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지 May 11. 2019

내가 공직에서 만난 멋진 사람들 1

이제는 내 인생의 멘토가 된 공익요원들과의 인연

공직에 들어와서 좋은 게 하나 있다면 바로 순환 보직이다. 2~3년마다 다른 부서로 옮겨서 일하게 되는 근무의 장점은 다양한 부서에서 그만큼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이다.(물론 단점도 많은 근무 형태지만 여기선 내가 느낀 장점 위주로 언급한 것이다)


내가 그동안 공직에서 만난 꽤 괜찮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좀 길다. 우선, 공익근무요원(지금은 '사회복무요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바로 공직에서 만난 멋진 공익 친구들과의 인연을 얘기하려 한다. 지금은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제 몫을 해내며 사회인으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년 전 국제행사를 치르면서  기간을 함께했던 '엄친아와 까칠한 공익'. 이  나의 이야기다.




내 인생 유일한 '엄친아' 공익


한때 나는 국제업무를 3~4년간 담당한 적이 있다. 유엔자문기구인 국제민간단체와 우리 시가 함께 추진한 대규모 국제행사 추진부서에서 '국제협력 업무'를 담당했다. 초기 협약서 작성부터 각종 업무 매뉴얼, 정산서 등 모든 자료는 기본  가지 언어로 만들어졌다. 영어가 기본이었고 이를 다시 한국어로 번역해서 내부적으로 정리, 보고하는 일이 일상이었다. 전문 번역사에 맡기기에도 벅찬 분량이었고 긴급하게 작업이 필요한 경우도 다반사였다. 당시 나의 일상은 이 자료들과의 전쟁 아닌 전쟁이었다.


그런 나에게 어느 날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국제협력을 전공한 영어 잘하는 공익요원이 우리 부서로 온다는 소식이었다. 당시 프로젝트 부서였던 우리는 행사 구역 안으로 사무실을 별도로 꾸려 이전하는 준비가 한창이었고, 일손이 많이 부족한 바로 그때 이 공익요원 온 것이다.


신참 공익의 첫인상은 어땠을까? 먼저 키가 190cm가 넘었고 반듯하게 잘생긴 얼굴이어서 모두 깜짝 놀랐다. 그냥 모델이라고 보면 된다. 직원들 모두 저렇게 '잘생긴 공익'은 처음 봤다고 입을 모을 정도로 '자체발광' 친구였다. 더 놀라운 건 성격과 태도였다. 착하고 예의 바르기까지 거다. 믿기지 않겠지만 진짜 실존하는 캐릭터다. 당시 부서장님은 이 친구를 보고 나이는 20대 초반인데 행동은 50대처럼 한다고 농담까지 하실 정도였다. 그는 직원 누가 시키든 무조건 웃으며 '예스'로 답한다. 그리고 사소한 일에도 불평없이 끝까지 완수하려자세가 몸에 배어 있다. 내게는 그냥 세상 둘도 없는 '엄친아'였다. 그랬다. '이런 캐릭터가 실존하다니'


이 친구의 깍듯한 예의바름과 누구에게나 겸손함을 유지하는 모습은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직 대학 재학 중인 어린 친구가 어떻게 저럴 수 있지? 거기토익과 토플 둘 다 만점을 받을 정도로 굉장히 똑똑한 친구였다. 어느 날 출장 가는 길에 나는 그 친구에게 대놓고 물어봤다. 너무 착한 거 아니냐고. 힘들 때도 있고 짜증 날 때도 있을 텐데 어떻게 직원들에게 항상 웃으면서 그렇게 할 수 냐고. 매사가 너무 긍정이면 본인이 너무 힘들지 않겠냐는 나름 걱정의 표현이었다.


답이 놀라웠다. 그 친구 아주 어릴 적 미국에서 홀로 조기유학 생활을 한 적이 있단다. 그때 현지에서 적응이 어려워 방황하던 시절에 유학생 친구들과 세상 나쁜 짓? 은 다해봤단다. 한국에 우여곡절 끝에 다시 돌아왔을 땐 그래서 소위 일탈행동 대한 미련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엄한 아버지 밑에서 나름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고. 일정 금액 이상 용돈에 대해서는 사용계획서를 작성해서 실제로 아버지 결재(서명)를 득해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친구와 함께 한 1~2년의 기간 동안 나는 각종 서류작업부터 사무실 형광등 교체, 심지어 직원들과의 인간관계 문제까지 많은 부분을 의지했고 또 조언도 구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그 '엄친아'는 작년 봄 공익시절부터 사귀던 여자 친구와 결혼을 했다. 양재의 어느 성당, 아름다운 신부 앞에서 성스러운 결혼서약을 하는 친구를 보면서 20대 초반 공직에서 낯선 공무원들과 투닥거리면서도 항상 밝게 지내던  모습파노라마처럼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식장에서  친구의 트레이드 마크인 활짝 웃음을 지으며 "주사님 오셨어요?" 하는 목소리가 지금도 리는  하다.


세상 까칠한 공익, 근데 놀랍게 일을 잘한다?


그리고 또 한 명. '세상 까칠한 공익'은 우리 부서 '엄친아' 공익의 깍듯함에 어느 정도 적응해서 편한 생활을 하고 있을 즈음 급작스럽게 배치되어 왔다. 에티오피아에서 2년간 KOICA 국제개발협력 사업을 추진하다 귀국했고, 한 달 남짓 남은 군 복무를 마치기 위해 국제행사에 준비에 정신없었던 우리 부서로 덜컥 배치되어 온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미안한 것이 원래 군 복무 말년이면 조금은 편한 생활을 기대하게 마련이다. 근데 운 없게도 그 친구는 마지막 한 달을 내가 있는 프로젝트 부서에, 그것도 한 달 동안 진행되는 국제행사를 다 끝내고 제대하게 생긴 거다. 나는 뭐 아무 생각 없었던 담당 직원이었다. 영어와 일본어 모두 유창하다기에 행사기간 기자단 미디어 지원과 VIP 의전 지원을 각각 맡겼다. 이 친구가 가진 업무 역량에 대해 전혀 사전 지식이 없었던 나는 초반 불안한 마음에 어설픈 '마이크로 매니지먼트'를 했다. 꼼꼼히 챙긴다는 핑계로 사사건건 간섭?을 일삼는 피곤스런 공무원을 상상하면 된다. 오히려 그 친구 입장에서 그러는 내가  불안? 해 보이지 않았을. 지금 그때를 회상해보니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이 친구가 행사의 VIP 중 한 명이었던 교토 시장님을 의전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게 되었다. 그때 내가 이 친구를 너무 과소평가했음을 깨달았다. 일본에서 학사부터 석사까지 국비장학생으로 공부했 시장님과 짧은 대화만으로 그분 마음을 바로 사로잡았던 것이다. 이후 나는 그냥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었고 그 친구는 여기저기 본인의 인맥까지 동원해 가며 일반 직원에게도 벅찼을 업무를 훌륭하게 해냈다.


당시 그는 20대 후반의 나이였다. 예의 바른 '엄친아' 공익과 함께 근무하면서 이 친구는 상대적으로 '세상 까칠한(지금도 그 까칠함은 어딜 안 갔다) 공익'이었지만 일을 하면서 보여준 탁월한 역량을 보며 나는 또 한 번 대단한 능력자를 우리 부서로 보내 준 공익담당부서에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당시 세상 뭣 모르던 내가 나이 어린 친구들에게 정말 배울 것이 많음을 처음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인정'하게 시기이기도 .


까칠했던 공익이 지금은 어엿한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국내 굴지의 대기업 본사에서 해외건설업무의 핵심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이달 말 이 친구가 강사로 나서는 특강이 내가 졸업한 대학원에서 열리게 된다. MBA 스터디 모임주관하는 '현장리더특강' 첫 리더로 나는 그를 초청했고 쿨한 성격답게 흔쾌히 응주었다.




'예의 바른 엄친아''세상 까칠한' 공익 은 같은 기간 나와 같은 부서에서 국제행사를 함께 치렀고, 이후 종종 셋이 모이면 당시 었던 에피소드로 대화끊이질 않는다. 이 친구들과의 인연은 그들이 공직을 떠난  지금까지도 수년째 이어지고 있다.


사실 나의 MBA 입학은 유학파 '까칠한 공익님'의 뼈 때리는 조언이 없었다면 실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세상 '까칠한' 공익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상당히 좋은 의미다. 이 친구의 장점은 듣기 좋은 얘기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이다. 있는 그대로 핵심만 딱 얘기한다. 직설적인 화법과 정곡을 찌르는 내용이 듣는 사람에겐 가끔은 상처?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도 얘기하지 않는 걸 이 친구는 거침없이 말하고 또 그걸 추진할 수 있는 나름의 저력을 가진 친구다. 조직에서도 그런 점이 윗 사람들의 눈에 들어 지금 국내 최고의 기업에서도 승승장구 하고 있다.


공직자인 나에게 나이가 한참 어린 '공익근무요원'에 대한 마음가짐과 태도를 180도 바꾸게 만든 두 친구는 지금 나의 소중한 인생 멘토가 되었다. 그냥 고맙다. 나의 공직 인생에 우연히 와 준 이 공익요원들이. 


공직에서 여러 부서 근무를 하다 보면 다양한 면모를 지닌 공익요원들과도 같이 일하게 된다. 결국 내가 여기에서 배운 것은 두 가지다.

첫째, 나이로 사람을 절대 판단하지 말 것. 우연인지는 몰라도 둘 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홀로 해외에서 공부를 했다. 어릴 때 낯선 곳에서의 경험과 어려움은 누구도 가질 수 없는 깨달음과 역량을 가져다줄 수 있다.

둘째, 나보다 어린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하는데 주저하지 말 것. 내가 갖지 못한 경험과 지식을 단지 어리다는 이유로 묻는 걸 주저한다면 세상 그 누구에게도 배울 수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공무원 멘토링 모임' 어쩌다보니 시작하게 되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