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지 Mar 06. 2022

앙리 마티스, 두번째 만남

Life and Joy 전시 in 예술의전당

도대체 '그린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하얀색 도화지에 밑그림을 그린다음(drawing) 나무는 녹색으로 하늘은 푸른색으로 하나씩 색을 입혀가는(painting) 정통적인 회화의 방법이다. 과연 이것이 맞는 해석일까? 어제 나는 선명하게 깨달았다. 내가 알고 있던 '그리기'의 의미가 어쩌면 실제로 '그려지는 것'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라는 걸 말이다.


봄햇살 가득한 일요일 아침. 거의 1년 만에 다시 마티스 전시회를 찾았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2층은 온통 마티스의 선과 색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블루누드' 시리즈로 만든 엽서와 포스터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파랑이란 색이 저렇게 멋질 수 있다는 걸 나는 그의 블루누드 시리즈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사실 어쩌면 파란색 그 자체보다는 거기에 (수천번 연습 후 완성한) 완벽한 인체의 곡선 때문인 지도 모른다.


사실 이번 전시가 좋았던 건 마티스 작품 원본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특히 색종이를 밝은 색의 바탕에 붙여서 만든 그의 컷아웃 작품들은 실물이 훨씬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단순한 평면의 이미지가 아니다.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 가로세로 1m 채 되지 않는 유리 액자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색종이가 다채로운 형태로 미세한 단층들을 만들며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 하나의 완벽한 세상이 그 안에 담겨 있다.  한두 점이 아닌 무려 200점이 넘는 작품들이다. 물론 드로잉도 있고, 석판화, 동판화, 유화작품도 있다.


하지만 그가 말년 5년 동안 암 투병과 함께 침대에 누워 어떻게든 작업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로 색종이를 오려 붙여 그려낸 세상의 단면들은 그 어떤 것보다 선명하게 내 가슴에 남았다. 내게 (개인적으로) '블루'의 재발견을 선사한 '블루누드' 커아웃 시리즈, (신화 속 추락이 아닌) 붉은색 심장이 튀어나올 듯 힘차게 날아오르는 듯한 '이카루스'를 그려낸 화보집 '재즈', 마티스의 다양한 예술가적 실험을 모조리 담아낸 베르베 잡지 시리즈까지.


특히 이번에 유일하게 사진 촬영이 가능해서 몇 장 담아 온 작품이 있다. 동판화 '나디아' 시리즈다. 1년 전 첫 번째 전시에서 나에게 흰 바탕에 붓으로 그린듯한 나디아 얼굴이 꽤나 낯설게 느껴졌던 작품이다. 서양 야수파의 거장 마티스가 설마 서예를 한다고? 그만큼 내가 알던 '색채의 마술사' 마티스와 너무 거리가 멀었기에 스쳐지나갔던 그림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20대 초반 안정적인 법률가의 삶을 버리고 선택한 가난한 예술가의 인생. 그에게 예술은 끊임없이 도전해서 자신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통로였다. 정물화부터 시작한 그의 작품은 석판화, 삽화, 일러스트, 에칭, 종이 오리기, (임종 직전까지 벽돌 한 장까지 세심하게 챙겼던) 로사리오 성당의 건설까지. 그를 둘러싼 세상 모든 것을 그는 작품을 위한 재료로 활용했다. 색채도 마찬가지다. 흑백의 석판화부터 다채로운 원색의 놀이터 컷아웃까지. 이렇게 예측이 불가능해 보였던 그의 예술 인생에서 내가 그나마 발견한 규칙이 있다.


바로 '단순함과 가벼움'이다. '나디아'를 그린 1948년. 당시 그는 여든 살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인생의 막바지에 다다른 당대의 예술가가 그려낸 여인의 얼굴은 뭔가 대단히 심오하고 복잡한 모습이 아니다. 단순함과 (군더더기를 싹 다 겉어낸) 가벼움 그 자체였다. 비슷한 시기 파란 종이 하나로만 표현한 '블루누드' 시리즈도 그 연장선에 있다. 수천번 그리고 또 그리고. 수천번 오리고 또 오리고. 암 수술 후 쇠로 만든 무거운 벨트를 늘 차고 있어야 했기에 침대에 반쯤 몸을 일으킨 채 그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힘든 작업을 계속했던 것일까.

그가 남긴 이 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영감(inspiration)이 오길 기다리지 말라.
영감은 열중(working)하고 있을 때 찾아온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고 조그만 액자 안에서 비스듬하게 어딘가를 응시하는 여인 나디아를 다시 마주하면 그녀만큼 마티스다운 작품은 또 없는 것 같다.


'그린다'는 의미에 대해 마티스는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가위로 '그림을 그린다

가위로 종이를 오리는 것과 (그림을) 그린다는 의미를 지금까지 구분해서 생각했던 나에게 이 말은 무척이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그린다'는 의미는 세상이라는 바탕에 누군가의 열정을 끊임없이 채색하는 일이 아닐까. 마티스가 평생 선과 색으로 치열하게 빈 공간을 채색했듯이...




돌아오는 차 안. 전시회의 여운이 강했는지 음악가 정재영이 녹음한 오디오 도슨트를 다시 틀어 놨다. 잔잔하게 흐르는 피아노 선율에 60여 년 전 누군가 그토록 갈망했던 마음의 평화, '봄날의 밝은 즐거움(가벼움)' 바로 이런건가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도 나도모르게 '톡톡' 운전대를 두드린다.


#앙리마티스 예술의전당 #라이프앤조이 #전시회  #예술 #야수파

 


매거진의 이전글 '또 다른 빛을 향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