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허무의 극복 2

제3장 수양에 대하여

by 누룽지조아

즐겁게 수양하기 위해 다음 사항을 점검해 다.

‘나를 희생한다?’ 나를 희생하면 남을 길게 아껴줄 수 없다. 나에게, 남에게도 안 좋다. 나도 좋고 남도 좋아야 오래간다. ‘나’는 신성을 품고 있는 소중한 존재이므로 나에게 좋고, 남에게도 좋은 것이 아니면 수용하지 않는다.


‘만사 매일반이고, 이리 살든 저리 살든 별 차이가 없다?’ 주변 사람들 사는 모습에서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실감한다. 옆집에 부부싸움하느라 큰소리 나고 울며 물건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활짝 웃는 집안과 차이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인생은 바둑처럼 한 알 한 알의 작은 차이가 쌓이고 쌓이면 굉장히 달라진다. 수양하는 사람은 몸과 생각의 습관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고 생각하기에 그 습관을 바꾸기 위해 성실히 노력한다.


‘남과 싸울 일 있어도 굳이 싸우지 않고 양보한다?’ 귀찮다. 내가 양보하고 만다. 달관한 모습이 아니다. 비굴함이다. 강자의 불공정한 요구에 저항조차 안 하면 남만 좋고 나는 안 좋은 상황이다. 강자가 나에게 피해를 끼칠 자유는 없으며, 나는 정당하게 방어할 권리가 있다. 처음에 부드럽게 이야기한다. 너무 불공정해 싸움 말고 다른 수단이 없으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기꺼이 싸운다. 남도 좋고 나도 좋아야 오래가기 때문이다.


‘틀리더라도 어차피 반전되므로 조용히 있는다?’ 아무 일도 않고 가만히 있으면 상황이 반전되기까지 감내해야 할 기간이나 고통이 크다. 자기만 손해다. 여름에 더워 러닝만 입고 살았다. 기다리면 또 여름이 온다고 러닝만 입고 지내기에 견뎌야 할 세월이 길며 겨울이 너무 춥다. 현재의 어려움을 기회로 삼고 반전될 때까지 상황 변화에 순응하며 성실히 노력한다.


‘위나 아래나 똑같다?’ 위나 아래는 똑같지 않다. 세상의 관점에서 위나 아래는 있다. 다만, 아래가 위보다 더 열등한 것은 아니며, 위와 아래는 반전될 수도 있다. 아래를 존중한다. 위와 아래는 서로 기대고 있다. 위의 바탕인 아래가 없으면 위도 없다. 같이 있는 양면을 다 고려한다. 한쪽만 잘라 보는 50% 사고방식인 이분법을 탈피하고 양면을 통합적으로 본다.


‘지식을 다 끊는다(絕學無憂)?’ 애들이 인성이 중요하므로 지식 공부를 안 시키고 밖에서 계속 놀라고 해 보자. 애들은 마냥 즐거운 게 아니라 학교는 지옥으로 변한다. 숙제를 안 해 가 친구들에게 놀림당하고 선생님께 꾸지람 듣는다. 성적이 안 좋아 주눅 들며 열등감에 사로잡힌다. 결국 애들의 행복이 줄어든다. 지식은 일하는 사람에게 수단으로써 필요하며,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 축적의 중요한 도구다.


지식은 참과 거짓으로 쪼개는 분별지이므로 가치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지식을 한계를 알고 그 한계를 극복하라는 말에 가깝다.


한 덩어리로 보는 세상은 예술이다. 쪼개 하나하나 쌓아 올려 가는 세상도 그에 못지않다. 세상을 한 덩어리라고 백날 강조해도 부분을 모르면 전체를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우리에게 주어진 말과 글로 세상을 쪼갠다. 다시 상호의존성을 생각해 뭉친다. 쪼개도 아름답고 뭉쳐도 아름답다. 반복 훈련하여 경계를 넘어선다.


물론 쪼개는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 쪼개기만 하면 어울림을 방해한다. 참은 거짓에 의지하고 있으며, 늘 참이 아니고 일정한 가정하에서 참임을 명심한다.


특히 리더가 지식을 조직 운영 수단으로 사용할 때 다음에 주의한다. 구성원을 참과 거짓, 선악 등으로 구분하여 날카롭게 비판하는 것보다 다르더라도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지식이 많아 상대의 장단점을 알더라도 드러내지 않고 이해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대한다. 리더는 지식에 얽매지 않고 더 중요한 가치를 위해 그 지식을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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