 하나둘씩 민원실로 들어와 해맑은 눈으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얼굴들을 맞이하는 순간. 그때 알았다! 내가 이 천사들과 아주 힘겨운 시간을 보낼 것임을.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바로 '아이들의 언어' 때문이었다.


동 주민센터가 어떤 곳인지 아이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오늘 나의 임무였다. 문제는 어른들의 언어 그리고 공무원의 언어에 익숙한 내가 초등학생도 아니고 유치원생 아이들의 언어로 주민센터를 안내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인솔 선생님들에게 나름 자신 있게 동 주민센터를 안내하겠다고 말을 한 터라. 나는 무슨말이든 일단 해야 했다. 난감했다. 먼저 나를 소개했다.


나 : "먼저, 제 소개를 할게요. 저는 여기서 일하는 공무원이에요."
아이들 : "...."(무슨말이지? 하는 표정2 ㅠㅠ)
나 : "아... 일단 따라 해 보세요. 공.무.원"
아이들 : "겅.무.언"(여전히 아리송한 표정) (망했다!!)
나 : 공무원은 나라 일을 하는 사람들이에요. 힘들 때 여기 동.행.정.복.지.센.터"
"아니...동...동사무소! 찾아오면 도와주는 사람들이에요.
아이들 : "...."(뭐지?하는 표정3 ㅠㅠ)
나 : 아, 이게 공무원증이에요!(죄 없는 공무원증을 뜬금없이 소개하며 급 마무리)
출처 : 픽사베이


당황한 나는 아이들을 서둘러 사회복지 업무 민원대로 안내했다. '노인-장애인' 푯말 앞에 섰다.


나 : "여기는 어르신들과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어려움이 있을 때 찾아오면 도와주는 곳이에요"
아이들 : "...."
인솔 선생님 : "얘들아, 여기가 어려움이 있을 때 언제든 찾아오는 곳이래요!"
아이들 : "네!"


인솔 선생님의 도움으로 사회복지업무에 대한 안내는 어떻게 잘 끝냈다. 다음, 각종 민원서류 발급과 전입 신고 등을 접수하는 행정 민원대 앞이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까 잠시 고민했다.


나 : "여러분 이사하죠? 집을 옮기는 거요."(간절한 눈빛)
아이들 : "...."
나 : "엄마, 아빠랑 이사하면 여기 와서 이사 왔다고 얘기하는 곳이 이에요"(어색한 웃음)
아이들 : "...."
나 : "아.. 그게 엄마, 아빠랑 뭔가 궁금한 게 있을 때 여기 와서 물어보면 나처럼 여기 공무원 아줌마, 아저씨들이 도와줄 거예요!"
아이들 : "네!"


다행히 마지막 대답은 들었다. 아이들이 진짜 이해를 했는지는 이미 나의 과제가 아니었다. 나는 최대한 빨리 그 난감한 상황을 끝내야 했다. 


다음은 2층 예비군 동대본부 사무실이다. 동 주민센터 건물에는 향토예비군 동대본부가 함께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 동 청사에예비군 훈련이며 관련 업무를 보는 동대본부가 2층에 있다. 아이들과 함께 나는 동대본부 사무실을 노크하고 일단 들어갔다. 조그만 꼬마 천사들이 아장아장 줄 맞춰 들어오는 모습에 업무를 보고 있던 군인이 조금 놀란 눈치다. 하지만 금세 삼촌 미소를 띠며 아이들에게 수줍게 인사를 한다. 그렇게 군인 아저씨와의 만남도 잘 끝났다.


마지막으로 안내할 공간은 바로 '새마을 문고'다. 나름 이 장소만은 자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책은 아이들이 자주 접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주민센터 3층에 위치한 새마을 문고는 동네 아이들의 공부방이자 도서관이다. 언제든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놀러 와서 책도 읽고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르게 편안한 표정으로 아이들이 문고 원탁 테이블에 사이좋게 빙~ 둘러앉는다. 그리고 천사들은 책장에 꽂힌 수백 권의 책들을 신기한 듯 둘러보고 있다.

출처 : 픽사베이


'아, 이렇게 잘 끝나는구나'


안도의 한숨이 채 끝나기도 전. 어디선가 들려오는 울음소리. 아이 한 두 명이 갑자기 울기 시작한다. 상황을 알아보니, 문고 바로 옆 공간인 '새마을부녀회'가 원인이었다. 그 시간에 마침 부녀회 회원 몇 분이 동네 어려운 가정에 나눠드릴 반찬을 만들고 있었다. 그날은 겉절이 김치를 담갔는데 고춧가루가 조금 매웠나 보다. 아이 몇 명이 눈이 매워서 울기 시작한 것이다. 당황한 인솔 선생님이 일부 아이들을 데리고 급하게 떠나는 모습을 나는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출처 : 픽사베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아이들 몇 명은 남아서 다른 선생님과 함께 문고에서 책도 보고 사진도 찍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나마 남아있던 용기를 다 쥐어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나 : "혹시 엄마, 아빠랑 다음에 여기 문고 책 보러 놀러 올 사람, 손들어 볼래요?"
아이들 : "저요!", "저요!"


간절하면 통하는 걸까?


드문드문 몇 명의 아이들이 손을 번쩍 든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함박웃음이 났다. 아... 얼마나 다행인지. 그나마 꼬마들 몇 명이 여기 동 주민센터를 한 번쯤은 더 오고 싶다고 표현해 준 것이다.


이해 안 되는 낯선 언어를 쓰는 '외계인 공무원'. 그런 나에게 착한 방문객들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반응을 해 준 것이다. 역시 아이들은 천사다! 




아이들이 주민센터를 떠나고, 동료들과 잠시 대화를 나눴다. 주민센터에서 하는 일을 '유치원 아이들의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동 행정복지센터'라는 명칭마저도 그 아이들에게는 외계어처럼 들렸을 거라고.


사실 '동 행정복지센터'는 공무원들끼리도 발음이 어려워서 끝까지 발음도 잘 안 하게 된다. 차라리, 예전에 쓰던 '동 사무소'나 '동 주민센터'가 훨씬 기억하기 쉽고 발음하기도 편해서 내부적으로는 예전 용어를 자꾸 게 된다.


그렇게 이런저런 얘기를 직원들과 나누면서 든 생각은 굳이 유치원생아니더라도 초등학생 수준에서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센터 명칭이나 업무명을 사용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주민들 속으로 들어가는 길. 아직은 멀어 보인다. '얘들아! 오늘 힘들었지? 그래도 찾아와 줘서 고마워'


내게 너무 어려운 '아이들의 언어'와 아이들에게 너무 어려운 '공무원 언어'. 그렇게 나는 오늘 주민센터를 찾은 천사들에게 외계인이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느 공무원의 발표준비 그리고 바나나우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