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여미지식물원에서 잊혀진 기억을 다시 쓰다!
와본 적은 있지만 기억에 남지 않았던 제주 여미지식물원. 이름과 다른 풍경 속에서, 나는 그날 여행자가 아니라 기억을 설계하고 감각을 회복하는 ‘정원의 일부’가 되었다. 이벤트와 감정, 그리고 나다움으로 남기는 여행의 기록.
중문해변이 보이는 첫 숙소에 짐을 맡기고, 우리는 여느 평범한 여행자가 되어 근처 유명한 돈가스 맛집으로 달려갔다.
온라인 예약 후 확인한 대기 인원은 무려 201팀. 놀라웠다!
평일 오전 11시였는데 이미 수백 팀이 거쳐간 공간이라니.
제주는 여전히 다른 세계였다.
계획 없는 무모한 여행은 늘 예상치 못한 전환을 만든다.
돈가스를 포기하고 향한 곳은, 섬에서 가장 오래된 식물원—여미지식물원이었다.
기억보다 현실이 앞선 여행, 그렇게 시작됐다.
여미지식물원.
10년도 훌쩍 전, 분명 다녀온 곳인데 기억은 남아있지 않았다.
사진도, 감정도, 장면도 흐릿했다.
그때는 일정에 쫓겨 감정을 담지 못했던 여행들 속 하나였겠지.
하지만 이번엔 달라야 했다.
아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제주를 다시 찾은 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한낮,
식물원 앞 주차장은 성수기임에도 텅 비어 있었다.
강렬한 햇살, 회색빛 아스팔트, 조용한 입구.
“여기서 나는 완전히 나가떨어지든지,
아니면 특별한 기억을 얻어가든지 둘 중 하나겠지.”
그 순간, 식물원의 구조와 햇살은 이미 나를 살짝 압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고요한 뜨거움 속으로 한 걸음씩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입구에 다다른 순간,
“이곳이 처음 같아.”
10년 전 와본 적 있다는 사실은 단서일 뿐,
공간은 너무도 낯설게 나를 맞았다.
최근 일본의 정원 문화를 테마로 다녀온 출장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머릿속을 스치던 생각들은 식물원 입구의 물과 식물의 단순하지만 조화로운 풍경 앞에서 조용히 멈췄다.
그제야 감각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식물원 안에는 이름표를 단 작은 정원들이 있었다.
그런데, ‘꽃의 정원’에는 꽃이 없었고
‘열대의 정원’보다 밖이 더 열대 같았다.
‘물의 정원’엔 물보다 식물이 더 많았다.
“이름 붙여진 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인생도 있고,
그 이름을 가꾸는 사람에 따라 모습이 완전히 달라지는 공간도 있다.”
정원사에 따라 정원의 운명이 달라지듯
사람도,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는 거겠지.
정원마다 이어지는 산책로를
물처럼, 리듬처럼 흘러가듯 걸었다.
유리 온실 안의 열기 속에서 우리가 거의 유일한 관람객이었다.
사람이 빠진 틈 사이의 고즈넉함은
거대한 식물원 전체를 나만이 독점하는 호사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정원을 걷는 ‘사람’이 아니라,
정원 그 자체의 일부가 되어있었다.
“기억에 남는 여행을 만들기 위해선
예기치 않은 사건 + 긍정적 감정이라는 두 가지가 꼭 필요하다.”
그 공식에 따라
나는 웃고, 반응하고, 사진을 찍고,
동행한 친구와 함께 이 여행의 사진들로
종이 사진첩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이벤트를 기획하고
기억을 남기고
삶의 여정은 결국
이런 작은 실천들로 채워지는 길이란 걸 새삼 느꼈다.
여미지식물원의 수백 장의 유리로 짜인 천장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은
10년 전 어학연수를 위해 잠시 머물렀던
뉴질랜드의 오클랜드 공항에서의
마지막 햇살을 떠올리게 했다.
그날 내가 기억한 적도의 빛처럼,
등골을 타고 흐르던 땀처럼,
살아 있다는 감각이 더 또렷해졌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기억에 남는 여행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정원이 이름만으로 기억되지 않듯,
우리 삶도 정해진 이름으로는 살아지지 않는다.”
“결국 그 순간 내가 어떻게 머무르고,
무엇을 느끼며, 어떤 감정으로 살아냈는지가
잊혀지지 않는 기억을 만든다.”
식물원 투어 후 찾아온 때늦은 배고픔.
그 순간 나는
그 감각조차 반가웠다.
“아, 내가 살아있구나.”
여미지에서의 시간은
기억을 남기는 여행이란 결국
이벤트와 감정, 그리고 내 의지로 만들어지는 서사라는 걸 알려주었다.
“나는 이제, 어떤 이름 아래 있든 그 안에서 나답게 존재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언젠가 어떤 장소를 사고처럼 또다시 찾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 그 공간이 낯설지 않으려면,
나는 지금 이곳을 살아내야 한다. 진심으로!
어쩌면,
정원도 사람도 관계도
처음 붙은 이름 그대로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머문 방식,
함께한 시간의 결,
서로를 향한 태도에 따라
그 이름은 조용히,
그러나 무한히 확장된다.
이 여행도, 이 기록도,
내가 나답게 존재함으로써
잊힌 기억의 자리에
새로운 이름을 다시 써 내려가는 일이었다.
그리고 결국,
진심을 다한 그 순간만이
기억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