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이란 0차원(점)으로 생각하는 훈련이다. 과거, 현재와 미래를 한 덩어리로, 나, 남과 환경을 한 덩어리로, 애증을 한 덩어리로 생각하는 훈련이다. 시공간, 나와 남이 구별되지 않고, 애증의 감정에 집착하여 휘둘리지 않는 무한 차원의 수련이기도 하다. 시공간, 나, 애증의 감정을 넘어선다. 아주 곯아떨어져 시간도, 나도 남도, 애증에 집착 없이 잠을 푹 자는 것과 같은 삶이다.
한 덩어리로 생각할 때 마음이 넓어진다. 거꾸로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손해 볼 것 같아 시도하지 않고 기피하는 훈련이다. 도달하기 어렵고 그렇게 살기 참 힘들다.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벗어주는 사람이다.
왜 손해 볼 것 같은 이런 마음 넓히는 수련을 하는가? 걱정 없이 본성대로 살기 때문에 행복해진다. 그리고 현실에서 손해만 보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익으로 돌아온다.
시공간인 좌우, 위아래가 있고, 나와 남이 있는데 한 덩어리로 생각할 수 있을까?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CPU)와 입출력장치는 한 덩어리인지에 대한 질문과 유사하다. 우리가 이름을 붙여 분리해서 보는 경우 그것들은 개별적 존재다. 그러나 컴퓨터라는 한 덩어리로 생각할 수 있다. 참, 거짓의 문제가 아니다. 편의를 위해 개별적으로 구분하든 관계있는 것을 통합적으로 보든 모두 틀리지 않았다.
한 덩어리로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담고 있다.’ 모가 자라기 시작한 그믐밤 들판 논길을 거닐어 보자. 가로, 세로, 상하, 시간 그런 것들로 위치를 확정할 수 있다. 그러나 걸을 때 가로, 세로, 상하 등 격자무늬는 없으며, 머리에 그리고 걷거나 느끼는 사람은 없다. 특히 사람은 현재에 살고 있어 과거나 미래는 느끼지 못한다.
내가 걷는 길은 현재의 길이다. 눈으로 보는 앞 길은 빛이 반사되어 시신경에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므로 과거의 길이다. 현재의 길은 지나온 길을 기준으로 하면 미래의 길이다. 우리는 과거, 미래가 섞인 현재의 길을 걷고 있다. 마치 세상이 꿈같을 수 있다. 꿈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 나는 어린애도, 할아버지도 될 수 있다.
‘인식하는 나는 남과 환경을 담고 있다.’ 내가 알 수 있는 세상은 머리로 ‘인식한 세상’이다. 머릿속에는 나만 존재하지 않는다. 남과 환경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독립적 실체지만 독립적 실체라고 보기 어렵다. 나라고 말하는 순간 나와 남이 구분되기 시작한다. 반대로 머릿속에서 한 덩어리라고 받아들이면 나와 남은 구분되지 않는다.
또한, 내가 남에게 욕하는 경우 남의 기분이 나빠지고, 내 기분도 나빠진다. 나와 남이 분리되어 있다면 내 부정적 자극이 나에게서 빠져나가 남에게 갔으므로 내 기분이 좋아져야 한다. 내가 인식하는 남은 내 머릿속에 있어 내가 나에게 부정적 자극을 준 것과 동일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나'라는 것은 남을 한 덩어리로 느끼고 있다.
다른 근거로 아주 먼 별을 초고정밀 망원경으로 본다고 가정하면 지구는 아주 작은 하나의 세포처럼 보일 수 있다. 나도 남도 환경도 그 세포를 이루는 하나의 덩어리 물질로 구별되지 않는다.
애증은 한 덩어리다. 좋아하는 감정이 일어났다가 마음에 안 들면 미워하는 감정이 일어난다. 미움이 컸는데 그 사람을 이해하니 가련해 보인다. 살아있는 동안 피할 수 없는 파도다. 싫어하는 마음이 너무 커지면 좋아하는 점도 방파제로 던져본다. 남 보듯이 일렁이는 감정을 바라본다. 시간이 흐르면 잠잠해진다. 계속 바라보는 수련을 하는 경우 예전보다는 좋아하는 감정과 미워하는 감정의 마루와 골이 낮아지고 집착하지 않는다.
현재를 과거나 미래와 한 덩어리로 생각한다. 과거의 후회나 미래의 두려움 때문에 현재를 희생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 집중한다. 나를 남이나 환경과 한 덩어리로 생각한다.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일을 선택하고 행동한다. 애증을 한 덩어리로 생각하고, 일어나는 감정에 집착하지 않고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