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인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은 일종의 관찰이자 자기 성찰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정의된다. 특히,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여전히 그 존재가 살아있는 동안 남긴 많은 것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감동받고 영감을 얻는다면.
라울 뒤피. 이름도 낯선 어느 프랑스의 예술가가 남긴 한 문장에서 나는 그의 인생이 궁금해졌다. 누군가의 인생을 유년기부터 찬찬히 읽어나가는 일은 그것이 텍스트의 형태이든 이미지든 관계없이 나에게는 일종의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된다.
풍족하지 않았던 그의 유년기. 장학금 없이는 미술공부를 꿈꿀 수 없었고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면서 그림을 그려야 했던 예술가. 삶이 그에게 친절한 건 아니었지만 그는 항상 긍정적으로 인생을 꾸려가려고 한 것 같다. 그를 기억하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부지런함, 열정..' 등등 비슷한 모습으로 그를 표현했다. 단 하나의 문장으로 나는 그가 얼마나 자신의 인생에 진심이었고 예술가로서 어떤 길을 살았을지 어렴풋이 짐작이 되었다.
라울뒤피는 색채의 마술가로 불릴 정도로 색감을 활용한 예술작품으로 유명한 프랑스 태생의 예술가다. 모네, 마티스, 피카소, 세잔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고 주류를 이끈 예술가들의 영향을 골고루 받았지만, 끝까지 그 만의 독특한 표현방식은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는 전통적인 회화부터 석판화, 일러스트레이션, 삽화, 패브릭(섬유) 패션까지 분야와 재료를 넘나들면서 그에게 보이는 세상을 색채와 선 그리고 형태로 자유분방하게 표현했다.
내가 특히 눈길이 갔던 그의 작품은 '수채화'다. 프랑스 르와브르, 조용한 항구도시 출신인 그에게 '물'이 주는 의미는 무엇보다 특별했으리라. 그래서 그가 표현하는 바다, 호수와 같은 물의 이미지는 그 어떤 피사체보다 다채롭고 섬세했다. 고향의 해변에서 바라보던 푸른 바다와 항구의 모습은 그의 감정과 노화, 인생의 희로애락 그리고 그날그날의 날씨와 바람에 따라 때론 동반자와의 교감에 따라 다르게 보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가 표현한 수채화 속 바다는 어느 하나 같은 것이 없었다. 우리 일상의 매 순간이 특별한 것처럼 말이다. 단지 우리 스스로가 순간순간의 의미를 놓치고 있을 뿐. 라울뒤피의 수채화는 물의 가벼움과 유연함, 포용, 부드러움까지 모두 담겨있다.
그의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면 뒤피의 수채화가 특별한 이유가 언급된다. 종이를 먼저 물에 적신 후 마르기까지 밑그림 없이 20여 분 동안 그림을 그려낸다고 한다.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처음부터 그 과정을 반복했다. 그만큼 즉흥적인 터치감에서 오는 '자유분방함'에 조금씩 세련됨을 더하지 않았을까.
앙리 마티스의 영향을 꽤 받은 그의 회화는 푸른색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파란색을 돋보이게 하려고 붉은색, 흰색, 검은색을 썼을까 아니면 그 반대였을까.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없지만 그가남긴 색채 가득한 작품들은 내게 이런저런 궁금증을 불러온다.
지난 5월부터 뒤피의 전시가 열리고 있는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은 10시 개장시간부터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나와 거의 같은 시각 입장한 60대의 여성 두 분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작품설명을 꼼꼼하게 읽어보고 작품마다 앞에 서서 각자의 느낌을 조용히 주고받고 있었다. 둘이서 하는 여행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반면 나는 혼자서 전시장을돌아다니며 그가 독일과 파리 등지를 여행하면서 받은 영감으로 그린 그림들 앞에 서서 '과거의 나'와 이야기를 나눴다. 호주 시드니, 일본 교토, 뉴질랜드 오클랜드... 내가 여행한 나라와 도시들을 소환하며 나에게 그 여행들이 어떤 것들을 가져다주었는지 그때의 나와 소곤소곤 의견을 주고받았다.
라울뒤피가 앙리마티스와 함께 독일군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 반대성명서에 서명한 몇 안 되는 화가라는 사실에 나는 시대적 흐름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동참하고 있는지 고민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뒤피가 살았던 당시는 화가라는 직업이 지금보다 훨씬 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시기였기에 일과 작품활동을 계속 병행해야만 했던 그의 상황. 그가 근무했던 공공기관에서 공무원과 예술가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으로 결국 공무원을 관두고 예술가로서 작품에만 전념하는 결정을 내렸다는 대목에서 꼭 나의 이야기를 누군가 방금 내게 해준 듯 당황스러움이 몰려왔다.
그래서 나에게 누군가의 인생을 바라보는 일은 나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언제부터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벌써 전시회를 다닌 지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만큼 내게도 많은 변화가 생긴 것 같다. 그중 하나가 작가나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예전엔 일방통행처럼 시선이 한 방향으로만 달렸지만 지금은 양방향 길처럼 작가에게 간 시선이 나에게 되돌아왔다가 다시 또 작가의 다음 인생 지점을 향해 출발한다.
나의 방에는 이제 마티스의 블루누드와 함께 라울뒤피의 파란 바다를 그린 수채화가 자리 잡았다. 두 개의 아름다운 푸른색 사이에서 나의 시선은 다시금 나를 향해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