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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그리고 브람스

비바 라 비다, 인생만세!

by 영지

(친구)"영지야, 어쩌니 내일 같이 못 가겠어"

(영지)"..."

(친구)"방금 고모부가 돌아가셨다고 연락을 받았어"

(영지)"아냐, 내일 잘 보내드리고 조심히 올라와"


프리다 칼로.

멕시코의 여류 화가. 나는 오늘 그녀를 두 번째 만나러 40분을 달려 미술관을 왔다. 어제 저녁 예전부터 그녀의 전시를 같이 가자고 했던 친구에게 연락해 미리 약속도 잡았다. 하지만 이내 그 친구로부터 걸려온 전화. 친척 어르신의 갑작스러운 부고소식에 내일 아침 일찍 고향을 내려가봐야 한다는 것이다. 원래 계획은 혼자라도 가는 것이었기에 미안해하는 친구에게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잠을 일찍 청했다.


삐릭삐릭.

휴대폰 알람소리에 눈을 반쯤 뜨고 시간을 확인했다. 05시 23분. 아차! 공휴일인걸 깜빡하고 평소 시간으로 알람을 그대로 켜둔 '재앙'이었다. 다시 잠을 청하기에는 정신이 너무 맑았다. 침대에서 얼마간 뒤척이는 사이 어느새 날이 밝아왔다. 비 예보가 오전까지 있었기에 베란다 유리를 통해 날씨부터 확인했다. 흐리긴 했지만 비가 내리진 않았다. 다행이다. 서둘러 외출준비를 시작했다. 지난번 첫 번째 만남에서는 새로 산 부츠를 신었다가 발이 꽤나 아팠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오늘은 두꺼운 스포츠 양말에 가장 편한 운동화를 신었다. 제대로 편한 몸과 마음가짐으로 그녀를 만날 준비를 한 것이다.


주말 아침.

경부고속도로는 이상하리만치 한산하다. 더군다나 서울 방향은 반대쪽보다 더 한가했다. 비 온 뒤여서 햇살은 더욱 빛을 발한다. 바람은 차갑지 않고 적당히 시원했다. 차량 스피커로 들려오는 '봄' 알고리즘의 경쾌한 노래들은 내 귀와 마음까지 자꾸만 들썩이게 한다. 오른손 검지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 두드리며 그녀를 만나기 직전의 예의 그 설렘을 나는 맘껏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도착한 미술관.


미술관 앞 야외 주차장.

오늘따라 널찍한 주차장이 텅텅 비었다. 요즘처럼 어딜 가든 사람 서 있을 자리는 물론 자동차 세울 자리는 더 찾기 힘든 시절에 주차 자리를 고를 수 있다는 것은 꽤나 행복한 고민이다. 아무튼. '문콕' 걱정 없이 운전석 문을 힘차게 열어젖히고 가방을 둘러멘 후 미술관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두 뺨으로 겨울의 냉정함과 봄의 따스함이 뒤섞인 애매모호한 공기 느낌을 기분 좋게 얻어맞으며. 칼로의 초상화가 벽면 한쪽을 얌전하게 채우고 있는 미술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안내원)"아이고, 오늘 휴관입니다."

(영지)"아!"

(안내원)"매주 월요일은 휴관입니다."

(영지)"그렇군요. 몰랐어요"


브람스.

동행하기로 한 친구 고모부의 부고소식에 이어 미술관의 정기휴관일이 오늘이라는 안내까지. 휴관일에도 깔끔하게 다려진 양복을 입고 데스크에 앉아 나를 곤혹스럽게 바라보는 직원의 얼굴을 마주한 그 순간. 나의 뇌는 잠시 작동을 멈췄다. 몇 초나 흘렀을까. 다음 일정까지 약 2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바로 집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더 머물 것인가. 그러다가 들어오는 길에 건물 1층에 위치한 카페가 문을 열었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브람스(Brahms)'. 카페 이름이다. 내가 아는 음악가 그 브람스가 맞겠지? 아침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어서 아직 첫 손님을 맞이하기 전인 듯했다.


'선택'이라는 사치.

나는 주차장에 이어 또 한 번 내가 앉을자리를 '선택'하는 호사를 누렸다. 햇살이 잘 드는 창가의 널찍한 4인용 자리에 노트북과 가방을 던져두고 나는 키오스크 앞에서 또 한참을 고민에 빠졌다. 이런 행복한 고민은 또 얼마만인가. 최근 두 달 동안 운동과 함께 식단을 건강하게 관리해 볼 작정으로 물 외에 음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블랙커피만 주구장창 먹었다. 그러다가 이번 주 목요일부터 정상식단으로 돌아왔고, 지금 라떼와 카푸치노, 이 둘 중 뭘 먹을지 고민하는 즐거움. 그렇다. 브람스 안에서 내가 앉을 공간과 먹을 것을 '선택'하는 사치스러움에 나의 마음은 어느새 풀리고 있었다.


악마가 아닌, 행복은 디테일에...

첫 관람 후 고대해 왔던 프리다 칼로와의 두 번째 만남을 하지 못한 아쉬움을 브람스에서 마시는 라떼 한잔으로 달래는 이 기분. 어제 저녁과 오늘 아침처럼. 예기치 않은 사고들은 언제나 평온한 일상 아래에서 꿈틀거리고 있다가 내 마음을 마구 흔들어 놓는다. 아마 예전 같았으면 '에잇, 낭패다!'싶어서 실망감 가득 안고 바로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지 않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누가 그랬던가. 그럼 나는 '소소한 행복도 디테일에 있거든!'하고 말해줄 것이다.


비바 라 비다, 인생만세!

프리다 칼로가 세상을 떠나기 전. 병상에 누워 그림을 그리는 작업조차도 힘겨운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느 날 탁자 위에 놓인 잘 익은 수박들을 마주하며 '인생이 주는 멋진 환희'를 마음속에 떠올렸듯이. 평범하고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카페? 아니 일상 안에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작은 행복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냥 그렇게 믿고 있다. 비록 문이 꼭꼭 걸어 잠긴 이 건물 2층 전시실에 그녀의 아름다운 작품들이 걸려있어도 나는 보지 못하지만. 1층 카페에 앉아서 눈을 감고 지난번 보았던 그녀의 작품들을 마음속에 희미하게나마 떠올려 보았다. 오히려 눈으로 보는 것보다 마음을 통해 보는 것이 더 선명하지 않을까.


이제 3월 16일이면.

한국을 떠나 모국인 멕시코로 다시 돌아가는 프리다 칼로의 작품들. 비록 오늘 미술관 외벽의 커다란 포스터로 그녀를 배웅하지만, 이미 나는 몇 번 만나본 듯 그녀의 진한 두 눈썹과 굳게 다문 입술이 풍기는 강인함이 꽤나 익숙하다. 다시 만날 날이 또 오겠지. 내가 그녀를 기억하는 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일상은 흐르겠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렇게.

"비바 라 비다, 인생이여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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