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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May 29. 2019

공무원들은 왜 상복을 입었을까

영지의고민상담실 29

요즘 주변에서 '칠링 이펙트(Chilling Effect)'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칠링 이펙트'는 과도한 규제나 압력으로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 말은 공무원들이 정책을 수립할 때 인사 불이익이나 소송을 당할지 모른다는 심리적 부담감에 위축돼 소극적으로 일관하는 모습을 지칭하기도 한다. 권력의 압박으로 개인 소신이 꺾이고 체념의 덫에 갇히게 된다는 점에서 국가 발전과 성장을 가로막는 독버섯이다. <2019. 5. 28일 자 매일경제신문 '매경포럼', 칠링 이펙트>


칠링 이펙트. 말 그대로 해석하면 '사기 저하' 또는 '의욕 상실'이란 뜻이다. 이 칼럼은 올해 15년 차 공무원인 내가 가장 의기소침했던 때는 언제였는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그렇게 해서 떠오른 기억 하나. 바로 몇 년 전 내가 감사장에서 들은 말이었다.  


당신은 실무자야.
왜 시장이 할 고민을 본인이 해? 실무자는 그냥 법과 규정에 맞게 업무만 처리하면 되는 거야!

그랬다. 공직에 막 들어왔을 때 나는 나름의 장밋빛 꿈을 가지고 있었다. 나로 인해 수천, 수만 명이 조금 더 행복해지는 그런 가치 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그래서 주어진 일에 대해서는 나름 자기 주도를 가지고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공직에서 그런 내 모습은 때로는 무모했고 때로는 너무 순진했다. 그렇게 추진했던 업무가 상부기관의 감사를 받게 되었고, 감사관의 질문에 답변을 하던 중에 "제가 시장이라는 생각으로..." 이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다가 그에게 들은 질책이었다.


내가 도대체 뭘 잘못한 거지?


당시 감사장을 나와 혼자 조용히 생각해 봤다. 내가 뭘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나 같은 실무자는 그냥 관련 규정과 절차에 맞게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하는구나. 그렇게 안 하면 이렇게 피곤한 상황에 처하는구나. 다들 그렇게 무탈? 하게 일을 처리하는데 나는 뭐가 잘못되었길래 이리 힘든 거지? 다시는 피곤하게 나대지 않고 위에서 시키는 것만 해야겠다. 그리고 절차나 규정에 없는 '세상 처음' 하는 새로운 일은 가급적 피해야겠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혼란스럽게 내 머릿속을 채웠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공직에 대해 회의감을 많이 느꼈던 때가 바로 그 시기였다.


맞다. 이것이 공무원의 '칠링 이펙트'다. 그 이후에도 몇 가지 사례가 더 있었지만, 그때 들었던 감사관의 말은 앞으로도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선명하고 강력하게 내 마음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아마 이 시대 수많은 공무원들이 나와 같거나 비슷한 경험을 했으리라 추측한다. 나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힘든 사례도 무수히 많을 것이다.


그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나는 공직에서 무엇을 찾아야 하지? 바로 이 고민. 그 감사관의 말 한마디는 이 조직에서 내가 어떤 것을 추구해야 하는지 '화두'를 던진 것이었다. 조금은 일찍, 공직에서 그렇게 ? 감사를 받은 덕분이다. 그리고 지금도 머릿속에서 메아리치고 있는 그 말 한마디가 없었다면 나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래서 그때의 경험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처음 공직을 들어왔을 때 가졌던 공직만이 가질 수 있는 가치를 계속 지켜내면서 동시에 행복하게 내 인생을 꾸려갈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있기나 한걸까 진심 궁금했다. 결국 내가 이 조직에서 살아남아야 내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도 함께 살아남는 것이기에.


솔직히 공무원에게 '칠링 이펙트'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온다. 각종 감사와 민원, 자료제출, 동료, 상사 등등. 공무원을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은 갖다 붙이기만 한다면 수백, 수천 가지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피할 수 없다' 다. 피할 수 없다면? 그럼 어찌해야 하는가. 최소한 해야 할 일만 하는 '소극'적인 공무원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내가 가졌던 그 꿈을 실현하는 '적극'적인 인생을 만들어 갈 것인가. 어쨌든 선택은 해야 다. 상황에 따라 그때마다 다른 결정은 더 이상하다. 조금은 비겁해 보이기도 하고.


그리고 나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살기로 선택했다.


그 선택 이후 내가 저지른? 대표적인 것들이 유학 휴직, 공부 그리고 시간선택제 전환 이다. 왜 이런 것들이 필요했을까. '내가 주도하는 적극적인 인생을 위해서'라면 너무 거창한 표현일까. 업무에서 위축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내가 많이 알아야 하고 또 계속 배우려는 태도가 필수다. 그래야 쉽게 꺾이지 않는다. 버틸 수 있는 힘을 가지려면 나름의 원칙이 필요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칠링 이펙트. 나를 지키기 위한 세 가지 원칙!


첫째, 아는 것이 힘, 내 분야는 내가 가장 많이 알아야 할 책임이 있다!

기존에 있는 업무든 세상에 없는 새로운 정책이든 내가 담당자라면 관련 정보와 법규정을 최대한 공부해야 하는 책임은 담당 공무원에게 있다. 말이 쉽지 정말 이 첫 번째 원칙은 실천이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항상 지키기 위해 노력하원칙이다. 최소한 내가 몸 담은 조직에서는 내가 가장 많이 알아야 한다. 왜냐 내가 담당자니까. 무조건 알아야 나를 지킬 수 있다. 그 분야에 대해 최선을 다해 조사하고 공부하지 않고 어떤 정책을 이 세상에 내놓는다는 건 조금 위험하지 않나? 내가 담당하는 업무에 대해 잘 몰라서 창피를 당하거나 욕먹지 않으려면 내가 가장 많이 알아야 한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몰라욕먹고 질책당한다면 그것조차도 내가 감수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둘째, 모르는 것은 솔직하게 인정하라! 그리고 주위를 적극 활용하라!

10년 차가 넘은 나 정도면 다른 동료에게 업무적인 것을 물어보는 것이 솔직히 부담이 된다. 하지만 나는 처음 접하는 업무, 처음 가는 부서, 새로운 용어 등 분야나 주제를 가리지 않고 내가 모르는 건 모른다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편이다. 그리고 알만한 사람에게 그냥 편하게 물어본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고맙다는 표현을 꼭 한다. 반대로 내가 아는 분야나 일은 상대방이 피곤할 정도로 세세하게 알려주려고 노력한다. 내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솔직하게 표현하고 질문하고 그리고 지식이나 지혜를 나눠 준 상대에 대한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하는 것. 이것만 쉽게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어도 많은 일들이 생각보다 게 풀릴 수 있음을 나는 이미 경험했고 그래서 일상에서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셋째,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계속 유지하라!

스마트폰이 일상화된 글로벌 시대. 시민들은 실시간 국제 뉴스를 접하고 트위터와 페이스북으로 외국의 시민들과 의견을 주고받는다. 당연히 공공서비스를 대하는 그들의 의식도 매 순간 업데이트와 업그레이드를 반복하고 있다. 어제 일본 교토의 시내버스를 이용한 시민. 그는 실시간으로 다음 교차로의 버스 방향을 표시해 주는 친절한 모니터를 신기한 듯 구경한다. 그 다음 날 아침 그는 우리나라 시내버스에서 짧은 광고와 뉴스 자막으로 급하게 채워지는 비슷한 모양의 모니터 화면을 보고 있다. 이런 경험에 매일매일 노출되는 사람들. 그들은 어떤 것에 관심을 느끼고 또 행복해할까. 이들을 위해 공공서비스를 만들어내고 집행하는 공무원들은 누구보다 더 빠르고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주제가 아닐까? 인터넷도 TV도 없었던 조선시대 백성들을 대상으로 공공서비스를 한다면야 중국과 일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당장은 큰 영향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매일 새로운 기술과 개념들이 생겨나고 우리 시민들의 생활에 실시간으로 영향을 끼치는 있는 시대에 는 살고 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과 이를 업무에 적극적으로 적용하려는 의지와 열정이 무엇보다 필요함은 누구나 느끼고 있다. 비단 공무원뿐만 아니라 어느 조직에 있든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 아닐까?




상주시 공무원들이 상복을 입고 출근을 했다

2019년 2월 21일, 경북 상주시. 인구 10만 명 선이 무너지자 해당 지자체 공무원들이 '상주'된 마음으로 검은 상복을 고 출근하면서 10만 명 인구라도 지키겠다는 절박함을 표현한 것이다.


소위 '지방소멸'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그 길을 일본이 먼저 가고 있다. 일본의 '마스다 보고서'에 충격을 받아 2016년 한국고용정보원이 낸 보고서가 있다. 65세 이상 인구수가 20~39세 여성의 수보다 2배 이상 많으면 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된다. 이 기준에 따르면 경북 의성군이 소멸위험지역 1위, 그 이웃한 지자체가 바로 공무원들이 상복을 입고 출근한 상주시다. 보고서에 따르면 향후 30년 내에 무려 84개 시와 군, 1,383개 읍/면/동이 소멸위험이란다.


그렇다. 공무원의 '칠링 이펙트'에서 시작한 고민이 결국 '지방소멸'까지 이어졌다. 사실 중요한 것은 현실있는 그대로 정확히 보는 것 아닐까. 


이제 사람들은 더 좋은 환경이 보장된다면 이사가 아닌 '이민'을 선택한다. 출생율 0.98, 세계에서 가장 아이를 낳지 않는 나라. 그리고 가장 급속한 고령화가 진행되는 . 이 모든 것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그래서 공직의 '칠링 이펙트' 이슈는 내게 그다지 절박하게 와닿지 않는다. '지방소멸'  다음 차례는 '지자체소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상주시 공무원들이 입은 상복이 내게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이유다.


기회와 위기의 공존. '지방자치'와 '지방소멸'의 시대를 동시에 맞이 한 지자체 공무원들. 그 속에 내가 있다. 지금 당장  것이 있다면 일단은 해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소극행정이든 적극행정이든 칠링 이펙트 이리저리 재보고 이게 먼저니 저게 먼저니 하기엔 우리에게 시간은 너무 없는 게 아닐까?


(몇년 전 글을 수정해서 다시 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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