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수양 3: 세상과 동화함
제3장 수양에 대하여
о 동화: 깨달음을 감추고 세상과 어울리는 단계(和其光同其塵)
화광동진은 수용과 포용을 강조한 말로 깨달음의 조도를 조절하여 세상에 맞추어 함께하고 세상의 고통을 더는데 도움을 주라는 의미다. 깨달은 사람이 세상과 상생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이다.
화광동진의 단계는 수양 1과 2에서 말한 것처럼 현재의 나에 집중하고 생각 분별과 감정 집착 벗어난 사람이고 하단 열자의 말을 따르면 9년 이상 수양해야 도달하는 경지다.
오랜 기간 수양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안 맞을 수 있다. 깨달은 사람은 '세상 일이나 사물은 맞는 것도 틀린 것도 없다. 선도 악도 없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없다.'라고 생각한다. 꼭 선택해야 한다면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일을 선택한다. 그렇다고 자기에게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을 비난하지 않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을 칭찬하지도 않는다. 또한 도와준 사람을 칭찬하는 사람에게 뭐라고 하지도 않는다. 좋고 싫음에 집착하지 않아 그 수준을 넘어선 사람이다. 세상사람은 뭔 뚱딴지같은 말을 하는지 답답하고 황당할 수 있다.
화광동진의 사람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깨달음의 빛을 숨기고 개성이 강한 다양한 세상사람을 포용하기 위해서다. 잘났든 못났든 신성을 지녀 평등한 세상사람에 대한 존중과 이해의 표시다. 또한 세상 일은 상황에 따라 변하고 언젠가 반전되어 어느 하나만 맞는 것이 아님을 안다. 꼭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안 돼 일어난 걱정을 이해하고 바라보며 달래 준다. 세상사람들과 친하지도 멀지도 않고 귀하게도 천하게도 대하지 않는다. 마치 본성이 개성 강한 다양한 자아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이해하며 포용하는 모습과 유사하다.
화광동진의 사람의 마음 크기는 바다나 허공 같다. 바다에 물감을 쏟아도 금세 제자리도 되돌아가며, 허공에 물감을 뿌려도 물들여지지 않는다. 무대에 푹 빠진 가수처럼 시공간을 못 느끼고, 나와 남이 없으며, 좋고 싫은 감정을 못 느낀다고 한다. 달리 표현하면 여기 지금의 시공간만 있고, 나도 남도 존중하며, 좋고 싫은 감정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 사람의 마음 크기를 물감을 뿌리면 색깔이 변하는 접시쯤으로 그리면 감이 안 온다. 보통 하소연하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어렵고, 감정의 쓰레기통이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사람인 이상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화광동진의 사람은 맞고 틀린 게 없어 딱히 내 생각이라고 주장할 게 없는 빈 마음 상태다. 남을 남 기준으로 이해하는 사람이다. 즉 남을 이해할 때 빈 마음에 남의 생각을 들여놓아야 가능한 일이다. 보통 마음 크기의 사람이 보기에 내 생각이 항상 나하고 있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으므로 나만의 생각이 있어야 한다고 무의식적 확신을 하며 산다. 빈 마음으로 세상과 같이하는 일은 합리성과 감각을 넘어서는 이야기이므로 비현실적이라 비웃을 수 있다. 마치 3차원에 사는 생물이 위에서 면으로 접촉했다가 띄면 2차원 면에서 움직이는 생물은 갑자기 생물이 생겼다가 없어진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다. 마음에 합리성과 감각에 대한 믿음을 장착하고 있어 머리로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고, 비현실적이라고 비웃는다.
깨닫고 세상으로 다시 나간다. 깨닫기 전 세상과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느껴진다. 세상은 이해관계로 쪼개어 차별하고 경쟁하며, 애증의 감정을 꼭 붙들고 놓지 않아 고통받고 있는 게 보인다. 빈 마음인 사람이 세상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애환과 연민을 물씬 느낀다. 물아일체, 한 덩어리로 느끼는 경지다. 나와 남은 쪼갤 수 없는 한 덩어리고, 뭉쳐 관계하고 있는 나와 남은 쪼개져 관계하지 않는 나와 남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나와 남을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고 인식한다.
지눌의 말을 참고하면 이렇다. “한결같이 진리만 말하여 세속을 거슬러서도 안 되는 것이요, 또 한결같이 세속만 말하여 진리를 거슬러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귀·코 등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반은 남의 뜻을 따르고 반은 제가 증득(證得, 깨달아 얻음)한 것에 맞추어 진여(眞如)가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깨달은 자가 반쯤 세상의 뜻을 따라가면 답답할지 모른다. 깨달은 사람 생각대로 세상을 끌고 가는 것이 가장 빨라 보인다. 그러나 그 깨달음을 고집하는 경우 깨달음의 빛이 너무 강해 세상은 힘들어한다. 세상과 마찰로 중단되거나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세상과 함께 가면 느려 보이지만, 세상과 마찰이 적고 자발적 동기를 유발해 결국 가장 빨리 가는 길이다.
화광동진은 개인의 자유를 넘어선 나뿐만 아니라 관계하는 것들도 자유로운 경지다. 대아의 자유다. 그런 자유는 공짜로 얻을 수 없다. 고통이 따른다. 고통 없이 얻은 것은 자유가 아니다.
세상에 배어 있는 구속은 힘이 세다. 감각기관으로 인식한 게 맞다는 생각, 부분이 따로 존재한다는 생각, 비교하는 습관, 좋고 싶은 감정에 집착하는 습관, 기대, 과거에 입은 상처 등이 세상사람들의 몸에 배어 있다. 또한, 거기에 따라 사는 사람이 정상이고, 날카롭게 사는 게 권력과 자본을 쟁취할 수 있으며, 그것을 강화한 사람이 뛰어나다는 인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런 생각을 가진 세상과 마찰을 일으킬 수 있다. 구속에 저항하기란 체급이 다른 괴물에 맞서는 일처럼 고통스럽다.
대아의 자유는 개인만의 자유가 아니어서 힘들다. 개인은 자유로워 좋은데 그 자유로 인해 아내, 자식, 동료, 주변 사람의 자유를 해치면 대아의 자유가 아니다. 우리는 어떤 생각, 어떤 상황, 어떤 상태이든 자기만의 고유한 매력을 지닌 매력 덩어리이고, 끔찍하게 아낌을 받을 만하다. 자유를 찾는 개인은 나만의 내가 아니어서 힘들고 고통스럽다.
대아의 자유를 얻으려는 사람은 그 무게와 세상의 날카로움에 고통스럽다. 밥을 포기하고, 정신적 가해, 물리적 압박, 무시, 멸시와 조롱을 견뎌야 한다.
열자가 몇 년을 수양해야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지 윤생에게 들려준 《열자》 황제편의 이야기다. 몸과 마음을 닦아 3년이 지난 후 시비를 나누어 차별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5년 후 시비 분별하지 않고, 7년 후 시비 분별하지 않고 애증의 감정에 집착이 사라졌네. 9년 후 시비 분별하지 않고, 애증의 감정에 집착도 없으며, 자타와 내외를 구분하는 의식이 사라졌네. 정신이 하나로 모아져 몸을 의식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