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지 Oct 03. 2023

'우아한' 응징의 발견!

영지의고민상담실 28

오랜만에 공휴일, 장을 좀 부린 아침이다. 그래봤자 8시쯤 일어나서 대충 세수를 하고 아파트단지 산책코스로 나왔다. 현관문을 나서면서 연신 눈을 비벼보지만 어제부터 차곡차곡 쌓아올린 피로감이 불러온 따끔따끔한 눈시림은 나를 우아함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피곤함 가득 껴입은 후줄근한 동네 주민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거나말거나. 10월 가을의 서늘한 기운이 훅 느껴지는 아침 공기 속으로 나는 터벅터벅 걸어들어갔다.


마침 '마룬5'의 '선데이 모닝'이 양쪽 귀에 끼워놓은 이어폰을 통해 '뚜빠뚜빠~' 경쾌하게 흘러나왔다. 햇살이 반짝반짝 빛나는 일요일 아침에 딱 어울리는 곡이지만 오늘같이 우중충하게 잔뜩 흐린 화요 아침에도 그닥 나쁘지않았다. 중요한 건 내 기분이니까.


중간중간 찢어지고 불쑥 튀어나온 인조잔디가 깔린 조깅 트랙을 천천히 걸으면서 어제부터 10시간 가까이 작업중인 수업 발표자료를 떠올렸다. 이번주 토요일 오전 수업의 발표자료다. 대학원 두번째 학기인 현재. 내가 '유일하게' 잘보이고싶은 마음이 든 조직학 교수님의 강의라서 더욱 신경이 쓰인. 수백페이지(정확히 640페이지다)에 달하는 두꺼운 원서 한권을 한학기동안 챕터별로 학생들이 나눠서 발표하고 다같이 토론하는 세미나 방식의 수업이다.


이번에 내가 발표할 내용은 미국 행정조직의 구조와 과정에 대한 저자들의 관점들을 정리하고 한국의 행정구조와 비교하는 것이다. (그냥 써놓기만 했는데도 마음이 급 무거워진다) 한국의 것과 비교분석은 그냥 내맘대로 추가한 것이다. 왜냐고? 남의 나라 사례는 우리와의 비교 분석없이는 '그냥 남의 '이기 때문이다. 진짜 핵심은 그걸 통해 내가 맞닥뜨린 현실을 정확하게 직시하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우리 나름의 통찰을 얻는 것이다. 아무튼.(방심하면, 이렇게 요즘 내 글이 자꾸만 무거워진다ㅠㅠ)


사실 지난 몇주간 미국 행정학자들이 쓴 영어 원서를 기계적으로 이해하고 읽어내려가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힘든 시간을 보내는 중이. 한국말로도 어려운 행정학 용어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책. 수십페이지에 달하는 발표분량때문에 어떻게든 한 페이지라도 넘겨보려하지만 나의 손가락들은 자꾸만 움츠러든. 거기에다 미국 행정체계에  대해서 거의 아는게 없는 나의 얄팍한 배경지식까지 더해지니 답답하게 시간만 흘려보내곤 했다. 수시로 내 눈의 초점은 책에서 멀어졌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무한 반복했다. 그러다가 발견한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책을 쓴 미국 행정학자들의 날선 감정을 내가 느낀 것이다.


게 무슨소리냐고? 두꺼운 원서를 만지작거리며 알파벳 위를 한없이 방황하던 두 눈동자가 봄날의 햇살처럼 반짝거린 순간있었다.(페이지 190)저자들이 거의 유일하게 느낌표(!)까지 날리면서 신랄하게 비꼰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분노의 지점다. 이 책도 처음에는 다른 행정학 이론서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관료제, 위원회, 민주주의... 듣기만해도 가슴이 '턱' 막히는 그런 딱딱햐고 무거운 내용들로 빼곡하다. 그런데! 이런 책에서. 누군가에 대한 저자들의 '날것'의 감정이 훅하고 내게 들어온 것이다.

<책, 페이지 160>


현대 행정학이론서의 '성경책'으로 불리는 이 책(Public Administration; Understanding management, Politics, and Law in the Public Sector) 9번째 개정판이 2022년에 나왔다. 2001년 초판 이후 수십년간 전세계 행정학 연구자들에게 아주 널리 깊게 읽혀지고 있는 책이다. 그리고 내가 읽고 있는 이 최신판이 트럼프 행정부 시절에 출간된 것이다.


특히 저자들이 분노의 느낌표 '!'를 선명하게 찍은 부분은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일 때 트럼프 행정부 대통령실에서 질병관리 전문기관(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CDC)자문이나 검증을 아예 거치지않은 코로나19 검사 지침을 기관 웹사이트에 버젓이 게시대목이었다. 내 기억에도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19 대응과 관련해서 꽤 자주 황당한 발언들을 쏟아냈던 것 같다. 그런 트럼프 행정부의 노골적인 정치편향성에 대한 분노를 학자들은 (당시 기준)최신버전으로 아주 신랄하게 비꼬다. 학자들의 일반적인 대응처럼 보이지만 어찌보면 꽤나 잔인한 응징이 아닐까싶다.


당시 저자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결과를 알았든 몰랐든 들이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최고의 복수를 한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 시절 수많은 어이없는(!) '행정과 행동'이 미국을 넘어 전세계 사람들, 특히 행정학을 공부하는 현재와 미래의 학생들까지 포함해서, 기억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도록 그들이 집필하는 이론서에 분명하고 확실하게 박아둔 것이다. 트럼프행정부는 미국 행정사의 '나쁜 사례'라고. 비록 즉각적인 반응 확인은 어렵겠지뭔가 말도 안되는 상황에 대해 '아주 길고 잔인하게' 최고로 '우아한 응징'한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2023년 10월 현재. 행정을 둘러싼 복잡한 정치권력소용돌이 속을 지나고 있는 대한민국. 영화, 드라마, 게임 그리고 현실 속에서. 상대를 향한 날선 비난과 거친 공격 혹은 냉소주의만이 나를 방어하는 최선의 선택지처럼 보인다.15년차 공무원이자 행정학 연구자의 길을 이제 막 시작한 나에게. 책을 쓴 3명의 행정학자들이 트럼프 행정부에 가한 날카지만 '우아한' 응징 '펜날'은 뭔가 남다르. 심지어 이 응징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미 전세계 수많은 대학 도서관. 서점, 가정집 서재 한 공간을 이 책은 차지하고 있을테니까. 심지에 지금 이 순간에도 아마존닷컴을 통해 누군가의 집으로 책은 '배송중'에 있는지도 모른다. 행정학이 사라지지않는 한 이 책도 영원히 존재한다. 그 안의 수많은 사례들과 함께.


평소 나는 연필심이 뭉툭해지기 무섭게 수시로 뽀족하게 깎아 두는좋아한다. 끝이 날카롭게 다듬어진 까만 심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일상에 무뎌지고 둔탁해진 내 마음과 머리를 연필심이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콕콕 찌르는것 같아서다. 오늘 나는 연필을 수시로 깎아대 습관이 지닌 남다른 의미를 새롭게 발견한 것 같아서 조금 기분이 좋다. 그까짓 '우아한' 응징? 나도 한번 해보지 뭐.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누가 그랬더라!?


#영지의고민상담실 #행정학 #미국행정

매거진의 이전글 공무원, 스커트 그리고 하이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