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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May 23. 2019

내가 공직에서 만난 멋진 사람들 2

20대에서 50대까지 매력적인 그녀들과의 인연

 2018년 10월 2일, 늦은 밤 시청 지하주차장 한켠 허름한 창고 안
저녁 9시가 넘은 시간. 세 명의 여자들이 열심히 뭔가를 하고 있다. 며칠 뒤 개막식을 앞둔 지역 축제에 기부금을 낸 수천 명의 시민들에게 보낼 기념품을 포장하고 안내문을 동봉하는 작업이다. 창고 한쪽 벽에는 작업을 끝낸 박스가 여러 개 쌓여 있고, 다른 한쪽 벽면에는 작업을 기다리는 박스가 또 몇 겹으로 쌓여 있다. 그녀들은 며칠 째 이렇게 작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연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러다 한 명이 휴대폰으로 음악을 켠다. 에드 시런(Ed Sheeran)의 'Perfect Symphony'가 창고 안에 그리고 어두컴컴한 지하주차장에 조용히 흐른다. 잠시 포장을 멈추고 음악에 빠진 세 명의 그녀들. 기념품 박스에 걸터앉아 잠시나마 서로를 위로하는 미소를 주고받으며 다시 일을 시작한다.

   

지난번 '내가 공직에서 만난 멋진 사람들1'의 '공익근무요원'편에 이어 오늘은 '그녀들' 편이다. 바로 지난해 내가 지역축제업무를 담당했을 때 함께 근무했던 매력적인 여성들과의 축제 준비 이야기다.




작년 한 해 나는 우리 지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축제를 담당하는 부서에 근무했다. 업무는 그 축제를 주관하는 민간 위원회를 운영하고 그 위원회를 도와 기부금 캠페인을 추진하는 일이었다. 매년 수십억이 투입되는 대표 축제였기에 업무는 만만치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업무는 소위 '기피업무'가 되어 내가 그 부서에 배치되어 갔을 때 기존 직원들이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았고 결국 부서의 신참인 '암 것도 몰라서 뭐라 할 말도 없는' 내가 맡게 되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같은 얘기지만 공직에서는 심심찮게 일어나는 씁쓸한 단면이다.


이 얘기를 이렇게까지 길게 쓴 이유는 '그녀들'과의 '운명 같은' 만남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부서 배치 두어 달 뒤 뒤늦게 나는 이 업무가 왜 기피업무가 됐는지 알게 되었다. 각종 회의며 워크숍, 벤치마킹 등 위원회 관리와 수천 명의 기부금 자료를 정리하고 이들에게 기념품 배부를 총괄하는 업무. 업무량을 상상하니 앞이 막막했다. 4~5일간 진행되는 축제를 전후해서 수개월간 야근을 밥 먹듯이 할게 뻔했다. 무서웠다. 단순 업무에 내가 치여서 또다시 조직을 원망할까 봐 조금 두렵기도 했다. 대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일자리 담당부서에 '단기 매니저 ' 2명 배정을 신청했고, 다행히 공고와  채용절차를 거쳐 매력 넘치는 그녀들이 우리 부서로 배치된다. 편하게 위원회 담당 매니저 B, 기부금 담당 매니저 Y라고 부르겠다. 그리고 산하기관 임기제로 채용되어 우리 팀에 파견되어 새로이 근무하게 된 H 언니까지 이렇게 3명의 '그녀들'과 나는 그해 10월 축제행사를 위한 즐거운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1. 조용하지만 터프한 능력자, 위원회 매니저 B


매니저 B는 30대 초반의 관공서 단골 아르바이트생이다. 꼼꼼하고 시간 내 업무 처리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수백 명의 명단과 연락처 작업 등 그녀에게 맡겨진 업무는 거의 실수가 없다. 솔직히 매니저 B가 나보다 훨씬 나았다. 사무실에서는 조용하고 말이 거의 없는 B. 대부분은 맡겨진 일을 조용히 처리하느라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점심시간 다 같이 수다를 즐기는 커피타임의 그녀는 정말 터프함에다 수다를 폭발시킨다.


사무실과 회의 등 업무 시간에는 한없이 조용하고 책임감 있는 그녀. 한참 어린 동생이었지만, 뭔가 급히 자료를 만들고 어딘가에 물건이 필요할 때 나는 매니저 B부터 생각이 났다. 그때마다 그녀는 어디선가 나타나 항상 기대하는 것보다 빠르게 '궁예도 울고 갈 독심술'을 쓴 건가 의심할 정도로 내가 원하는 일을 일사천리로 처리해 주었다. 소위 '나의 맥가이버 아가씨'였다. 그렇게 지난 한 해 나는 사무실에서 그녀의 이름을 가장 많이 불렀고, 그때마다 매니저 B는 '네, 주사님!'과 함께 항상 곁에서 나를 든든히 지켜주었다. 그리고 작년 겨울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 결혼을 하면서 관공서 알바를 관두었다. '많이 그립다. OO야'


2. '여성여성' 여리지만 강단이 있는 그녀, 기부금 매니저 Y


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던 중 단기 매니저 자리에 응모한 매니저 Y. 채용 당시 면접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을 땐 한없이 여리게만 보인 참한 대학생 같은 그녀였다. 막상 우리 팀에서 근무를 시작하면서 나도 그렇고 Y도 그렇고 어떤 일부터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서로를 더 알아야겠기에 모든 게 조심스러웠던 첫 한 달이었던 것 같다. 서먹서먹하지만 성실하고 밝은 그녀를 보면서 조금은 다가가기 어렵다고 생각한 나의 마음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기부금 신청서가 하루에도 수백 장 접수되고 매일매일 현황을 보고하고, 만개가 넘는 기념품 명단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기부자들에게 배부를 시작 하면서 사무실이 온통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을 즈음. 그녀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했다.


사실 단기직인 매니저들은 9시 출근에 18시까지만 근무하게끔 되어 있다. 시간 외 근무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매니저 Y는 가끔씩 당일 기부금 현황자료가 완료되지 않으면 퇴근시간이 지나도 가질 않았다. 자료가 완료돼서 나에게 넘겨야 그제야 자리를 정리한다. 나는 여러 번 야근 자체가 불가능하니 나한테 넘기고 그냥 퇴근하라고 했지만 그녀는 자기 일이니까 그냥 다하고 가야 한단다. 심지어 토요일에도 나를 도와서 일을 함께 해 준 적이 있을 정도로 마음이 따뜻하고 맡은 일에 대해서 책임감이 남달랐다. 일자리 부서 담당자에게 매니저가 자꾸 야근하고 주말에도 나온다고 어떻게 수당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냐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정해진 시간에만 근무하도록 하라고 내게 신신당부를 했다. 하지만 매니저 Y는 8개월의 근무기간 동안 꽤 많은 날을 나와 함께  해 주었다.


나로 하여금 '요즘 젊은 친구들은 좀...' 이런 생각을 완전히 바꾸게 만든 성실하고 특히 마음이 누구보다 따뜻했던 친구. 반전이 있다면 좋아하는 술이 소주에 '깔라만시'를 섞은 칵테일이다. 깔라만시 몇 개를 항상 가지고 다닐 정도로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축제가 마무리되고 내가 맨 먼저 추진한 것이 오직 그녀 Y만을 위한 뒤풀이였다. 사무실의 친한 직원들도 초대하여 근처 아자카야에서 그녀를 위한 마지막 파티를 성대하게 선물해 주었다. 수개월간 매니저 Y의 성실함과 배려 덕분에 나는 기부금과 기념품 업무를 큰 사고 없이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지금은 자격증 공부를 위해 다시 일상으로 돌아 간 그녀. 싱그러운 미소가 특히 아름다웠던 Y가 유독 그리운 밤이다.

 

3. 경단녀에서 우리 팀의 든든한 버팀목이 된 임기제 H 언니


H 언니는 정말 멋진 분이다. '멋지다'는 말 외에는 달리 그녀를 표현할 단어가 없다. 50대의 나이, 수십 년 동안 평범한 주부로 살다가 우리 부서에서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녀. 작년 4월 어느 봄날, 우리 팀으로 첫 출근을 한 H 언니. 단아한 머리스타일과 옷차림에 차근차근한 말투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공무원들과 근무는 처음이라 다소 긴장하고 조심스러웠다고 나중에 내게 털어놨다. 일명 '경단녀(경력 단절녀)' 위치에서 모든 것이 어렵고 두려운 감정은 당연한 것이었다.


H 언니의 업무는 지역 내 4~5군데 판매처의 매출을 정리하고 시청에서는 기념품을 판매하고 재고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젊은 시절 광화문에 위치한 무역회사에서 수년 동안 회계와 총무업무 맡아본 언니가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가 가진 당당함과 자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모두를 배려하는 마음까지. 그녀는 업무를 단시간에 익히는 것은 물론 곧 우리 부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출근하고 이틀째였던가. 매출 관리를 위해 사용해야 하는 엑셀 파일에 수치를 어떻게 입력해야 할지 몰라서 조심스럽게 나에게 물어보았던 H 언니는 얼마 되지 않아 수식도 활용하고 한글파일로 표도 만들고 빠른 시간 안에 많은 것을 습득했다. 뭔가를 배우는 것 자체를 즐겁고 감사한 일로 받아들이는 H 언니의 모습에 나도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말마다 여행을 즐겨하던 H 언니. 나와는 하루 걸리는 출장을 함께 다녀오면서 그 지역에서 유명한 커피와 빵도 같이 사 먹고 이런저런 인생 얘기도 편하게 나누었던. 내겐 그냥 '참 좋은 언니'였다. 출근 첫날 내가' 호칭을 어떻게 불러 드릴까요?' 물었을 때, '여사님'이란 호칭이 별로라고 그냥 '언니'가 좋다고 솔직하게 말해 주었던 멋진 그녀. 나에게는 세상에 몇 안 되는 '언니'가 바로 이 H 언니다.


너무도 특별했던 그녀들과의 런치 세미나르~


솔직하고 멋진 세 명의 그녀들과 나, 그리고 우리 팀의 막내 신참 공무원까지 20대에서 50대까지 나이도 다르고 인생의 경험도 모두 달랐던 5명의 여성들. 우리는 점심을 먹고 종종 커피와 산책을 함께 했다. 그 시간은 모두에게 힐링을 선사하는 마법 같은 이었다. 매일 20~30분씩 주어지는 이 시간을 오롯이 긍정 에너지와 5명의 다채로운 캐릭터가 잘 빛날 수 있도록 서로를 격려해 주는 것으로 채웠다. 근무 시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뒤 점심시간 성향만큼 다양한 종류의 커피를 앞에 두고 우리의 일상, 미래, 고민 그리고 업무에서 느꼈던 어려움 등 모든 것을 주제로 세미나를 하듯 업무 시간보다 더 눈빛을 반짝이며 서로를 응시하고, 이야기하고, 경청하고 또 반응했다.




그렇게 우리는 8개월이란 시간 동안 서로에게 의지하고 좋은 추억 선물했다. 그래서 대규모 축제를 무사히 치러낼 수 있었다. 1년 남짓의 기간 우리에게 흔한 다툼이나 오해 등 안좋은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하시만 그런일은 결코 없었다. 누구도 상처 받거나 소외되지 않았다. 어떤 힘이 작용한 걸까? 축제 후 우리들만의 뒤풀이 자리. 누가 공무원이고 누가 아르바이트생인지 구분은 무의미했다.


우리가 함께 한 시간, 늦은 밤 지하 창고에서 포장 작업에 무거운 박스를 낑낑대며 옮기면서도 그냥 서로를 바라보며 유쾌하게 웃을 수 있었던 그 순간들. 서로를 의지했고 그리고 또 많은 것을 배웠다. 이렇게 우연처럼 아름다운 인연을 나에게 끊임없이 선사하는 공직이 나는 그냥 좋다. 그렇다.


지난해 겨울 매니저 B의 결혼식장. 오랜만에 5명의 그녀들이 다시 뭉쳤다. 매니저 Y가 '수줍게' 가방에서 그걸 꺼내 놓는다. 누군가 소주 한 병을 테이블로 가져온다. 그렇게 우리는 '깔라만시 칵테일'과 함께 런치 세미나를 다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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