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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더 '쿨'해지는 이유

일본의 강력한 소프트파워

by 제프

저는 전 세계적으로 ‘국뽕’ 하면 빠지지 않는 한국인이지만, 요즘은 일본의 위상이 전 세계적으로 다시금 높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사실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본은 고령화, 저출산, 장기 불황 등의 문제로 인해 ‘잃어버린 20년’이라는 말까지 들으며 미래에 대해 꽤나 비관적인 평가를 받던 나라였죠. 물론 최근에 도요타, 소니, 닌텐도 같은 일본의 글로벌 기업들이 묵묵히 성과를 내왔고, 경제 정책도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며 경제가 안정적으로 성장해 온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가 느끼기에 요즘 일본의 재부상에는, 그보다 더 근본적이고 인상적인 힘이 있습니다. 바로 ‘소프트 파워’입니다.


경제력과 군사력 등 상대방에게 어떤 행동을 강압적으로 시키는 힘을 일컫는 '하드 파워'에 비해 '소프트 파워'는 상대방이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끔 하는 문화나 정신적 가치 등의 요소들을 의미합니다. 일본의 소프트 파워가 강세인 건 인스타그램만 켜도 쉽게 보입니다. 별로 보지도 않았던 일본 애니메이션이 피드로 떠오르고, 일본 패션 스타일이 담긴 포스트들이 눈에 띕니다. 해외 유명 배우나 감독들이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로 일본 작품들을 언급하는 경우도 많죠. 이 정도면 단순한 유행을 넘어선 흐름이라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사실 일본의 소프트 파워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배경이 되는 역사와 철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일본은 근대화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단순히 서구의 과학기술뿐 아니라 철학, 문학, 미학 같은 인문학적 자산을 깊게 수용했습니다. 한국이나 중국이 상대적으로 기술 중심의 서구 문물을 받아들였다면, 일본은 인문학을 중심으로 사유와 해석의 틀을 만들어왔고, 이것이 훗날 일본 문화와 기술이 융합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이러한 축적된 지적 자산은 일본이 기계 산업, 반도체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시기에도 빛을 발했습니다. 단순히 기능적인 제품이 아니라 감성과 미학이 담긴 디자인, 사용자 경험을 고려한 정서적 만족까지 더해진 제품들이 많았죠. 그러다 2000년대 들어, 이런 문화를 ‘자산’으로 인식하고 수출하려는 ‘쿨 재팬(Cool Japan)’ 정책이 추진되며 본격적인 문화 수출이 시작됩니다.


1200px-Nintendo-Famicom-Console-Set-FL.jpg 전 이 세대 사람은 아니지만 닌텐도 패미컴 증말 이쁩니다..예..



오늘날 일본이 중요시하는 미학과 기술의 융합은 교육 시스템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공학도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국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예술, 디자인, 미학 전공자들도 존중받고 경쟁력 있는 커리큘럼이 마련되어 있죠. 이는 단순한 정책이 아니라, “문화는 산업이고, 지식은 무기다”라는 오랜 사회적 합의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이러한 배경 위에서 일본의 문화가 띄게 된 색깔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애니메이션입니다. 저는 애니메이션을 엄청 즐겨보는 편은 아니지만, 아키라, 에반게리온,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들은 친구의 추천으로 본 기억이 있어요. 그리고 그 작품들을 통해 느낀 일본 애니메이션만의 독특한 감성이 있죠. 바로 멜랑콜리함. 일본 애니는 사회 문제, 죽음, 고독, 상실 같은 주제를 감성적으로 담아내는 데 매우 능합니다.


그리고 이 감성은 단순한 감정 표현을 넘어서 철학적인 깊이와 서사 구조의 정교함으로 이어집니다. 에반게리온 같은 작품은 한 번 봐서는 다 이해하기 어렵고, 여러 번 보고, 생각하고, 찾아보며 천천히 퍼즐을 맞춰가야 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이런 메시지들이 노골적이지 않고 암시적이며 여운을 남기는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도 일본 애니와 영화의 미덕이죠. 그래도 전 퍼시픽림이 더 좋아ㅇ....


이런 점은 최근의 할리우드와 비교하면 더 두드러집니다. 요즘 할리우드는 무리하게 IP를 끌고 가거나, 수익성을 위해서 시퀄과 리메이크에 집중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반면 일본 애니메이션은 원작 IP를 존중하면서 세계관을 창의적으로 확장하거나, 신선하고 다양한 장르와 세계관들을 시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패션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은 강력한 패션 강국입니다. 일본의 패션을 보면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기보다는 자기표현을 우선으로 한다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아메카지 스타일이나 도쿄의 오리지널 스트리트 패션을 보면 틀에 얽매이지 않고 믹스매치를 하는 사례가 많이 보입니다. 그러한 믹스매치 내에도 옷의 정교한 디테일이나 고퀄리티의 소재들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일본 애니에서 느낄 수 있었던 장인 정신도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본 문화는 Z 세대의 특성과도 잘 맞아떨어집니다. 저도 그 세대의 일원으로서, 저희는 ‘쿨함’보다는 ‘취향’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고 많이 느껴요. 남들이 멋있다고 여기는 것보다, 나만의 취향과 정체성을 담을 수 있는 게 더 중요하죠. 예전엔 애니메이션 좋아하면 ‘오타쿠’로 낙인찍히곤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런 ‘따뜻한 기묘함’을 가진 취향들이 더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걸 실감했던 큰 경험이 하나 있습니다. 텍사스에서 대학교 다니는 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정말 잘생기고 몸도 짱짱한 데다가 애니메이션하고는 거리가 멀었던 애였습니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인스타그램에 여자친구랑 애니 보고, 캐릭터 코스프레한 사진까지 올리더라고요. 이 녀석이 애니를 보다니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글 느끼면서, 이제는 취향을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쿨’한 시대라는 걸 볼 수 있는 경험이었어요.





한국은 K-컬처 붐을 통해 전 세계를 들썩이게 했고, 그 열기 또한 대단했지만, 일본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움직입니다. 뭔가 시끄럽지 않게, 그러나 천천히 깊숙이 사람들의 일상과 감정 속으로 스며드는 방식이죠, 마치 일본인들처럼요. 그런 점이 지금의 일본 문화가 가진 힘이자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칫 ‘와패니즈’(서구권에서 오타쿠를 부르는 말)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분명 한국인이고, 일본을 단순히 좋아할 수만은 없는, 복잡한 역사를 공유한 나라의 국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쌓아온 문화적 자산과 지적 전통만큼은 진지하게 배우고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이 마주하고 있는 고령화, 경제 불안, 정체성 위기 등의 문제들 속에서, 선례인 일본의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느껴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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