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페어링, 쓸쓸한 음악과 쓰디쓴 거친 위스키
Elliott Smith – Miss Misery
첫인상(향): 부드러운 어쿠스틱 기타와 속삭이는 보컬
색채(맛): 한없이 우울하면서도 노래 속 숨겨 있는 연약함과 순수함
피니쉬(여운): 청취 후 말없이 허공을 응시하게 만드는 쓸쓸한 여운
Johnnie Walker Red
첫인상(향): 거친 그레인, 아주 살짝 레몬, 요오드를 위시로 한 피트향
색채(맛): 적날한 단맛, 럼 같은 거칠고 스파이시한 맛(심한 알코올 맛), 아주 약간의 과실맛
피니쉬(여운): 피트의 스모키한 느낌과 몰트의 향이 러프하게 어느 정도 지속되며 마무리
I’ll fake it through the day with some help from Johnnie Walker Red
(조니 워커 레드의 도움으로 난 오늘 하루도 견뎌내겠지)
Send the posion rain down the drain to put bad thoughts in my head
(내 머릿속 나쁜 생각들을 묻기 위해 산성비 같은 이 독주를 속으로 넘기지)
Two tickets torn in half and a lot of nothing to do
(차표 두 장은 반으로 찢어진 채로 놓여 있고 내겐 아무것도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아)
Do you miss me? Miss Misery, like you say you do?
(아직 날 그리워하니? 미스 미저리, 날 그리워한다고 했었잖아)
미국 인디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엘리엇 스미스(1969-2003)의 대표곡인 ‘Miss Misery(1997)’는 이렇게 시작된다. 왈츠 박자로 연주되는 기타 연주를 타고 흐르는 그의 여린 목소리는 내면의 상실감과 고통과 조곤조곤 읊어나간다. 곡의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무겁고 우울함에도 듣기에 버거운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엘리엇 스미스 특유의 선율에서 기인한다. 엘리엇 스미스는 포크 음악에서는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는 다양한 확장 화음을 사용한다. 그가 기민하고 아름답게 쌓아 올린 화음들은 청자로 하여금 노래의 진행을 예상치 못하게 하고, 노래의 감정적 요소들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이처럼 음악적 요소를 통해 아름답게 승화된 한 개인의 내면의 슬픔과 갈등은 우리 마음 한편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는 어두움을 포근하게 품어준다.
노래의 첫 소절과 함께 언급되는 조니 워커 레드는 실제로 엘리엇 스미스가 즐겨마시던 술이었다. 미국의 유명 스케이트 보더 제프 그로소(1968-2020)는 엘리엇 스미스를 목격한 일화를 통해 이를 증언했다.
나는 엘리엇 스미스의 빅 팬이었습니다. 언젠가 그가 LA의 작은 클럽에서 공연을 한다 하여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공연 시작보다 이르게 도착하여 근처의 바에 들렀는데 엘리엇 스미스가 하필이면 그곳에 있었습니다. 이미 엄청나게 맛탱이-술과 마약으로 인해-가 가 있더라고요. 그는 홀로 바에서 조니 워커 레드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나는 생각했죠. '세상에나, 엘리엇 스미스가 정말 노래처럼 조니 워커 레드를 마시고 있잖아.'
조니 워커 레드는 블렌디드 스카치 위스키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와 위상을 자랑하는 조니 워커의 엔트리 라인 위스키이다. 1리터짜리를 유럽에서는 약 22유로, 미국에서는 약 25달러 그러니까 우리나라 3만 원이 안 되는 금액에 구입할 수 있는 가장 저렴한 블렌디드 위스키 중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위스키 하면 떠올리는 다양한 향이 넘치면서 다채로운 풍미를 이 술에서 기대하기엔 어렵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맛없는 싸구려 위스키로 악명이 높으며 클럽 같은 곳에서 콜라에 섞어 마시거나 저렴한 하이볼의 베이스로 쓰이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하지만 이는 이 술의 포지션을 고려하지 않은 가혹한 평가이다. 우리가 소주를 단순히 맛에 준거를 두고 판단하지 않는 것처럼 조니 워커 레드도 비슷한 위치에 있다. 실제로 전 세계 스피리츠(증류주) 판매량에서 늘 1위를 놓치지 않는 소주와 함께 조니 워커 레드 라벨 역시 늘 10위권 안에서 사이좋게 자리 잡고 있다. 당연하겠지만, 기타 하나를 손에 쥔 쓸쓸한 음유시인에게 비싸고 고급진 술이 매칭되지 않는다. 그와 그의 음악에 어울리는 건 알코올 냄새가 펄펄 풍기는 그런 거칠고 쓴 술일 테다. 게다가 벌컥벌컥 마실 수 있는 가격이야 할 테고. 이러한 맥락에서 엘리엇 스미스 음악과 조니 워커 레드는 멋진 페어링을 자랑한다.
글의 머리에 조니 워커 레드의 테이스트 노트를 나름 적어보긴 했지만 확실히 니트로 즐기기엔 그다지 유쾌한 술이라고 볼 수는 없다. 잔에 따르자마자 쏟아지는 강한 알코올향과 거친 술맛 때문에 다른 맛을 잘 느낄 수 없다. 그러나 엘리엇 스미스를 틀어 놓고 조니 워커 레드를 테이스트하면 신기하게도 이 맛이 즐길만하게 느껴진다. '그래 술은 쓰고, 위스키는 독해야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그의 음악이 우울하지만 그 안에서 여리고 아름다운 감수성이 느껴지는 것처럼 독하게만 느껴지는 술에서 나름의 발란스가 드러난다. 복잡하지는 않아도 거친 목 넘김 뒤에는 피트와 스파이스가 자리를 잡고 있다. 술의 칼칼함이 그다지 역하게 느껴지지 않는 까닭이다. 'Miss Misery'의 1분 50초 구간. 엘리엇 스미스의 애처로운 감정이 절정에 들어서면 이 구간에 오면 나도 모르게 남은 술을 모두 입 안에 털어 넣게 된다. '크...'라는 마치 연거푸 술을 넘기는 아저씨가 낼 법한 소리를 내면서. 노래가 수미상관의 구조로 처음과 같이 끝나며 여운을 남긴다. 얼큰하게 올라온 취기와 엘리엇 스미스의 노래가 남긴 쓸쓸함이 어우러지며 내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어떠한 문화가 그러하듯 먹고 마시는 식음료도 우리가 부여하는 감정적 의미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이렇게 감정과 결합된 식음료는 이 고유의 맛과 영양을 떠나 우리 일상에 다채로운 색채를 부여하는 확장된 기능을 수행한다. 내게 익숙하지 않은 손맛이 나는 애인의 요리가 맛있고,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과 기울인 소주가 유난히 달게 넘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퇴근길의 발걸음이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날이거나, 익숙해 질대로 익숙해진 혼자의 일상이 갑자기 외롭게 느껴지는 날처럼 느닷없는 우울감이 찾아올 때 엘리엇 스미스의 음악과 조니 워커 레드를 곁들여 보기를 추천한다. 당신의 마음에 잔잔한 위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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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 Misery(1997)’는 제70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과 각본상 수상에 빛나는 영화 ‘굿 윌 헌팅(1997)’의 주제곡으로도 유명하다. 지금은 영화계 거장이지만 당시엔 좋은 연출가 유망주였던 거스 반 산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각본은 놀랍게도 본 작품에 주조연으로 참여한 맷 데이먼과 벤 에플렉이 직접 작성했다. 술과 함께 이 음악을 들을 때 오피셜 뮤직비디오를 틀어 놓는 것도 좋은 감상법이다. 20대 무렵의 벤 에플렉과 맷 데이먼의 풋풋한 모습을 함께 즐길 수 있다. 그리고 'Miss Misery' 역시 같은 시상식에서 주제가 부문의 후보 중 하나로 선정되었으나 아쉽게도 수상의 영예는 누리지 못하였다. 왜냐면 98년은 영화 ‘타이타닉(1997)’과 셀린 디온의 ‘My Heart Will Go On(1997)’의 해였기 때문이다. 수상은 하지 못하였지만,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엘리엇 스미스는 이 노래를 통해 당해 오스카 축하 무대에 오를 수 있었고, 소박한 정장 차림을 한 채로 홀로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하던 그의 모습이 미전역에 생중계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