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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Sep 11. 2022

'미로'안에서 재회

호안 미로, '여인, 새, 별' in 마이아트뮤지엄

수요일 오후의 사무실.

나른한 햇살이 넓은 창을 통해 쏟아지고 있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다 문득 전시회 하나가 곧 끝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미 한번 다녀온 전시였지만 한번 더 와야지 결심하고 계속 미뤄둔 것이다. 아직 10이상 남아있는 연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 쓰냐, 그냥 버리자'. 업무를 대행하는 직원에게 괜찮은지 물어보니 걱정 말고 쉬고 오란다. 냉큼 오전 반가 결재를 올렸다.


목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5시간의 자유시간이 생겼다. 그날 아침이 되어 나는 평상시 출근처럼 분주하게 준비해서 현관을 나섰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출근이 아닌 외출이요, 사무실이 아닌 미술관이 목적지다.


내비게이션으로 목적지 지정을 하고 천천히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오늘따라 내비게이션이 미술관으로 가는 경로를 조금은 다르게 안내한다. 고속도로를 바로 진입하지 않고 인근 도시를 거쳐가는 코스다. 낯선 도로를 달리면서 긴장은커녕 새로운 풍경에 눈이 더 즐거워졌다. 하늘은 더없이 높고 파랬다.


도심에 들어서면서 도로는 더 많이 막혔다. 그럼에도 오늘 나의 외출은 모든 게 놀이이자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 모든 기다림을 품을 수 있었다. 선선한 가을바람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전시관 입구를 들어섰다. 지난번과는 또 다른 분위기다. 오픈 시간이 막 지났기에 커다란 공간에 오롯이 나의 숨소리만 들린다.


호안 미로. 그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의 예술가다. 여인, 새, 별을 주로 대상으로 하는 초현실주의 화풍으로 유명하다. 특히 감각적이고 혁신적인 화풍으로 독창적인 화풍을 만들어냈기에 미국 하버드대학의 카페테리아의 벽그림을 위해 그가 특별히 초청되었을 정도다.


그의 그림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검정이다. 그동안 수많은 거장들의 작품을 직접 보았지만 호안 미로처럼 검정을 세련되게 표현한 화가는 없었다.


내게도 검정은 특히나 좋아하는 색상 중 하나다. 그리고 이런 선호는 옷이나 장신구로 자연스럽게 표현된다. 검은색 정장 바지, 치마, 블라우스, 원피스, 모자, 양말, 코트 등등. 종류, 재질, 모양도 다양한 검정으로 내가 세상을 향해 나를 열심히 표현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검정하면 강인함과 고함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하지깔끔함에서 나오는 세련미와 알 수 없는 모호함도 분명히 있다. 이렇게 검정나의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기분이든 감정이든 행동이든 나에게 영향을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요즘 검정 마스크만 쓰고 다니다 보니 흰색 마스크는 왠지 어색한 그런 느낌이. 이렇게 색채에 대해 그것도 한 가지 색에 대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꽤나 많다.


그래서일까. 호안 미로의 검정은 어떤 색보다 친숙하고 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바탕그림 위 검정 덧칠을 통해 여인이든 자연이든 우주든 희망이든 그는 뭔가를 전달하려 하지만 모호한 연결과 형태로 그것이 무엇인지는 보는 이의 해석에 그냥 맡겨버린다. 이것이 요즘 한창 주목받는 추상화(초현실주의)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그의 후기 그림들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검은 선과 점, 면. 그것들이 주는 간결함과 동시에 애매한 형태의 모호함에서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냥 본능적인 궁금함 때문이다. 농부를 그린 그림에서는 근면함과 풀냄새 풍기는 강인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여인과 새를 표현한 그림에서는 한없이 따뜻한 검정의 느낌이  강하다.

농부

그럼에도 그는 여인, 새, 별을 통해 일관된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 바로 '희망'이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감의 화풍에 비해 그는 굉장히 긍정적인 예술가다. 전시의 도슨트 정우철도 비슷한 언급을 했다. 1~2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 그리고 독재정부를 경험하면서 '이성이 규칙'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그걸 강요받았다.


그래서 호안 미로와 같은 일부 예술가들은 대중에게  세상에는 '희망'이 있음을 끈질기게 표현했다. 그런 이유로 정치, 사회적으로 어지러웠던 1940~50년대. 호안 미로의 작품에는 '여인, 새, 별'이 거의 나타난다.(여인은 우주, 별과 새는 희망과 자유를 각각 의미한다)


강렬하면서도 따뜻하고 한편으로는 냉정한. 검정의 선과 면을 통해서 호안 미로는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말한다. 어두운 밤하늘 별은 밝게 빛나고 있음을. 여성에 대한 존경 어린 숭배를 통해 더 넓은 우주 생명 탄생의 가치. 새들의 경쾌한 비행을 그리면서 자유에 대한 절실한 갈망을. 그 모든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진짜 세상임을.


전쟁과 독재로 피폐한 생활에서. 그는 오직 희망을 생각하며 90세까지 매일 8시간씩 작업을 계속했다. 앙리 마티스가 그랬고 영국의 80세 화가 로즈 와일리와 마이클 크레이그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예술가들의 삶과 같이 호안 미로도 평생을 자신만의 색깔을 찾기 위해 붓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노년의 호안 미로가 아주 단순화된 초현실주의 기법을 완성하기까지. 그는 프랑스, 미국, 중국, 일본 등 수많은 나라의 예술가들과 인연을 맺었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호안 미로 작품에서 선과 점으로 표현된 검정이 중국 서예 기법과 많이 닮아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한다. 마티스의 '나디아' 시리즈도 왠지 모르게 수묵화와 같은 동양적 간결함이 느껴졌는데 스페인 화가의 그림에서 중국의 서예 기법을 발견할 줄 누가 알았을까.


이렇게 거장들의 일생을 알아가다 보면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 바로 '위대한 단순'이다. 자신만의 기법을 발견하고 완성하기 위해서 평생을 반복하고 연습하는 것. 마티스가 말년에 가위 오리기(컷아웃)를 수천번 연습하면서 최적의 비율로 최대한 단순하게 인간의 신체를 표현하는 데 성공했듯이. 호안 미로 또한 90세가 될 때까지 매일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만의 화풍을 결국 찾아낸 것이다.


멋진 것은 복잡하지 않다. 단순함을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다. 피나는 반복의 결과물이다. 호안 미로의 초기 작품들이 과도하게 세밀하고 복잡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슨트 설명 중) 깜짝 놀랐다. 마티스 또한 야수파 이전에 정물화가 그저 그랬고 인물화들이 과한 채색 감이 있었는데 노년의 컷아웃 작품들은 극도의 절제된 곡선과 비율로 단번에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과 비슷했다.


한 명의 예술가가 아주 상반되는 느낌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도 신기한데 그 과정은 더 흥미롭다. 누군가 경쟁자를 만나서 그리 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기존에 자신의 화법을 부정하든 개선하든.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자발적으로 바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방식에 대한 솔직한 반성이 꼭 필요한데 몇몇 거장들은 그걸 너무도 쉽게 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부정하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난다? 기존에 가졌던 모든 것을 신념에 대한 의문을 품고? 더군다나 이미 기존의 방식으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어려운 것이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은 대부분이 호안 미로가 노년에 작업한 것들이다. 일생동안 겪은 수많은 도전과 시행착오 끝에 극도로 단순화되어 거의 완성체그만의 화풍이 녹아든 결과물인 것이다. 그의 예술인생 초중반에 그렸던 아주 세밀하고 복잡한 작품들을 보면 과연 이것이 같은 화가가 그린 것이 맞나 싶을 정로로 완전히 다르다. 마치 인생 최악의 흑역사였던 나의 20대와 그나마 조금은 둥글둥글해졌다고 자평하는 현재의 40대를 직접 비교하는 것과 같다. 


사실 일생을 거쳐 굵직한 변화를 거듭한 예술가 한 사람의 작품을 보고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이렇게까지 내 인생과 연결 지어 해석이 가능할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굉장히 운이 좋았다. 혼자 두 번째의 관람을 마치고 막 전시관을 나가려는 찰나. 멀리서 들려오는 스피커음에 이끌려 우연히 도슨트 투어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주로 화가의 인생에 초점을 둔 해설로 정평이 나있는 정우철 도슨트의 도움으로 나는 한발 더 깊이 호안 미로의 인생과 작품 속에 들어갈 수 있었다.


 2019년 11월. 당시 마이아트뮤지엄의 개관 전시로 알폰스 무하의 작품을 보러 갔을 때 나는 정우철이란 도슨트를 처음 알게 되었다. 동그란 안경 너머 차분한 목소리로 관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던 도슨트. 3년의 시간이 흐른 2022년 9월. 호안 미로 전시에서 그를 다시 마주했다.


검은색 정장으로 차려입고 아이패드를 들고 서있는 그의 모습예전보다 2~3배는 더 늘어난 관람객 너머 보였. 3년 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때가 문득 떠올라서 내 얼굴에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여전히 예술가의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키 큰 어른들에 가려 그림이 잘 안 보이는 아이들이 앞줄에 앉도록 배려하는 모습도 여전하다.


그리고. 작품 자체만 봐서는 부족하다고. 그 뒤에 숨은 예술가의 인생까지 알아야 한단다. 자신의 역할은 '전시회 입구까지 관객을 안내하는 것'이고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오롯이 관객의 몫임을 다시금 강조하며 그의 해설은 끝났다. 그의 마지막 말은 여전히 내 머릿속에 남아서 생각의 고리를 만드는 중이다.


'미로'안에서 그를  다시 만난 건 어쩌면 또 다른 미로의 시작점인지도 모르겠다.


#호안미로 #여인새별 #마이아트뮤지엄 #전시회 #스페인 #예술 #추상화 #도슨트 #정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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