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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Jul 02. 2019

어느 공무원의 발표준비 그리고 바나나우유

동주민센터 시간제근무 7 & Becoming 필사의 기록 6

Slowly, I was becoming more outward and social, more willing to open myself up to the messes of the wilder world.
나는 차츰 더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아이가 되어서, 더 넓고 복잡한 세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미셸 오바마 <Becoming> 중


Becoming something


공직 안에'무언가' 되어 간다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길로 가는가 아니면 찾는 길로 가는 것인가'. 미셸 오바마는 그녀의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조부모님까지. 다양한 성향의 가족과 결코 녹록지 않은 환경에 둘러싸인 채 그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 걸음씩 나아간다.


이처럼 사람들과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는 각자가 다른 답을 가진 채 어디론가 향해 가고 있다. 얼마 전 같은 부서 동료의 발표 준비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공직에서 나를 찾는 의미를 다시금 돌아보았다. 그녀의 발표 준비는 나에게 어떤 것을 선물해 주었을까.




그 동료와 나의 인연은 노란 '바나나우유'에서 시작되었다. 5개월여 전 동주민센터로 발령되어 아직은 새로운 부서와 민원업무에 부담을 한창 느끼고 있을 때였다. 그런 내게 어느 날 아침 출근해 보니 책상 위'바나나우유'가 놓여 있었다. '맛있게 드세요'라는 귀여운 메모와 함께. '요즘 이렇게 표현하는 직원도 있네'하며 속으로 조금은 의아했다. 하지만 업무로 다시 돌아간 나는 바나나 우유를 그냥 책상에 두고 퇴근을 해버린다. 나중에 문자로 냉장고에 넣어 달라고 부탁을 하긴 했지만 미안함에 다음날 출근길에 커피를 한잔 사서 그 직원에게 불쑥 내밀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세심하고 소녀 같고 내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따뜻한 정'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그래서 나처럼 요즈음 먹히는 스타일인 '쿨'함에 익숙한 사람에게 그녀의 그런 모습은 '뭐지?' 하는 반응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그렇게 나는 그녀만의 독특한 표현방식에 느리지만 조금씩 적응을 하게 되었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 업무와 관련하여 의견이 달라 감정적인 말다툼도 있었다. 심지어 직원들 앞에서. 하지만 다음날 바로 나는 그녀에게 커피타임을 제안했고, 왜 우리가 싸워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그냥 툭 터놓고 얘기했다. 돌이켜보면 당시 그녀와는 또 다른 나의 '서늘함'의 기질을 보여준 순간이었다. 결국 이날의 미팅은 그녀가 내가 제안한 '생각하는 공무원 멘토링 모임'에 합류를 결정하게 만들었다. 역시 극과 극은 통하는가?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유난히 더 바빠 보인다. 여유도 없어 보이고 무슨 일인지 물어볼 수도 없고 그냥 옆에서 상황을 파악해 봤다. 그녀가 우리 부서를 대표해서 발표를 나가게 되었단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가 이 주민센터에 근무하면서 최초로 시작한 청소년 프로그램에 대한 발표였다. 그사이 새로운 직원이 오고 업무가 재조정되면서 지금은 다른 직원이 그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운이 좋게도 제출한 자료가 대회 예선을 통과했고 발표는 자신이 맡겠다고 약속한 그녀. 막상 본선 진출이 결정되고나서 무척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공무원 조직에서 발표가 갖는 의미는 뭘까? 누가 발표하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질. 우선 나는 윗분들의 발표자료는 직급별로 거의 다 준비를 봤다. 결국 발표 원고(시나리오)보다는 PPT 자체에 정성을 80~90프로 이상 들인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발표자료를 사전 검토받을 때도 PPT 슬라이드의 1) 멋들어짐과 2) 슬라이드 순서 3) 화면의 텍스트와 발표원고 간의 차이점을 찾고 4) 기타 내용 보완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PPT 슬라이드를 중심으로 모든 발표가 준비되는 것이다. 공직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많이들 그리 하지 않을까 추측만 할 뿐이다.


그러면 내가 주인공인 발표는 어땠을까. 정책이나 행사를 직접 준비하고 추진하는 실무자가 준비하는 발표는 뭔가 달라야 했다. 하지만 몇 년 전까지 나는 그러질 못했다. 그전의 발표 준비를 그대로 답습했다. PPT를 먼저 만들고, 그 후에 발표원고를 슬라이드 순서와 텍스트에 맞게 영혼 없이 풀어쓰는 것으로 발표 준비의 막바지를 채웠다.


그러니 발표라는 것이 무대 한쪽 구석에서 슬라이드 화면쳐다보며 나란 발표자는 원고를 달달 외우거나 아니면 손에 쥔 종이를 중간중간 보면서 청중에게 읽어주는 영혼없는 '낭독자'에 불과했다.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온전히  것으로 만들어 결국 청중에게 감동을 선사하것이 진짜 '발표자'의 모습 아닐까?


그런 내가 발표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곳이 바로 MBA 강의실이었다. '비즈니스 영어'와 '국제 비즈니스 협상'을 전직 로펌 변호사였던 미국인 교수님으로부터 두 학기 연속으로 배웠다. '엘리베이터 스피치', '그룹 스피치', '협상 시뮬레이션' 등 나의 의견을 전달하는 스피치가 가지는 다양한 관점과 또 효과적인 스피치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지 개념과 스킬에 대해 완전히 새롭게 정립한 시간이었다.


아쉽게도 대학원 졸업 이후 공직에서 나의 발표를 실제로 시험해 볼 무대는 아직 없었다. 대신, 특별한 '따뜻함'을 가진 그녀가 바로 내 앞에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도 PPT 발표자료부터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언제쯤 얘기를 할 수 있을까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내가 경험했던 발표의 새로운 세계를 그녀에게 브리핑했다.


중요한 건 PPT 슬라이드가 아니라 '발표자 자신'이라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발표 원고를 쓰는 것이라고. PPT 슬라이드는 철저하게 발표자를 보조하는 수단으로만 활용해야 한다. 그래야 발표가 설득력을 갖고 발표자의 메시지가 심사위원들의 기억 속에 그리고 가슴에 더 유효하게 남을 수 있음을 나름의 배움을 토대로 그녀에게 한참을 설명한 것 같다.


조용히 듣던 그녀가 '알았다'다. 나는 슬라이드를 활용하는데 참여자들의 생생한 인터뷰만큼 좋은 게 없다고 영상 삽입도 제안했다. 그것도 알았다고 한다. 궁금했다. 그녀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을지. 오전 근무만 하고 퇴근을 했던 나는 그 이후 며칠 동안 그녀가 야근을 하며 열심히 참여자들 인터뷰를 하고 결국 발표 원고를 나에게 가져왔을 때 무척 놀랐다. 평소 말이 없이 조용한 그녀는 내가 한 얘기를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그대로 실천했던 것이다. 원고 초안을 함께 리뷰하면서 내 생각을 솔직하게 공유했고 그녀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최종 발표 연습을 위해 그녀에게 제안했다. 발표 전날 다행히 휴일이었기에 오전에 잠깐 사무실을 나올 테니 함께 무대 리허설을 해 보자고. 민원대 업무를 보던 9급 신참 공무원에게도 별일 없음 나와서 발표 피드백을 함께 하자고 했다. 그 후배도 선뜻 나와 주었다. 그렇게 휴일 오전 그녀는 한참 어린 후배 공무원과 내 앞에 섰다. 무대 한쪽에서 아직 덜 외운 원고와 슬라이드 화면을 번갈아 보면서 그녀가 첫번째 리허설을 끝냈다.


나는 그녀에게 딱 두 가지만 주문했다. 선택과 자신감. 무대 한쪽에서 슬라이드가 주인공인 된 발표의 원고를 읽을 것인가 아니면 무대 중앙에서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발표를  것인지의 선택. 그러기 위해서는 22시간 45분. 발표까지 남은 시간 동안 생각보다 많은 걸 야한다. 그리고 두번째는 자신을 믿을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그렇게 나와 후배는 그녀가 홀로 남은 작은 회의실조용히 나왔다. 무척 궁금했다. 그녀는 얼마나 바꿀수 있을까. 그 시간  동안 무엇을 찾을수 있을까.


그렇게 발표 당일이 되었고, 이른 아침 최종 리허설을 위해 세 명의 공무원은 주민센터 4층 대강당으로 다시 모였다. 그녀가 차분하게 무대 중앙으로 이동한다. 사실 그 순간 그녀보다 내가 더 떨렸던 것 같다. 그녀가 얼마나 할 수 있을까. 꼭 내 모습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그녀가 조금은 상기된 목소리로 발표를 시작했다. 약 15분의 발표가 끝나자마자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힘찬 박수를 보냈다. 22시간 전 그녀와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놀라운 변화였고, 나와 후배는 깜짝 놀랐다. 아직 발표대회가 시작된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그녀의 노력이 너무도 느껴졌다. 결과는 솔직히 큰 관심이 없었다. 그 따뜻함 속에 숨겨왔던 '강인함'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발표 후 감격해하는 내 모습을 보며 그녀도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하고픈 말이 너무도 많았지만 결전의 순간을 얼마 남기지 않은 그녀에게 부담을 줄수 없었다. 그냥 딱 그대로만 하면 된다고 더 이상 좋을 수는 없다고 했다.


그렇게 그녀는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발표대회를 위해 바로 출발했다. 나와 후배는 사무실에서 응원을 하기로 했다. 팀장님과 동장님 그리고 몇몇 직원들이 응원을 위해 함께 동행했다. 몇 시간 후 발표를 마친 일행이 돌아왔고, 나는 소감을 물어봤다. 그녀는 리허설처럼 자연스럽게 했고 심사위원들의 반응도 좋았다고 나름 만족스러운 답을 한다.


그리고 한 시간 후 걸려 온 한통의 전화. 그녀가 환호성을 지른다. '최우수상'이었다. 예선을 통과한 최종 발표자들 중에서 유일한 동 주민센터 공무원이 1등을 한 것이다. 그녀 평생 처음 받는 '최우수상'이란다. 나름 '장려상' 징크스가 있었다고 그제야 수줍은 고백을 하면서 소녀처럼 행복해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와 후배 공무원도 덩달아 좋아서 환호성을 질렀다. 바나나우유를 수줍게 올려 놓고 간 그녀의 작은 용기들이 만들어 낸 의미있는 성과였다.


출처 : 픽사베이




Becoming me


공직 안에서 '내가' 되어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느 공무원의 발표 준비를 지켜보면서 내가 깨달은 건


 일상의 작은 것들이 바로 나를 만드는 것


새로운 것.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낯선 것. 이런 것들을 하나씩 도전해보고 또 실천해 보는 용기를 가지는 것. 실패를 해도 좋고 일단 해보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들이 내가 나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 아닐까.


공직이라고 특별히 다를 것이 없다. 사람들로 이루어진 조직 안에서 나를 찾아가는 길은 끊임없는 도전과 실패 그리고 작은 성공경험들.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인생은 그리고 일상은 감동할 것이 너무도 많다.


나는 진심 그녀의 앞날을 응원한다. 1년 후, 3년 후 그리고 5년 후 그녀는 또 어떤 사람이 되어 나아가고 있을까? 굳이 공직이 아니라도 나는 진짜 자기의 모습을 계속 발견하고 또 성장시키는 그런 순간들로만 그녀의 미래 시간이 채워지길 두근두근 기대다.


어느 공무원의 '바나나우유'와 '발표 준비'는 그 누구에게도 받을 수 없는 그녀가 내게 준 특별한 감동이었다.



 

어제 오전이었다. 책상에서 한창 지출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나에게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주무관님, 내일 잠깐 시간 좀 내 주실수 있으세요? 상의 드릴게 있어서요"

"아..내야죠. 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을게요!"

(둘다 웃음)


그녀는 또 어떤걸 준비했을까. 나의 일마냥 궁금하고 가슴 설레는 순간이었다. 다른 사람을 통해 나를 본다는 의미. 바로 이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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