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 죽기

by 누룽지조아

죽었다. 완전히 죽기까지 다섯 번이나 죽었다. 밥벌이를 못해 식구들 굶주려 경제적으로 첫 번째 죽었다. 집 밖으로 못 나가 이웃이나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 사회적 관계 단절로 두 번째 죽었다. 침대에서 누워 움직이지 못했다. 대소변도 도와주어야 처리할 수 있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몸으로 세 번째 죽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 기계에 둘러싸여 살고 있었다. 밥을 먹을 수 없었다. 주사 맞거나 구멍 난 위에 영양을 공급해야 하며, 삐쩍 말랐다. 스스로 먹지 못해 네 번째 죽었다. 호흡이 안 되고 심장이 뛰지 않았다. 심폐 소생술을 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숨 쉬지 않아 다섯 번째 죽었다.


내가 운 좋게 집에서 호흡이 멈추면 병원 장례식장, 상조회사 또는 112에 신고하여 구급차 부른다. 괜히 119 부르면 경찰에 신고하며 시체검안서(병원)나 검사지휘서(경찰) 필요하여 사망절차 번거롭다. 사망 후 1달 이내에 주민센터에 사망신고하고, 지자체 장례지원금, 유족연금, 반환일시금 받을 수 있는지 확인한다. 죽은 후 달의 말일로부터 6개월 이내 상속세 신고한다. 안심상속 원스톱서비스 활용하면 재산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거다.


요즘 대부분 병원에서 죽는다. 집에서 편하게 죽고 싶다. 나이 들어 중환자실에 들어가면 못 나온다. 치료해 봐야 노인은 피곤하고, 단기 효과만 있을 뿐 더 오래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족들도 스트레스 많이 받는다. 돈도 많이 든다. 좋은 게 없다.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 늙어서 약 많이 안 먹고 싶다. 병원에서 혈액 투석, 신장 치료, 폐렴, 항암 치료, 감염 치료 등 연명치료가 필요하더라도 난 거부하고 싶다.


태어나서 성장한 후 늙고 병들어 죽는다. 병은 친구이다. 병을 적으로 생각하고 싸우니 기세가 살아나 더 피곤하다. 사람은 숨이 멎어야 죽는 게 아니다. 삶의 비중이 높아지다가 일정 시점을 지난 후 죽음의 비중이 늘어난다. 그러나 죽음이 어둡지만은 않아 슬프지는 않다. 삶은 죽음으로, 죽음은 삶으로 가는 길이다. 삶과 죽음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공생한다.


사람이 죽으면 미생물이 태어난다. 사람이 태어나면 많은 생물들은 사람의 먹잇감이 되어 죽는다. 삶은 죽음에 빚지고 있다. 죽음은 부정적인 개념만 가지고 있지는 않다. 죽음이 밝은 색깔이고, 삶은 어둔 색깔인 것 같다. 죽음은 양초처럼 자기를 희생하여 살아있는 것을 유지시킨다. 삶은 다른 것들을 죽임으로써 죽음에 의지하여 살아간다.


죽음은 밝은 색깔이므로 집에서 맞이하고 싶다. 장례는 죽은 자와 남은 자를 위한 행사이다. 밖으로 나돌아 다닐 수 있을 때 영정 사진 찍고, 가족과 친구들과 식사한다. 죽기 전에는 가족을 다 불러 모아 가족회의를 열고, 인수인계 목록을 전달해 주고 싶다. 재산 정리하고 유언장을 쓰거나 녹음한다. 죽기 전 통장에 있는 돈은 한 통장으로 모으고 돈 지출할 때마다 내용 적는다. 내용 안 적고 지출하면 나중에 일정금액 이상은 증여의제로 추정될 수 있어 남은 가족들이 소명하느라 고생한다. 신분증, 통장 비밀번호와 카드 주고 이제부터 들어가는 돈은 그 통장에서 출금되는 카드로 처리하라고 말해준다. 장례 때 오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지인의 연락처 알려준다.


죽었다고 너무 슬퍼 말라. 어찌 보면 고향으로 돌아가며, 고향에서 욕망과 질병의 고통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는지 모르겠다. 삶과 죽음은 각자 자기의 길이 있다. 우리가 바라고 구한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언제든 없어질 수 있는 존재이므로 ‘살아 있음’과 지금 마주한 ‘현재’가 더 소중하다. 마치 어린애가 쨍쨍 내리쬐는 여름날 반쯤 녹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다 없어질까 봐 아껴 먹는 모습과 유사하다. 줄어드는 아이스크림 먹기에 바빠 미워할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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