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도덕경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누룽지조아 Mar 25. 2024

68. 없음은 만물의 겉, 속과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도덕경 제14장

보아도 보이지 않아 이름이 이(夷)고,

들어도 들리지 않아 이름이 희(希),

뭉쳐도 얻지 못하여 이름이 미(微)다.

시각, 청각과 촉각,

이 세 가지로는 따질 수 없다.


그래서 뒤섞여 하나고,

위는 밝지가 않으며,

아래는 어둡지 않고,

대대로 이어져 있으며,

뭐라고 이름하기 불가하고,

복귀해 비물질로 존재한다.


이를

일정한 모양이 없는 모양이고,

비물질의 형상이라고 말하며,

눈이 부셔 어릿어릿할 정도로

찬란하여 황홀하다고 말한다.


뒤섞인 하나는

맞이해도 머리를 보지 못하며,

따라가도 꼬리를 보지 못한다.

 

세상은 태초의 도를 움켜쥐고,

도는 현재 존재들을 다스린다.

현재 존재들에서

태초의 시원을 알 수 있으므로

이것을 도의 단서라고 말한다.

 

視之不見名曰夷, 聽之不聞名曰希,

시지불견명왈이, 청지불문명왈희,

之不得名曰微, 此三者不可致詰.

박지부득명왈미, 차삼자불가치힐.

故混而爲一, 其上不, 其下不昧,

고혼이위일, 기상불교, 기하불매,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승승불가명, 복귀어무물.

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 是謂惚恍.

시위무상지상, 무물지상, 시위홀황.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영지불견기수, 수지불견기후.

執古之道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

집고지도이어금지유. 능지고시, 시위도기.

 

사람들은 세상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고 싶어 한다. 그 수단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이치인 도를 려고 노력한다.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도는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손으로 만져서 찾을 수 없다. 또한 뚜렷하지 않고 시작과 끝이 있는 게 아니다,

 

그러면 안 보이는 도를 어떻게 구해야 하나? 만물에 도의 단서가 있으므로 그저 만물을 고요히 바라보거나 나를 고요히 바라본다. 도는 만물의 현상이나 현상의 연속인 움직임을 통해 나타난다. 존재의 마음, 표정, 행동과 말이 존재의 움직임을 통해 드러낸다. 즉 안 보이는 게 누적되어 나타난 만물의 겉과 속 모습이나 스치는 바람처럼 움직임으로 느낄 수 있다. 다음 장인 15장에서 도인을 통해 도의 모습을 그린다.

 

'도는 비물질이다.'

보고 듣고 만져지는 것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빛, 에너지, 관계 등의 비물질 존재한다. 비물질은 알 수 있는 비물질과 알 수 없어 비존재로 구분할 수 있으나, 실익이 없어 이 글에서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았다.

 

도는 안 보이고 안 들리며 뭉치지 못해 이름 지으면 이(夷), 희(希), 미(微)라고 한다. 극히 작고 미세하다. 감각기관으로 느낄 수 없다.

 

도는 무한한 음의 에너지와 양의 에너지, 빛과 먼지가 뒤섞여 하나를 이룬다(4장). 밝지 않으며(음), 어둡지도 않다(양). 양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음만 있는 것도 아닌 음양이 뒤섞여 있다. 위는 너무 밝지 않게 가리므로 밝지 않고, 내면을 환하게 비추므로 어둡지 않다.

 

대대로 이어져 존재하나 딱히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없고, 비물질 본디의 상태로 복귀한다.


눈으로 안 보인다고 없는 게 아니다. 안 보이는 빛은 프리즘을 통해 인식할 수 있고 존재인 물질을 만든다. 프리즘을 통과한 빛은 파장에 따라 밝고 어둔 색으로 분리되며 형태가 있는 존재처럼 인식된다. 또한 빛을 받은 식물의 잎은 광합성 작용으로 녹말을 만든다. 비물질인 빛이 다른 것과 결합하여 물질을 만든다. 비물질인 에너지가 작용하여 유형과 물질을 창조하니 황홀하다.


복귀어무물(復歸於無物)의 어(於)를 있다, 존재하다로 번역했다. 용례로 치본어농(治本於農, 다스림의 근본은 농사에 있다)을 들 수 있다.

 

'도는 비물질로 알 수 없다.'

도는 어디가 머리고 꼬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앞과 꼬리를 못 본다는 말은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존재란 뜻이다.

 

'만물에서 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도는 만물을 다스린다. 만물은 도를 품고 있어 물질과 비물질특징을 동시에 갖는다. 만물의 겉과 속 모양에서 도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물질에서 비물질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돌을 강하게 부딪히면 에너지가 나온다. 돌이라는 물질에서 비물질인 에너지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알 수 없는 비물질(無)


안 보이는 것의 존재를 믿을 수 있나? 존재 양태에 따라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물질과 보고 듣고 만질 수 없는 빛∙ 에너지 등 비물질로 나눈다. 비물질 중 알 수 없는 관계∙ 이치∙ 도 등비존재라고 한다. 과거에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것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다가 빛, 중력 등 보이지 않는 것도 존재한다는 것을 보편적으로 믿는다. 그러면 존재 자체를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 존재를 믿을 수 있는가?

 

물질이란 질량이 있고 공간을 차지하는 실체로 형체가 있다. 비물질은 물질과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질량이 없고 공간을 차지하지 않으며 형체가 없다. 비물질의 예로 마음, 시간, 움직임, 에너지 등을 들 수 있다. 물질과 비물질은 쌍으로 존재한다. 물질을 인식하기 위해 물질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 비물질인 전자파, 뇌파 등으로 전환하여 인식한 후 감정, 생각, 의욕 등이 일어난다. 물질을 인식할 때 비물질이 개입한다.

 

노자는 존재를 유(有)라 하고 인식할 수 없는 비물질을 무(無)라고 말하고,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없음을 아무것도 없는 없음이 아니라 있는 없음(眞空)으로 보았다.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無)의 존재를 부인한다. 무(無)를 말하면 무슨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면박을 준다. 말 꺼내기가 무섭다. 존재(有)만 존재한다면 존재가 변하고 존재가 이동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비존재인 없음이 개입되어야 설명할 수 있다. 존재(有)가 죽어 땅에 묻혀 사라진다(無). 비존재인 없음이 존재를 낳고 다시 존재는 없음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존재(有)의 이동을 존재(有)가 빈 공간(無)으로 움직이는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은 보는 대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인간이 사물의 감각자극을 감각기관으로 받아들인 후 편집하여 뇌에 저장한다. 감각기관이 다른 존재는 세상을 우리와 다르게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주 미세한 것이나 큰 것, 자외선이나 적외선, 빛의 흡수, 관계 등을 볼 수 있고, 주변 환경까지 하나로 인식하며, 감각자극을 인간과 다르게 편집하는 존재가 있으면 세상을 인간과 다른 모양으로 볼 수 있다.

 

존재를 결정짓는 요소가 물질의 모양이나 형태, 소리, 느낌만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주변 환경과의 관계가 그 물질의 존재에 더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내가 친구의 등짝을 세게 때렸다. 친구는 아파 죽는다고 소리쳤으며, 내 손도 아팠다. 내가 때린 행위는 나만의 행위가 아니라 친구의 등짝이 내 손을 때린 행위이기도 하다. 내 존재도 계속 영향을 받는 주변 환경까지 포함한 나와 환경의 뭉탱이일 수 있다.

 

노자가 말하는 ‘나를 잊는다. 백성과 혼연일체가 된다.’는 말은 단독 자아에서 벗어나 인연을 맺는 존재와 나를 한 뭉탱이인 나로 인식한다는 뜻이다. 내가 백성에게 미치는 행위는 백성이 나에게 미치는 행위로 돌아온다. 결국 나는 내 이익만 챙길 게 아니라 전체를 이롭게 하고 화합한다는 의미로 들린다.

 

안 보이는 도(無)가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노자는 존재(有)에 도(無)라는 이치가 내재되어 있고, 그 이치에 따라 움직인다고 획기적으로 주장했다. 그리고 그 도라는 것은 만물과 같지 않으면서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존재(有)는 100% 존재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존재(無)가 내포된 확률적인 존재(有)다.

 

존재는 비존재인 없음의 축적물이고  특성을 지닌다. 마치 면적이 없는 점의 축적물이 선인 것과 같다. 그러면 도는 만물을 이롭게 하는데 참되지 않은 것, 도에 맞지 않은 것, 악한 것이 왜 존재하는가? 노자는 참되지 않은 것, 도에 맞지 않는 것, 악한 것 등 그런 것은 본질적으로는 없다고 주장한다. 도의 축적물에 먼지가 끼여 있어 누구나 비우고 조용히 먼지를 터는 수양을 하여 도(道)로 복귀한다고 주장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67. 균형은 비어 보이고 이미 가득해 차지 않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