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닥터페퍼 증후군인가?
아직 닥터페퍼 제로슈거 버전을 맛보지 않으셨다면, 제발 먹지 말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감기약에 탄산수를 섞은 듯한 맛이랄까요. 처음 마셔봤을 때 물비린내가 너무 심해서 차라리 탄산수 한 병을 사 먹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어쩌면 닥터페퍼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그 기대감이 너무 컸던 탓일지도 모르겠네요.
저와 닥터페퍼의 인연은 약 12년 전, 미국에 살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집 근처 타코벨에서 음료를 고르던 어느 날, 평소 마시던 마운틴 듀 대신 뭔가 새로운 걸 마셔보고 싶었죠. 루트비어와 닥터페퍼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유독 버건디 색이 마음에 들어 닥터페퍼를 선택했습니다. (참고로, 나중에 루트비어도 마셔봤는데, 그때 닥터페퍼를 고르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맛은 정말 오묘했습니다. 체리 향이 스쳐 지나가는 듯하다가, 곧 계피 향이 감돌고, 마지막엔 코카콜라 같은 익숙한 끝맛이 남았죠. 첫인상은 그리 나쁘지 않았고, 그 후로 가끔씩 찾게 되는 음료가 되었습니다....만 결국 베스트셀러의 벽은 넘지 못했죠. 다시 마운틴듀와 코카콜라로 돌아가게 됐지만, 닥터페퍼 특유의 인공적이면서도 묘하게 끌리는 맛은 가끔씩 떠오르곤 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닥터페퍼는 가끔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마시는 음료로 남아 있었습니다. 마치 고수(Cilantro)가 든 음식처럼 자주 먹진 않지만, 뭔가 색다른 자극이 필요할 때 찾게 되는 그런 존재랄까요. 미국 유학생 출신들이 한국에 돌아오면 그렇게 찾는 치폴레나 플레이밍 핫 치토스처럼 말이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한국에선 한때 닥터페퍼에 대한 이미지가 꽤 좋지 않았더라고요. “닥터페퍼 증후군”이라는 인터넷 밈이 있었는데, 닥터페퍼를 마시며 남들이 마시지 않는 음료를 마시는 자신만의 독특함에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음료 하나를 두고 더 힙하다고 느끼는 것도, 그걸 비꼬는 것도 참 재밌죠. 하지만 닥터페퍼가 주는 그 독특한 느낌, 뭔가 남다른 무드가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우선, 닥터페퍼 자체로도 굉장히 매력적이죠. 닥터페퍼 한 캔을 마트에서 구매했다고 생각을 해볼까요. 닥터페퍼 캔의 진한 버건디 컬러는 밝고 경쾌한 색이 주를 이루는 탄산음료 시장에서 확실한 차별점이 됩니다. 로고도 마찬가지죠. 약간 20세기스러운 감성의 기울어진 폰트는 마치 미국 남부의 바(bar)나 재즈 음반 커버를 연상시킵니다. 실제로 닥터페퍼는 미국 남부 텍사스에서 처음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상업 탄산음료라고 합니다. 이런 매력적인 디자인 요소들에 이어 이름까지 '닥터 페퍼'입니다. "의사가 만든 자양강장제 같은 건가?"라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 신기한 이름입니다.
이제 한 모금 마셔볼까요. 그 인공적인 체리와 계피, 그리고 약초 같은 향이 뒤섞여 묘한 매력을 만들어냅니다. 처음엔 “이게 뭐지?”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고 한번 더 마셔봅니다. 그렇게 마시다가 어느새 한 캔을 비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호불호가 강한 맛 자체가, 닥터페퍼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이런 개성은, 나만의 취향을 중시하고 서브컬처에 친숙한 Z세대에게 꽤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합니다.
또 한 가지 닥터페퍼만의 특별한 점이라고 한다면, 미국 외 지역에선 그다지 널리 판매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유럽 8개국을 여행한 경험이 있지만, 닥터페퍼가 있어도 미국가 달리 종류는 하나뿐이었습니다.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본 기억도 없습니다. 이런 희소성 덕분에, 닥터페퍼는 뭔가 더 특별하고 비주류적인 느낌을 주는 것 같습니다. 이는 미드와 할리우드 영화 같은 미국 문화를 소비하며 미국 정서를 동경하는 이들에겐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죠.
닥터페퍼는 이런 본인들의 이미지에 맞게 국내외로 마케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닥터페퍼의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을 보면 2010년대 인터넷 커뮤니티 스타일의 짤들로 도배돼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예전부터 게이머들이 마시는 비주류 음료수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닥터 페퍼 관련 밈이 성행했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겠죠.
또 그들은 광고에 “Try more weird”라는 슬로건 아래 괴짜 과학자를 등장시키며 자신들을 ‘남들과 다른’ 존재로 포지셔닝합니다. 이건 그냥 엽기적인 게 아니라, 아예 비주류 문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껴안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한국에서는 잔나비의 최정훈 씨가 닥터페퍼의 브랜드 앰버서더로 선정됐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잔나비라니, 정말 찰떡이죠. 스타일리시하면서도 완전히 또 주류는 아닌 인디밴드의 느낌이 딱 닥터페퍼와 어울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전략 덕분인지 얼마 전 닥터페퍼가 미국에선 부동의 2인자였던 펩시를 제치고 청량음료 시장 2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뭐 이 맛을 많은 이들이 알게 되어서 기쁘긴 합니다만, 적어도 미국 밖에서는 닥터페퍼가 그저 내 추억 속의, 나만 아는 서브 음료수로 남아줬으면 좋겠습니다. 마치 동네의 숨은 맛집처럼 말이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저도 어쩌면 '닥터페퍼 증후군'일지도 모르겠네요.
얼마 전 버거킹에서 닥터페퍼 플로트(음료 위에 아이스크림을 올린 디저트)를 출시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오늘은 통새우와퍼에 플로트 하나 곁들여서 추억에 젖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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