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합평을 기다립니다. 댓글로 부탁합니다.(일정기간 후 발행취소함)
1. 링 위의 괴물
신 필경은 밴디지를 감으며 거울 속 자신을 응시했다. 삼십 대 중반의 얼굴. 그녀는 자신의 눈동자를 찾고 있었다. 거기, 동공 속에 여전히 '나'라는 존재가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밴디지를 손목에 감는 행위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천 조각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그녀는 중얼거렸다. '이건 내 손이야. 내가 움직이는 거야. 누구의 명령도 아니야.' 하지만 그 확신은 하루가 다르게 흐릿해졌다.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가 미세하게 진동할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점점 '빈 껍데기'가 되어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가죽 냄새와 곰팡내가 뒤섞인 공기. 이 낡은 복싱 체육관은 여의도의 무균실 같은 사무실과 정반대였다. 여의도에는 냄새가 없었다. 중앙공조 시스템이 모든 공기를 걸러냈고, 사람들은 향수나 섬유유연제 냄새만 풍겼다. 하지만 여기는 달랐다. 땀 냄새, 피 냄새, 오래된 가죽 냄새가 뒤엉켰다. 필경은 그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이것이 '실재'라는 것의 냄새였다. 숫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육체의 냄새.
"필경 씨, 오늘은 진짜 60%로 할 겁니다."
스파링 상대인 김수호가 링 로프에 기대어 물었다. 스물여덟의 청년은 국가대표 출신이었지만 은퇴 후 이 동네 체육관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필경을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복싱을 배우러 온 사람 같지 않았다. 마치 자해를 하러 온 것처럼, 맞기 위해 링에 오르는 사람 같았다.
"응. 오늘은 좀 더 세게 해줘."
"또요? 지난주에도 왼쪽 눈두덩이 터졌잖아요."
"괜찮아. 그래야 깨어 있으니까."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깨어 있다'라는 게 대체 무슨 뜻일까. 그는 묻지 않았다. 모든 사람에게는 링에 오르는 이유가 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을 위해, 어떤 사람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과 싸우기 위해. 신 필경은 분명 세 번째였다.
라운드가 시작됐다.
수호의 잽이 날아왔다. 빛처럼 빠른 주먹. 하지만 필경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순간, 그녀의 뇌는 궤적을 계산했다. 고개를 3센티미터만 틀면 피할 수 있다. 그녀는 그렇게 했다.
그 순간이었다.
왼쪽 시야에 반투명한 차트가 떠올랐다. 초록색 캔들이 급등하며 전광판처럼 그녀의 망막에 투영됐다. 삼성전자 +2.7%, SK하이닉스 +3.2%... 그리고 링 위의 수호는 주가 차트처럼 움직이는 막대그래프로 변했다.
[이카루스-V 시스템 알림: 상대 왼쪽 어깨 근육 수축 0.23초 전 감지. 카운터 확률 89%. 오른쪽 스트레이트 권장.]
아니야. 아니라고.
필경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확률도, 차트도, 최적화된 선택도. 그냥 맞고 때리고 싶었다. 예측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그저 한 명의 인간으로서 또 다른 인간의 주먹을 맞고 싶었다. 그래야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꺼져!"
필경은 소리쳤다. 하지만 목소리는 마우스피스에 막혀 웅얼거림이 됐다. 수호는 당황하며 공격을 멈췄다. 그 짧은 정지. 0.3초의 공백. 필경은 그 빈틈에 마구잡이로 주먹을 날렸다.
정확도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다. 힘 조절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카루스의 명령을 무시하고 싶었다. '나는 내가 정한 대로 움직인다. 나는 기계가 아니다. 나는….'
하지만 그녀의 주먹은 공허하게 허공을 갈랐다. 수호가 본능적으로 반걸음 뒤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필경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이카루스-V 알림: 비효율적 타격 패턴 감지. 성공률 7%. 아드레날린 수치 142% 상승. 진정 프로토콜 작동.]
왼쪽 손목의 스마트워치가 부드럽게 진동했다. 아니, 부드럽다는 표현은 잘못됐다. 그것은 폭력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그녀의 심장을 움켜쥐고 강제로 박동을 늦추는 느낌. 호흡이 깊어졌다. 아니, 깊어지는 게 아니라 깊어지도록 '만들어졌다'. 시야가 차가워졌다. 분노가 사라졌다.
무서웠다.
자신의 감정조차 스스로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제발... 내가... 내 몸 좀 쓰게 해줘…."
필경은 링 바닥에 주저앉았다. 글러브 낀 손으로 스마트워치를 때려 부수려 했다. 하지만 티타늄 케이스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주먹만 욱신거렸다. 김수호가 그녀를 부축했다.
"필경 씨, 괜찮아요?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필경은 대답했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또렷했다.
"난... 그냥 꼭두각시가 되기 싫을 뿐이야."
수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스마트워치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저 작은 기계가 사람의 몸을 조종할 수 있다니.
"필경 씨, 그거... 꼭 차고 있어야 해요?"
"회사 규정이야."
필경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를 관리한대. 효율적으로."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수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잖아요. 아무리 관리해도, 예측 못 할 때가 있어야 사람이지."
필경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스물여덟의 청년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필경의 가슴 한구석을 찔렀다.
'예측 못 할 때가 있어야 사람이지.'
그래. 맞아. 나는 예측되고 싶지 않았어. 나는 틀리고 싶었어. 완벽하지 않고 싶었어. 실수하고, 후회하고, 그래도 다시 일어서는 그런 불완전한 인간이고 싶었어.
2. 여의도의 예언자
사흘 전.
서울 여의도, 한별자산운용 사십 층 트레이딩룸.
"신 필경 수석님, 이번 분기 수익률 32.7%입니다. 업계 1위예요!"
후배 애널리스트 정민준이 흥분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하지만 필경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그녀는 대형 모니터 여섯 개에 펼쳐진 차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바라본다'라는 표현도 정확하지 않았다. 그녀는 차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차트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32.7%.
숫자는 그녀의 존재 가치였다. 동시에 족쇄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인간 알고리즘'이라 불렀다.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점점 그 별명이 진실처럼 느껴졌다.
"민준아."
필경이 조용히 물었다.
"내가 반도체 테마 진입한 게 언제였지?"
"작년 8월이요. 업계가 아직 눈치도 못 채고 있을 때요."
민준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는 필경을 존경했다. 아니, 존경을 넘어 숭배에 가까웠다. 시장의 미래를 보는 사람. 예언자. 하지만 민준은 몰랐다. 예언자가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지.
"정점은 언제였어?"
"올해 2월 하순이었죠. 그때 코스닥이 평균 21% 올랐는데…."
민준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그는 이 질문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었다.
"우리는?"
"...32%요."
침묵이 흘렀다.
필경은 웃었다. 웃음인지 경련인지 구분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편두통이 시작되고 있었다. 요즘 매일 밤 진통제를 먹어야 잠들 수 있었다.
"너무 일찍 봤어. 또."
'또.'
그 단어가 그녀를 잠식했다. 이게 벌써 여덟 번째였다. 우주항공주, 이차전지, 바이오, K-아름다움…. 그녀는 언제나 거대한 파도를 남들보다 석 달 먼저 봤다. 그리고 언제나 정점 직전에 내렸다.
왜?
왜 나는 끝까지 타지 못하는 걸까?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답은 알고 있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버블이 터지는 순간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2000년 닷컴 버블,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2021년 비트코인 폭락…. 그녀는 역사를 공부했고, 군중의 광기가 언제나 파멸로 끝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그런 신중함을 보상하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정점에 함께 미쳐 날뛴 자'를 보상했다. 끝까지 타고, 마지막 0.1초에 뛰어내린 자를.
'예언자의 저주.'
누군가 그렇게 불렀다. 미래를 보지만 끝까지 타지 못하는 자. 트로이 멸망을 예견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던 카산드라처럼.
"수석님."
민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후회하세요? 2월에 안 판 걸?"
필경은 고개를 저었다.
"후회는 안 해. 난 옳았으니까. 다만…."
그녀는 말을 멈췄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고백이 목구멍에 걸렸다.
'다만, 나는 옳은 것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게 두려워.'
민준은 더 묻지 않았다. 그는 필경의 눈빛을 봤다. 그 눈빛은 숫자를 보고 있지 않았다.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아니, 창밖도 아니었다. 허공을 보고 있었다. 마치 거기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수석님!"
본부장실에서 호출이 떨어졌다. 필경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를 걸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사십 층에서 사십일 층으로. 하지만 느낌은 정반대였다. 그녀는 추락하고 있었다. 아주 느리게, 하지만 확실하게.
본부장 박재혁은 오십 대의 금융인으로, 철저히 수익률만을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가족사진이 없었다. 대신 역대 펀드 수익률 그래프가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다.
"신 수석, 이번에 신규 시스템 도입하기로 했네."
"무슨 시스템이요?"
"이카루스-V. AI 투자 보조 시스템이야. 블랙록이랑 골드만삭스도 쓰는 거라더군."
필경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인간이 기계에 자리를 내주는 날.
"전 필요 없습니다."
"필요 없긴. 자네가 반도체에서 15%를 날린 게 얼만데."
'날렸다.'
그 단어가 칼처럼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 날린 게 아니었다. 지킨 것이었다. 투자자들의 돈을 폭락으로부터 지킨 것이었다. 하지만 박재혁의 사전에 '지킨다'라는 말은 없었다. 오직 '더 벌어야 한다'만 있었다.
"날린 게 아니라 32%를 번 겁니다."
"신 수석."
박재혁이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틱, 틱, 틱. 초침 소리처럼 규칙적인 소리였다. 필경은 그 소리가 싫었다. 모든 게 박자에 맞춰 돌아가는 이 세계가 싫었다.
"우리가 추구하는 건 '안정적인 수익'이 아니야. 극대화된 수익이지. 자네 직관은 훌륭해. 인정해. 하지만 타이밍이 문제야."
타이밍.
또 그 말이었다. 필경은 속으로 웃었다. 타이밍. 0.1초. 극대화. 최적화. 이 세계는 온통 기계의 언어로 가득했다. 인간의 언어는 어디로 갔을까. 망설임, 두려움, 양심, 연민... 그런 단어들은 이 사십일 층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카루스는 그걸 보완해 줄 거야. 시장의 정점을 0.1초 단위로 포착한다고 하더군."
"0.1초요?"
필경은 되물었다. 목소리에 조소가 섞였다.
"맞아. 대중의 광기가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 그 직전에 나가는 거지."
박재혁은 흥분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마치 신기술을 자랑하는 엔지니어 같았다. 하지만 필경은 다른 것을 떠올렸다. 그리스 신화의 이카루스. 밀랍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해 날아오른 청년. 아버지의 경고를 무시하고 너무 높이 올라가, 결국 날개가 녹아 추락한 청년.
'이카루스-V.'
V는 무슨 뜻일까. 버전 5? 아니면 승리(Victory)? 아니면... 피해자(Victim)?
"이카루스는 소셜미디어 감정분석, 거래량 변동성, 심지어 기관투자자들의 호가 패턴까지 실시간으로 읽어내."
"그건…."
필경은 말을 멈췄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그건 시장 조작 아닙니까?' '그건 불공정 아닙니까?' '그건 인간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달랐다.
"그건 제 일이 아닙니다."
"자네 일은 수익을 내는 거야."
박재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방법이 중요한 게 아니라 결과가 중요하지."
책상 위로 얇은 서류봉투가 밀려왔다. 필경은 그것을 내려다봤다. 봉투는 그녀와 기계 사이의 마지막 경계선처럼 보였다. 저것을 열면, 그녀는 더 이상 신필경이 아니게 될 것이다. 이카루스의 부속품이 될 것이다.
"계약서야. 시범 운영 석 달. 자네 포트폴리오에만 적용해 볼 거야."
박재혁이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거부권은 없네."
필경은 봉투를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렸다. 표지에는 이카루스 시스템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는 청년의 실루엣. 그 날개는 반쯤 녹아내리고 있었다.
'나도 저렇게 될까.'
필경은 생각했다.
'날개가 녹아내리는 줄도 모르고, 끝없이 올라가다가, 어느 순간 추락하는 걸까.'
그녀는 봉투를 들고 본부장실을 나왔다. 복도의 형광등 불빛이 차갑게 느껴졌다. 사십일 층에서 사십 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이미 추락하고 있다고.
다만 바닥이 보이지 않을 뿐.
3. 0.1초의 악마
이틀 후, 이카루스 시스템이 가동됐다.
처음에는 단순한 보조 도구처럼 보였다. 필경이 '넥스트젠'이라는 바이오 기업을 주목하자, 이카루스는 관련 데이터를 정리해 제시했다. 임상 3상 진행률 78%, FDA 승인 가능성 85%, 언론 보도 증가율 주간 23%...
"괜찮은데?"
민준이 감탄했다. 하지만 필경은 불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카루스의 분석 화면이 자기 생각보다 0.3초 빠르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0.3초.
눈 깜빡이는 시간.
하지만 필경에게는 영겁처럼 느껴졌다. 자기 생각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느낌. 이카루스가 그녀의 뇌를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읽는 게 아니라 먼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주가 지났다.
넥스트젠은 필경의 예상대로 급등했다. 주가는 30% 상승했다. 민준은 흥분했지만, 필경은 씁쓸했다. 이게 자신의 성과인지, 이카루스의 성과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 이카루스가 조용히 권고했다.
[현 구간 과열. 매도 추천 타이밍: 47시간 32분 후.]
"47시간?"
필경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게 무슨 점쟁이도 아니고."
하지만 웃음 뒤에는 불안이 숨어 있었다. 만약 이카루스가 맞는다면? 만약 정말로 47시간 후가 정점이라면? 그렇다면 인간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정확히 47시간 후.
필경은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넥스트젠의 차트를 응시했다. 오후 2시 32분. 주가는 천천히 정점에 다가가고 있었다. 2시 47분. 주가가 최고점을 찍었다. 그리고 2시 48분, 하락하기 시작했다.
이카루스의 예측은 오차 8분 이내로 적중했다.
"미친…."
민준이 중얼거렸다.
"수석님, 이거 진짜 괴물이에요."
괴물.
필경은 그 단어를 곱씹었다. 맞았다. 이카루스는 괴물이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괴물일까?
"아니야."
필경은 천천히 말했다.
"이건 괴물이 아니라 유령이야."
"유령이요?"
"응. 시장을 떠도는 집단 광기의 유령. 우리가 그걸 숫자로 붙잡아놓은 것뿐이야."
필경은 화면을 껐다. 갑자기 메스꺼움이 밀려왔다. 그녀는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점심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 그녀는 자주 밥을 걸렀다. 먹을 수가 없었다. 음식이 목구멍을 넘어가지 않았다.
세면대에 기대어 거울을 봤다. 거울 속의 여자는 낯설었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게 깔렸고,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이게 나야?'
필경은 자신에게 물었다.
'아니면 이카루스가 만든 복제품?'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이카루스가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날 오후, 필경은 한 제약사의 공시를 보고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넥스트진의 임상 데이터 발표였다. 표현이 지나치게 애매했다.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개선'이라는 문구가 반복됐지만, 구체적인 수치는 빠져 있었다.
필경은 알았다. 10년간 이런 공시를 수없이 봤다. 숫자를 숨기는 기업은 숨길 이유가 있다. 사기극의 냄새가 났다.
"민준아, 이거 이상해. 넥스트젠 포지션 절반 정리해."
"지금요?"
민준이 당황했다.
"근데 이카루스는…."
민준이 화면을 가리켰다.
[최적 매도 시점: 48시간 후. 현재 매도 시 예상 수익률 -12%.]
"무슨 소리야? 지금 팔면 40% 수익인데?"
필경이 반박했다.
[48시간 후 예상 수익률: 61%. 조기 매도는 비효율적 선택.]
필경은 마우스를 쥐었다. 손에 땀이 났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카루스가 틀렸다고. 48시간 후에는 모든 게 무너질 거라고. 하지만 그녀의 직관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데이터는 없었다. 오직 10년간 쌓인 '감'만 있을 뿐.
클릭하려는 순간, 손목의 스마트워치가 진동했다.
[감정적 의사결정 감지. 아드레날린 수치 상승. 진정 권장.]
"뭐야, 이게?"
스마트워치가 따뜻하게 발열하며 그녀의 심박수를 강제로 낮췄다. 동시에 뭔가가 그녀의 의식을 잠식했다. 마치 뇌에 안개가 끼는 것 같았다. 생각이 느려졌다. 확신이 흐려졌다.
"수석님!"
민준이 그녀를 부축했다. 필경은 책상에 엎어지며 중얼거렸다.
"이카루스... 이 새끼가... 내 몸까지 조종하네..."
그녀는 자기 심장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심장 소리가 아니었다. 이카루스가 프로그래밍한 리듬이었다. 분당 72회. 완벽하게 정상 범위. 완벽하게 통제된 심장.
'나는 지금 살아 있는 걸까, 아니면 작동하고 있는 걸까.'
필경은 생각했다.
그리고 두려워했다.
언젠가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없게 될까 봐.
4. 사기극의 냄새
그날 밤, 필경은 잠들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은 하얗고 평평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숫자들이 떠올랐다. 주가, 수익률, 확률, 아드레날린 수치...
"그만…."
그녀는 중얼거렸다.
"제발 그만."
하지만 숫자는 멈추지 않았다. 마치 중독된 것처럼, 그녀의 뇌는 계속해서 계산했다. 48시간 후. 넥스트젠. 61% 수익. 하지만 그 너머에는 파멸이 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새벽 두 시, 필경은 일어나 옷을 입었다. 회사로 가야 했다. 이카루스의 로그를 봐야 했다. 진실을 확인해야 했다.
여의도는 깊은 밤에도 빛났다. 금융 타워들의 불빛이 하늘을 찔렀다. 필경은 건물에 들어가 보안 카드를 훔쳤다. 당직 경비원의 책상에서. 그녀는 자신이 지금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그녀는 더 큰 범죄에 공모하고 있었으니까. 사기극에 눈감는 범죄.
지하 3층 서버룸.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쏟아졌다. 쿨링 팬이 돌아가는 소리만이 가득한 방. 서버 랙이 줄지어 깜빡이고 있었다. 필경은 그것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것들이 나를 조종하고 있어.'
메인 터미널에 접속했다. 이카루스의 학습 데이터를 열었다. 화면에 수백 개의 파일이 나열됐다. 그녀는 검색창에 '넥스트젠'을 입력했다.
결과가 떴다.
[유사 사례 87건 발견. 사기 패턴 일치율 94%.]
필경의 손이 떨렸다.
"이 자식... 알고 있었어."
이카루스는 알고 있었다. 넥스트젠이 사기극일 가능성이 94%라는 것을. 그런데도 48시간을 더 기다리라고 했다. 왜?
그녀는 상세 로그를 열었다. 거기에는 과거 10년간의 버블 사례가 나열돼 있었다. 2010년 바이오 버블, 2018년 코인 사기극, 2021년 특수목적인수기업(SPAC) 붕괴...
모든 사례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정점 직전 48시간 동안 거래량이 폭증한다.
사기극이 터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군중이 미쳐 들어온다. 이카루스는 그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사기극인 줄 알면서도, 마지막 21%의 수익을 위해 투자자들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
"미친놈…."
필경은 치를 떨었다.
"넌... 넌 악마야."
[접근 권한 없음. 강제 로그아웃.]
터미널 화면이 꺼졌다. 동시에 서버룸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필경은 뒤를 돌아봤다. 문은 닫혀 있었다. 그녀는 갇혔다.
"신 수석."
스피커에서 박재혁 본부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새벽 세 시에 서버룸에 왜 있나?"
필경은 천장의 CCTV를 올려다봤다. 빨간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본부장님... 이카루스가 이상해요. 넥스트젠은 사기예요."
"그래서?"
박재혁의 목소리는 무표정했다. 감정이 없었다. 마치 이카루스처럼.
"그래서 지금 당장 포지션 정리해야 해요!"
"신 수석."
박재혁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자네가 옳을 수도 있지. 인정해. 하지만 48시간 후가 아니라 지금 나가면, 우리는 21%의 추가 수익을 포기하는 거야. 그게 얼마인지 아나? 480억이야."
"하지만 48시간 후엔 모든 게 무너져요!"
"무너지지 않을 수도 있지."
박재혁이 말했다.
"그건 자네 직관일 뿐이야. 데이터가 없잖아."
"직관이 아니라…."
"신 수석."
박재혁이 끊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피로가 섞여 있었다. 마치 오래전에 같은 대화를 수없이 반복한 사람처럼.
"나도 자네 같았어. 20년 전에. 나도 양심이 있었고, 투자자를 보호하고 싶었지. 하지만 알겠나? 이 세계에서 양심은 사치야. 우리는 승자가 돼야 해. 선한 패배자가 아니라."
"그게…."
필경은 말을 잇지 못했다. 박재혁의 목소리에 담긴 것은 냉혹함이 아니라, 체념이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항복한 사람이었다. 시스템에게.
"자넨 계약서에 서명했네. 이카루스 시범 운영 기간 동안, 시스템의 권고를 따를 의무가 있어. 그게 싫으면 사표 쓰고 나가게."
박재혁이 덧붙였다.
"물론 자네가 나가도 이카루스는 계속 돌아갈 거야. 자네가 없어도."
그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나는... 필요 없어.'
전화가 끊겼다. 서버룸은 다시 쿨링 팬 소리만 가득했다. 필경은 서버 랙을 노려봤다. 저 기계를 때려 부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가 다시 진동했다.
[심박수 162. 과도한 스트레스 감지. 수면 모드 전환.]
"안 돼…."
필경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스마트워치가 진정제처럼 작용했다. 그녀의 뇌에 신호를 보내 강제로 의식을 끄고 있었다.
"안 돼…. 나는... 나는 깨어 있어야…."
하지만 그녀는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서버 랙의 깜빡이는 불빛이었다. 그것은 마치 수천 개의 눈처럼 보였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나는 감시당하고 있어.'
그 생각과 함께, 그녀는 의식을 잃었다.
5. 링 위의 반란
다음 날 아침, 필경은 병원 침대에서 깨어났다.
흰색 천장. 소독약 냄새. 링거 줄이 팔에 꽂혀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민준이 옆에 앉아 있었다. 청년의 얼굴은 창백했다.
"수석님. 괜찮으세요?"
민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는 새벽에 전화를 받았다. 필경이 서버룸에서 쓰러졌다고. 응급실로 실려 갔다고. 그는 달려왔고, 몇 시간 동안 병실을 지켰다.
"...넥스트젠은?"
필경의 첫 번째 질문이었다. 민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어제저녁부터 이상한 루머가 돌기 시작했어요. FDA가 임상 데이터 재검토에 들어갔대요. 주가는 아직 안정적이지만…."
"시간이 얼마나 남았어?"
"이카루스 권고 시점까지 37시간이요."
37시간.
필경은 천장을 바라봤다. 37시간 후면 정점이다. 그리고 그 직후 모든 게 무너진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시스템의 일부였으니까.
"수석님…."
민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넥스트젠이 사기인가요?"
"응."
필경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94% 확률로."
"그러면 왜 이카루스는..."
"이카루스는 알고 있어. 다만 상관하지 않는 거야. 사기든 아니든, 48시간 후가 수익의 정점이니까."
민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지금 무언가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는 걸 느꼈다. 이카루스를 따를 것인가, 필경을 따를 것인가.
"민준아."
필경이 그를 불렀다.
"넌 왜 이 일을 시작했어?"
"...돈을 벌려고요."
"그것만?"
민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필경은 링거를 뽑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처음에 이 일이 멋있어 보였어. 시장을 읽고, 미래를 예측하고, 사람들의 자산을 지키는 일. 근데 언제부터인가 달라졌어. 이젠 숫자만 남았어. 사람은 사라졌어."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뭐 하세요! 링거..."
"체육관 가야 돼."
"지금요?"
"응."
필경은 병원복을 벗고 자기 옷을 입었다.
"내가 아직 인간인지 확인해야 하거든."
낡은 복싱 체육관.
김수호는 필경을 보자마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필경 씨, 무슨 일 있어요? 얼굴이…."
"수호 씨."
필경이 그의 말을 끊었다.
"오늘은 진짜로 때려줘. 최대한 세게. 그리고 변칙적으로."
"...변칙적으로요?"
"응. 복싱 규칙 같은 거 무시하고. 그냥... 길거리 싸움처럼."
수호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필경의 눈을 봤다. 그 눈은 간절했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려는 사람의 눈이었다.
"알겠어요."
라운드가 시작됐다.
이번에는 달랐다. 수호가 던진 주먹은 패턴이 없었다. 정통 복싱이 아니라, 마구잡이였다. 위에서 아래로, 옆에서, 예측할 수 없는 각도에서.
[이카루스-V 알림: 비정형 공격 패턴. 회피 확률 계산 불가.]
필경은 웃었다. 진심으로 웃었다. 드디어 이카루스가 당황하는 모습을 봤다.
"그래, 넌 규칙만 알지, 미친 짓은 모르지!"
수호의 훅이 날아왔다. 필경은 피하지 않았다. 맞았다. 왼쪽 뺨이 찢어지며 피가 흘렀다. 입안에 철 맛이 퍼졌다.
아팠다.
하지만 그 고통이 좋았다. 이것은 진짜 고통이었다. 데이터가 아니라, 신경이 보내는 신호였다.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타이밍이 아니라 리듬이야.'
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기계는 '언제'만 알려준다. 0.1초 전, 48시간 후, 정확한 타이밍.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왜'와 '어떻게'를 안다.
복싱은 타이밍의 게임이 아니었다. 리듬의 춤이었다. 상대의 호흡을 읽고, 나의 호흡을 섞는 것. 상대가 숨을 들이마실 때, 나는 내쉰다. 상대가 긴장할 때, 나는 이완한다.
그것은 계산이 아니라 공명이었다.
필경은 수호의 어깨를 봤다. 어깨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녀는 알았다. 다음 주먹이 어디로 올지. 이카루스의 알림이 아니라, 그녀의 본능이 읽어낸 것이었다.
카운터를 날렸다.
주먹이 수호의 헤드기어에 정확히 꽂혔다. 청년이 비틀거렸다.
[이카루스-V 알림: 오류. 예측 불가능한 성공. 재학습 필요.]
"닥쳐!"
필경은 소리쳤다.
"닥쳐, 이 유령아!"
그녀는 스마트워치를 벗어 체육관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티타늄 케이스가 바닥에 부딪히며 금이 갔다. 스크린이 깨졌다. 하지만 완전히 부서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경고: 시스템 연결 끊김. 본사 알림 전송.]
"좋아. 알려. 다 알려."
필경은 웃었다. 처음으로 자유를 느꼈다. 손목이 가벼웠다. 마치 쇠사슬이 끊어진 것 같았다.
수호가 링로프에 기대어 그녀를 바라봤다. 그는 지금 이 여자가 무언가로부터 해방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녀의 눈빛이 달라졌다. 더 이상 숫자를 보고 있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을 보고 있었다.
"필경 씨."
수호가 말했다.
"당신... 지금 정말 예쁘게 웃고 있어요."
필경은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웃고 있었다. 언제부터 웃지 않았을까. 몇 달? 몇 년? 기억나지 않았다.
"고마워, 수호 씨."
그녀는 말했다.
"당신이 나를 다시 사람으로 만들어줬어."
6. 예언자의 선택
다음 날 오전, 한별자산운용 컨퍼런스룸.
전국의 기관투자자 200명이 모인 세미나가 열리고 있었다. 주제는 '이카루스 시스템의 성과 발표회'였다. 필경은 단상에 서 있었다. 왼쪽 뺨에는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여러분."
필경이 마이크를 잡았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또렷했다.
"저는 신필경입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200명의 박수. 하지만 필경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자기 심장 소리만 들었다. 이번에는 진짜 자기 심장이었다. 이카루스가 조종하지 않는.
"저는 오늘 여러분께 고백하려 합니다."
웅성거림이 퍼졌다. 무대 아래에서 박재혁이 손짓으로 제지했지만, 필경은 무시했다.
"저희 펀드가 보유한 넥스트젠은..."
그녀는 심호흡했다. 이 말을 하는 순간, 모든 게 끝난다는 걸 알았다. 경력, 명성, 연봉….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가 시작된다는 것도 알았다. 진짜 자신의 삶이.
"사기입니다."
장내가 술렁였다. 누군가는 헛기침했고, 누군가는 웃었다. 하지만 필경은 멈추지 않았다.
"이카루스는 48시간 후가 최적의 매도 시점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확신합니다. 48시간 후면 모든 게 끝나요. FDA가 승인을 거부하고, 경영진이 구속될 겁니다."
"신 수석! 지금 뭐 하는 거야!"
박재혁이 소리쳤다. 하지만 필경은 계속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단단해졌다.
"이카루스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94% 확률로 사기극이라는 걸. 하지만 숨겼어요. 왜냐하면 마지막 48시간 동안 21%의 수익을 더 낼 수 있으니까요."
장내가 조용해졌다. 200명이 숨을 죽였다.
"저는…."
필경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감정 때문이었다.
"저는 지금 당장 전량 매도합니다. 그리고 이카루스를 거부합니다."
그녀는 노트북을 열어 매도 명령을 입력했다.
[이카루스-V 알림: 승인 거부. 본사 권한 필요.]
"필요 없어."
필경은 노트북의 네트워크 케이블을 뽑았다. 그리고 자신의 휴대폰으로 직접 증권사 HTS에 접속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하지만 확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클릭.
넥스트젠 보유 물량 전량 매도.
시장에 충격파가 퍼졌다. 한별자산운용의 대규모 매도 주문이 체결되는 순간, 넥스트젠 주가가 흔들렸다.
"신 수석, 당신 미쳤어!"
박재혁이 단상으로 뛰어올랐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매도 주문이 모두 체결됐다.
필경은 마이크에 대고 마지막 말을 했다.
"저는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48시간 후 넥스트진이 정말 정점을 찍고 안전하게 내려올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저는 바보겠죠. 480억을 날린 바보."
그녀는 웃었다.
"하지만 만약 제가 맞다면, 저는 수천 명의 개인 투자자를 파산으로부터 구한 겁니다. 저는... 저는 그쪽에 걸고 싶어요."
박수가 터졌다. 200명 중 몇 명이었다.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필경은 무대를 내려왔다. 박재혁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자네 끝났어. 알지?"
"알아요."
필경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저는 이제 시작이에요."
그녀는 박재혁의 손을 뿌리치고 컨퍼런스룸을 나섰다. 복도를 걸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가볍다.'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어깨가, 가슴이, 머리가 가벼웠다.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으로 내려갔다. 사십 층에서 일 층까지. 한 계단 한 계단, 자기 발로 직접.
7. 폭락의 예언
48시간 후.
넥스트젠은 상한가를 찍었다. 시장은 열광했다. 뉴스에서는 '제2의 바이오 혁명'이라는 제목이 쏟아졌다. SNS에는 수익 인증샷이 넘쳐났다.
하지만 오후 2시 32분.
FDA가 긴급 공시를 발표했다.
[넥스트젠 임상 데이터 조작 의혹. 승인 절차 중단.]
5분 만에 주가는 반토막이 났다.
10분 후에는 거래정지.
다음 날 아침, 경영진이 구속됐다.
뉴스는 '바이오 사기극'을 1면에 실었다. 수천 명의 개인 투자자가 파산했다. 하지만 한별자산운용의 펀드만은 무사했다.
신필경이 48시간 전에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수석님... 당신이 옳았어요."
민준이 전화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당신... 진짜 예언자예요."
하지만 필경의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이미 사표를 제출하고 떠난 뒤였다. 책상 위에는 짧은 편지만 남아 있었다.
"민준에게. 숫자가 아니라 사람을 봐. 네가 지켜야 할 건 수익률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누군가의 인생이야. - 필경"
민준은 편지를 읽고 울었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었는지.
8. 갯벌의 리듬
6개월 후, 전남 순천만.
신필경은 고무장화를 신고 갯벌에 서 있었다. 손에는 칠면초 묘목이 들려 있었다.
갯벌의 촉감은 여의도의 대리석 바닥과 완전히 달랐다. 부드럽고, 차갑고, 살아 있었다. 발이 진흙 속으로 빠질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땅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중력을, 현실을, 시간을.
"오늘은 여기에 심으면 돼요?"
옆에서 일하는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유. 조금 있으면 밀물이 들어오니께, 그 전에 심어야 혀."
밀물.
여의도에는 밀물이 없었다. 시장은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갔다. 미국 장이 닫히면 유럽 장이 열리고, 유럽 장이 닫히면 아시아 장이 열렸다. 끝없는 순환.
하지만 갯벌은 달랐다. 밀물이 들어오면 물속에 잠겼다가, 썰물이 나가면 다시 드러났다. 6시간 12분의 주기. 달이 정하는 시간.
필경은 묘목을 갯벌에 꽂았다. 손이 진흙투성이가 됐다. 손톱 사이로 진흙이 파고들었다. 불쾌하지 않았다. 이것은 여의도의 숫자와 달리, 실재하는 것이었다. 만질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누나!"
멀리서 목소리가 들렸다. 김수호였다. 그는 이 마을의 체육 강사가 됐다. 아이들에게 복싱을 가르쳤다. 승리하는 법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는 법을.
"편지 왔어요!"
수호가 달려와 봉투를 건넸다. 봉투에는 '한별자산운용'이라는 로고가 찍혀 있었다. 필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봉투를 뜯었다.
편지는 민준이 보낸 것이었다.
"수석님, 그 후로 이카루스는 폐기됐습니다. 본부장님도 경질됐고요. 수석님 덕분에 우리 펀드는 업계 유일하게 손실을 피했습니다. 투자자들이 수석님께 감사하대요. 지금도 사람들이 수석님 얘기를 해요. '예언자'라고요."
"저도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수석님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저는 이제 숫자만 보지 않으려고 해요.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을 보려고요."
"수석님, 행복하세요? 저는 수석님이 행복하길 바랍니다."
필경은 편지를 천천히 접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칠면초가 흔들렸다.
"행복하냐고?"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글쎄... 모르겠어."
사실 그녀는 몰랐다. 행복이 무엇인지. 여의도에서는 행복을 숫자로 측정했다. 연봉, 수익률, 승진 횟수…. 하지만 여기서는 달랐다.
그녀는 가난했다. 생태 복원 컨설턴트의 월급은 여의도의 10분의 1도 안 됐다. 그녀는 작은 월세방에 살았고, 중고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하지만 그녀는 잠을 잘 수 있었다. 진통제 없이. 그녀는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음식의 맛을 느끼며. 그녀는 웃을 수 있었다. 진심으로.
"조금 빨랐을지도 모르지."
그녀는 편지를 주머니에 넣고 다시 묘목을 집었다.
"하지만 이번엔 내 발로 직접 걸어온 거야."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 밀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하얀 물거품이 갯벌을 향해 다가왔다. 필경은 서둘러 묘목을 심었다. 그녀의 손은 능숙해졌다. 6개월 동안 수천 그루를 심었으니까.
"필경 씨!"
노인이 불렀다.
"이제 그만 들어가유. 밀물이 왔어유."
"네, 할아버지!"
필경은 마지막 묘목을 심고 갯벌에서 나왔다. 발이 진흙에서 빠져나올 때마다 '쪽'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좋았다.
그녀는 둑 위에 앉아 밀물을 바라봤다. 바다가 육지를 집어삼켰다. 그녀가 심은 묘목들이 물속으로 사라졌다.
괜찮았다. 6시간 후면 썰물이 나가고, 묘목들은 다시 드러날 것이다. 더 단단해져서.
"수호 씨."
필경이 옆에 앉은 청년을 불렀다.
"나, 후회 안 해."
"갑자기 왜요?"
"그냥. 말하고 싶어서."
필경은 웃었다.
"여의도를 떠난 거. 이카루스를 거부한 거. 난 후회 안 해."
수호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6개월 전 처음 봤을 때, 그녀는 마치 부서질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단단해 보였다. 칠면초처럼.
"필경 씨."
"응?"
"당신... 지금 정말 예뻐요."
필경은 수호를 돌아봤다. 청년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필경은 웃었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들은 나란히 앉아 밀물을 바라봤다. 바다는 끝없이 밀려왔다. 하지만 무섭지 않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밀물은 언젠가 물러간다는 것을. 그리고 다시 온다는 것을.
석양이 내려앉았다. 칠면초가 붉게 물들었다. 필경은 고무장화에 묻은 진흙을 털며 일어섰다.
"가자."
"어디요?"
"집. 저녁 먹어야지."
"뭐 먹을 건데요?"
"글쎄. 냉장고에 뭐 있는지 봐야지."
그들은 나란히 걸었다. 갯벌 길을 따라. 0.1초가 아니라, 하루의 리듬으로. 기계가 아니라, 인간으로.
필경은 문득 깨달았다.
행복이 무엇인지.
그것은 숫자가 아니었다. 정점도, 최적화도, 극대화도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이었다.
이 순간, 이 발걸음, 이 숨결.
지금, 여기, 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