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화: 깨달음을 감추고 세상과 어울리는 단계(和其光同其塵)
깨달은 사람의 마음 크기는 바다나 허공 같다. 바다에 물감을 쏟아도 금세 제자리도 되돌아가며, 허공에 물감을 뿌려도 물들여지지 않는다. 무대에 푹 빠진 가수처럼 시공간을 못 느끼고, 나와 남이 없으며, 좋고 싫은 감정을 못 느낀다고 한다. 달리 표현하면 여기 지금의 시공간만 있고, 나도 남도 존중하며, 좋고 싫은 감정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다.
깨달은 사람의 마음 크기를 대야나 접시쯤으로 그리면 감이 안 온다. 물감을 뿌리면 색깔이 변한다. 남이 하소연하면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어렵고, 감정의 쓰레기통이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보통 마음 크기의 사람이 깨달은 사람을 보면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인다. 득도한 사람은 내 생각이 없어 빈 마음이다. 남을 남 기준으로 이해하는 사람이다. 즉 내 생각을 빼내고 빈 마음에 남의 생각을 들여놓아야 가능한 일이다. 보통 마음 크기의 사람이 보기에 내 생각이 항상 나하고 있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 생각을 버릴 수 없다는 무의식적 확신을 하며 산다. 합리성이나 경험을 넘어서는 이야기이므로 비현실적이라 비웃을 수 있다. 마치 3차원에 사는 생물이 위에서 면으로 접촉했다가 띄면 2차원 면에서 움직이는 생물은 갑자기 생물이 생겼다가 없어진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이다. 마음에 합리성과 감각에 대한 믿음을 장착하고 있어 설명한 말을 머리로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으며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 비판한다.
깨달은 사람은 세상일이 제 마음대로 안 되고, 언젠가는 반전되어 좋은 날이 온다는 것을 안다. 꼭 하고 싶어 하면 내 마음대로 안 돼 걱정이 발생하고, 발생한 걱정은 수용하고 바라보며 달래 주어야 가라앉는다는 것을 안다.
깨닫고 세상으로 다시 나간다. 깨닫기 전 세상과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느껴진다. 세상은 이해관계로 쪼개어 차별하고 경쟁하며, 애증의 감정을 꼭 붙들고 놓지 않아 고통받고 있는 게 보인다. 빈 마음인 사람이 세상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애환을 물씬 느낀다. 물아일체, 한 덩어리로 느끼는 경지다.
지눌의 말을 참고하면 이렇다. “한결같이 진리만 말하여 세속을 거슬러서도 안 되는 것이요, 또 한결같이 세속만 말하여 진리를 거슬러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귀·코 등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반은 남의 뜻을 따르고 반은 제가 증득(證得, 깨달아 얻음)한 것에 맞추어 진여(眞如)가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깨달은 자가 반쯤 세상의 뜻을 따라가면 세상 사람들은 답답할지 모른다. 깨달은 사람 생각대로 세상을 끌고 가는 것이 가장 빨라 보인다. 그러나 그 깨달음을 고집하는 경우 깨달음의 빛이 너무 강해 세상은 힘들어한다. 세상과 마찰로 중단되거나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세상과 함께 가면 느려 보이지만, 세상과 마찰이 적고 자발적 동기를 유발해 결국 가장 빨리 가는 길이다.
열자가 몇 년을 수양해야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지 윤생에게 들려준 《열자》 황제편의 이야기이다. 몸과 마음을 닦아 3년이 지난 후 시비를 나누어 차별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5년 후 시비 분별하지 않고, 7년 후 시비 분별하지 않고 애증의 감정에 집착이 사라졌네. 9년 후 시비 분별하지 않고, 애증의 감정에 집착도 없으며 자타와 내외를 구분하는 의식이 사라졌네. 정신이 하나로 모아져 몸을 의식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