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지 Jan 25. 2023

공무원, 스커트 그리고 하이힐

영지의고민상담실27

"주무관님, 대회의실로 잠깐 오시겠어요?"

"저요?"

"네, 곧 있을 직원 체육대회 준비 때문에요."

"아. 네... 바로 갈게요."


몇 년 전 겨울. 직원 체육대회를 며칠 앞둔 날 오후였다. 체육대회를 담당하는 주무관이 급히 나를 불렀다. 연습 명단에 들어간 지도 모르고 자리에서 일을 하고 있던 나는 급히 강당으로 달려갔다. 부서의 젊은 직원들 5~6명 정도가 모여  다. 그리고 옆에서 얼굴이 익숙한 여성 단체원 한분그들의  동작을 열심히 지도하는 중이었다.


예전에 다른 일로 얼굴을 익힌 단체원이었다. 나는 반갑게 먼저 인사를 하고 내 자리를 찾아서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남녀 3명씩 짝을 이룬 백댄싱이 그날 연습의 목적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가수의 유튜브 영상을 틀어놓고 동작 따라 하기에 모두 여념이 없었다. 사실 나는 직원 체육대회라서 줄다리기, 끈 묶고 달리기... 뭐 그런 것만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춤추기라니!


체육대회 개막식에서 OO노래를 하며 등장하고 그 뒤를 채울 무용단을 나를 포함한 직원들로 구성한 것이다. 20~30대. 한창 놀기 좋아하던 시절 이후 춤하고는 오랫동안 담을 쌓았던 내게 많이 난감한 과제였다. 하지만, 평소 일적인 딱딱한 대화만 했던 직원들과 뭔가를 연습하고 함께 준비한다는 건 또 다른 재미를 내게 느끼게 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체육대회 전날 저녁까지 직원들과 함께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나름 최신 댄스 연습에 두했다. 물론, 여성 단체원의 열정 넘치는 호응과 응원도 있었다. 개인 시간까지 내서 직원 체육대회의 개막식 준비를 도와주러 온 것이기에 내심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문제는 체육대회 전날 마지막 연습시간에 발생했다.


"우리 의상은 어떻게 입을까요?"(누군가 질문을 했다)

"여직원들은 귀여운 율동에 맞게 스커트에 하이힐 어떤가요?"(옆에서 지켜보단 여성 단체원이 제안했다)

"그러게요."(현장에서 또 누군가 호응을 했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묘한 정적이 잠깐 흘렀다)

"그럼 내일 여직원은 모두 스커트와 구두 준비해서 오세요!"(누군가 급히 상황을 정리한다)

"네, 알겠습니다!"


대회의실을 천천히 걸어 나오면서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스커트에 하이힐이라.' 마흔 살이 넘어가고 등산과 운동, 걷기에 재미를 느낀 나는 예전에 즐겨 신던 높은 굽의 구두를 거의 신지 않게 되었다. 뭐 신발장을 뒤지면 한 두 켤레 먼지가 뽀얗게 싸인 채 내 눈앞에 수줍게 나타날지도 모른다. 스커트도 마찬가지다. 평소에 거의 입지 않는 치마와 구두고 직원들 앞에서 춤까지 추어야 한다니. 난감했다. 그리고 뭔가 모르게 마음까지도 불편했다.


사무실 책상으로 돌아와 잠시 더 고민하다가 바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더 늦기 전에 바로 잡는 게 맞다.'

"안녕하세요, 저 OOO 주무관입니다!"

"어머, 웬일로 전화를 다 주셨어요. 지금 집에 가는 길이에요"

"네, 오랜만에 다시 뵈어서 너무 반가웠는데  따로 얘기할 시간이 없었어요"

"저도 함께 행사 준비해서 너무 좋네요"

"OO님, 그래서 말인데요...."(잠시 뜸을 들였다)

"혹시 아까 제안하신 여직원들 의상이요. 남직원들과 같이 바지와 운동화가 어떨지 해서요?"

"무슨 문제라도...."

"그게, 뭐 이쁘게 보이는 건 저도 좋은데. 혹시나... 보시는 분들이 오해가 있을까 봐요."

"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저도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네요. 바로 담당주무관님께 전화해서 말씀드릴게요."

"이해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내일 뵐게요!"


그리고 몇 분 후. 체육대회를 담당하는 직원의 문자가 다. 여직원들 의상을 청바지와 운동화로 바꾼다는 내용이었다. '야호!' 속으로 만세를 부르며 나는 조용히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잠깐 고민의 시간도 있있지만. 다행히 계획대로 상황이 정리되었고. 잠시나마 마음에 머물던 불편함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음 날 저녁. 체육대회가 시작되었다. 기관장인 OO님의 노래에 맞춰 6명의 남녀 주무관들은 청바지에 운동화, 선글라스와 형형색색의 가발까지 쓴 채 무대를 뛰어다녔다. 나도 시작 전에 긴장은 되었지만 직원들과 동작도 맞춰보고 가발을 쓴 서로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며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공연을 할 수 있었다.  바로 이어진 체육행사. 200여 명의 공무원들이 여러 팀으로 나뉘어 소리 지르고. 뛰어다니고. 넘어지고. 기쁨의 환호성을 질러댔다. 나도 우리 팀을 위해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그날따라 품이 넉넉한 청바지와 운동화가 유난히 더 편하게 느껴졌다.


당시 어느 항공사 '사장님' 앞에서 펼쳐진 여승무원들의 장기자랑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다. 물론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누군가를 위한 은근한 '아부나 압박, 압력' 그런 건 어디에도 없었다. 단지 춤을 추는 여성은 스커트에 하이힐을 신어야 한다는 꽤나 오래된 념을 누군가 표현했고. (나를 제외한) 대부분은 그걸 그냥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 것뿐이다. 


나는 그럼 언제부터였을까. 아마도 대학원 졸업 즈음이었던 것 같다. 나를 '공무원나리'라고 부르던 원우가 있었다. 처음에 간접적으로 불편한 마음그에게 표현했지만 전달이 안 된 건지 나를 계속 그 호칭으로 불렀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그에게 다가가 나는 분명하게 했다. '기분이 나쁘다. 다시는 나를 '~나리'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라고. 다행히 그가 바로 사과했고 다시는 '나리'라는 호칭이 그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나의 개인적인 불편함'을 표현하는 방식에 무척이나 서툰 공무원이었다. 그래서 호칭하나 바로잡는데 무려 반년이나 걸린 것이다.


세상에는 의도치 않은 오해와 사건이 생각보다 많다. 체육대회의 단체원도 대학원의 원우도. 악의든 선의든. 뭔가 의도가 는지가 과연 중요한 문제일까. 그건 아무도 알 수 없다. 심지어 그들조차도. 사실 가장 중요한 건 '사회성'이라는 가면아래 내가 나의 진짜 감정에 대해 점점 무뎌지는 것이 아닐까. '무던한 사람'으로 군중 속에 숨고 싶은 욕망은 자꾸만 스스로를 '내가' 불편한 일상의 많은 순간들을 습관처럼 회피하게 만든다. 진짜 내 목소리를 내야 하는 상황에서조차도.


사실 그때 내겐. 짧은 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고 춤을 추는 것이 가장 큰 불편함이었. 단체원과 잠시 불편해지는 편 오히려 쉬운 결정이었다. 더군다나 또 다른 오해의 가능성과 불편함을 잔뜩 품은 옷차림에서 청바지와 운동화는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그렇게 나는. 화려한 조명과 음악소리가 쿵쾅거리는 내 생애 최고의 체육대회를 지금도 흐뭇하게 기억한다. 꽤나 선명하게 그리고 편. 하. 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