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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종찬 Feb 06. 2019

사토시 나카모토의 의도

The real intention of Satoshi Nakamoto

비전 (Vision)

모든 위대한 발명 또는 기업의 탄생에는 누군가가 설정한 비전이 있다. 그 비전은 발명가 또는 기업인이 보는 세상을 변화시킬 가능성이고, 그들은 가능성을 현실화하기 위해 행동한다. 하지만 혁신의 가능성을 제시한 자의 주변인은 기술이나 기업의 비전에 단면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전체 가능성을 결코 보지 못한다.


인터넷이 세상에 끼칠 영향이 팩스기계만큼도 못할 것이라고 말했던 폴 크루그만 (Paul Krugman)이나 야후가 페이스북에게 1조 원 인수를 제안했을 때 그 딜을 원했던 투자자들과 같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유도 전체 청사진을 보지 못하고, 특정 시기의 단면만 볼 수 있었기 때문일 거다. 


장님들이 코끼리 만지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동안 사토시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토시가 너무 일찍 사라졌기 때문에 그를 대변해 자리 잡힌 업계의 소리는 매우 이념적이었다. 탈중앙화와 분산화를 통해 사회악인 은행과 금융기관을 타파하고, 금융의 자유와 자주권을 쟁치하며, 어떠한 정부나 제3기관도 중단할 수 없는 검열 저항적 시스템을 만들자는 소리말이다. 나 역시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기술을 임했고 산업의 방향성을 예단했다.


사토시는 결코 비트코인을 이념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그는 비트코인이 현실 속의 글로벌 화폐가 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설계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해 망쳐버렸을 뿐이다.



채굴과 확장성 (Mining and Scalability)

지난 글인 비트코인과 비트코인 캐시에서도 적었지만, 사토시 나카모토는 비트코인이 충분히 비자/마스터 카드를 넘어서는 글로벌 화폐시스템이 될 수 있도록 설계했다. 그는 개인들이 직접 서버 역할을 하지 않고, 기업들이 직접 채굴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비트코인 소프트웨어가 나오기도 전 채굴기의 성능이 고도화되고, Bitmain이나 Bitfury 같은 대형 기업들이 생겨날걸 미리 알았던 것이다. 


지금처럼 사용자들이 네트워크 노드 역할을 하는 건 확장된 환경에 적합하지 않다. 그건 마치 사람들이 NNTP서버를 직접 운영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비트코인)의 본 설계는 사용자는 사용자로 남고, 대형 서버 농장들이 노드 역할을 하는 것이다. - 사토시 나카모토, 2010년 7월 22일 


이렇게 설계자가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비트코인이 블록 사이즈 제한을 없애서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탈중앙화'라는 개념 때문이다. 탈중앙화의 철학을 중요시하다 보니 기업들이 사용자 대신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방향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사용자가 직접 트랜잭션을 검증해야 안전하고 진정한 자주권을 얻는다는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탈중앙화는 결코 목적이 될 수없다. 탈중앙화는 수단으로써 어떠한 목적을 얻기 위해 사용되는 것일 뿐 탈중앙화 자체가 결과로써 가져다줄 수 있는 사회적 가치는 없다. 아무리 가치철학을 떠들어봤자 모든 것은 경제이고, 그 경제는 현실을 반영한다. 개인이 주권을 가져야 된다고 떠들어봤자 사람들은 SMTP (이메일 프로토콜) 서버와 같은 통신서버를 직접 운영하지 않는다. KT나 SKT 같은 ISP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 기업들이 우리가 인터넷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인프라를 깔고, 구글 같은 기업을 통해 이메일을 주고받고, 카카오나 위챗으로 소통한다. 이는 모두 탈중앙화 된 TCP/IP라는 프로토콜을 '수단'으로써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토시는 채굴산업을 ISP와 유사하다고 봤다. 인터넷도 초기엔 텍스트 이외 영상이나 고용량의 정보를 전달할 수 없었지만, 인터넷의 경제적 가치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ISP 기업들이 인프라에 투자하고 4G, LTE까지 발전했기 때문에 4K 영상을 스트리밍 하는 현재까지 확장될 수 있었다. 사토시는 비트코인에 가치가 생겨 발전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하면 당연히 이윤을 쫓는 기업들이 자유경쟁을 통해 산업을 이끌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십만 명의 개인들이 직접 검증하는 느리고 비싼 이념 기반의 시스템보다, 인터넷의 발전처럼 수십 개의 기업들이 글로벌 경쟁을 통해 발전하고 확장시키는 시스템이 오히려 현실에선 더 탈중앙화 되기 때문이다. 



전자서명 (Digital Signature)

사토시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해 비트코인을 망쳐버린 변화 중 하나는 바로 세그윗(Segregated Witness)이다. 세그윗은 블록 사이즈를 증가시키지 않고도 확장할 수 있다는 명분으로 도입된 기술로서, 트랜잭션의 정보 중 거래자의 전자서명 데이터를 빼버리는 방식이다. 트랜잭션의 사이즈가 줄어들게 되니 한 블록에 담을 수 있는 트랜잭션이 많아져 확장성이 증가한다는 논리다. 


세그윗 (Segwit)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사토시는 비트코인이 현실 속의 화폐가 되도록 설계했고, 사토시가 고려한 현실은 단순히 구동 가능한 기술이 아닌 법과 규제, 정부와 민간, 기업이 공존하는 세상이다. 즉 디지털 화폐를 설계할 때 단순히 기술적 접근을 넘어서 법의 현실을 고려해야 했고 비트코인의 전자서명 데이터는 현실을 반영하는데 아주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대부분의 개발 국가들이 전자서명을 법적 효력이 있는 서명방식으로 인정하고 있는 현실에서 비트코인이든 신용카드든 전자서명은 꼭 필요하다. 잘못되거나 불법적인 거래가 일어날 경우, 분쟁 해소 또는 법적 처벌의 근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자서명의 데이터가 없는 경우, 국가 입장에선 기존 시스템에 새로운 개념을 끼워 넣거나 기존 시스템을 바꿔야 하는 상황을 직면하기 때문에 사토시는 전자서명 정보를 모든 트랜잭션에 끼워 넣도록 디자인했다.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기술적으로 쓸데없는 정보를 왜 추가했겠는가?


당연히 비트코인의 코어 개발자들은 대부분 사이퍼펑크 (Cypherpunk) 출신에 아나키스트적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많았고, 이러한 법제적 상황을 고려한 디자인 선택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자서명 정보는 저장공간만 차지하고 확장성을 가로막는 불필요한 데이터로만 인지 했을 것이다.  



가명성과 익명성 (Pseudonymous and anonymous)

아나키스트 성향을 가진 개발자들은 모든 거래내역과 잔고, 지갑 주소가 공개된 투명한 비트코인에 완전한 익명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100% 익명의 시스템이야말로 진정한 금융의 자유를 주고 대체 가능성 문제(Fungibility)를 해결한다고 주장했고, 이러한 논리를 기반으로 대시(Dash), 모네로(Monero), 제트캐시 (zCash) 등의 코인들이 탄생했다. 


사토시는 당시 믹싱 기술 (Mixing technique)이나, 링시그니쳐 (Ring Signature), 영지식증명 (Zero-knowledge proof)과 같은 기술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비트코인에 익명성을 추가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다. 사토시가 2010년 포럼에 남긴 글을 보면, 그가 의도적으로 비트코인에 익명기술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비트코인에) "익명성 (anonymous)"을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 개발자들은 (비트코인이) 정부의 손에 닿지 않는 에너지 기반(=채굴)의 안전한 화폐가 될 거라고 기대하지만, 나는 결코 그러한 주장을 하지 않는다.  사토시 나카모토, 2010년 7월 5일


그는 '정부의 손에 닿지 않는' 화폐가 아닌, 충분히 제도화될 수 있는 화폐를 목표로 삼았다. 비트코인이 제도화되려면 첫째로 중립성 (neutral)을 지켜야 하고, 둘째로 증명 가능 (provable) 해야 한다. 


중립성이란 국가마다 불법과 합법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비트코인이 범국가적으로 받아들여지려면 (또는 금과 같은 상품화폐의 역할을 하거나, 종이 지폐와 같은 역할을 하려면) 법의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다. 즉 비트코인 사용에 있어서 불법의 영역에서 사용될 수도, 합법에 영역에서 사용될 수도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중립성은 익명성이 아닌 가명성 (pseudonymous)을 지닌 네트워크에서만 구현이 가능한데, 그 이유는 바로 '증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전자서명과 동일한 맥락으로, A가 B에게 어떠한 트랜잭션을 보냈다는 사실이 증명 가능해야 법제도 안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중립성에 의해 누군가가 비트코인을 불법적인 일에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보장되지만, 불법적인 일을 저질렀을 때 또한 처벌할 수 있는 증명의 여지도 남겨두어야 한다는 의미다. 즉 철저한 익명성이 보장된 시스템은 결코 제도화될 수 없다.

 






세상은 현실의 연속이다. 현실 속에는 법이 존재하고 아무리 기술철학을 외쳐봤자 결국 시장경제가 기술의 결론을 낸다.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비트코인에 대한 이해를 모두 지우고 다시 공부하면서 얻은 사실은, 사토시 나카모토는 지금 활약하는 블록체인 개발자들과는 비교될 수도 없는 선견지명을 가졌고, 단순히 암호기술을 넘어서 경제, 법제도, 결제시스템, 비즈니스, 게임이론을 조합하여 '현실적인'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저 기술의 단면만 본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을 뿐.


사토시는 분명 익명성과 탈중앙성에 더 집중하여 냅스터와 같은 파괴적 기술을 만들어낼 역량이 있었다. 하지만 그 대신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 적용 가능한 현실적인 솔루션을 제공했다. 바로 그 길이 비트코인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거다. 이에 비해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법이 기술을 따라가지 못한다며 정치권과 규제당국의 보수성을 무조건 비판만 하는 기업가와 학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기류에 합승하려는 법조계를 보면 그저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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