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사와 대한매일신보 터를 찾아서

보성사와 보성학교 / 대한매일신보와 중동학교 / 용동궁지와 숙명여학교

by 정순동


경복궁을 찾아가다 서울지방국세청과 국민은행 세종로 지점 사이에서 목은 이색 선생 영당 가는 길을 알리는 이정표를 발견한다. 목은 이색은 고려의 제도 개혁에 앞장섰던 성리학자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을 쫓아내자, 창왕을 즉위시켜 고려왕조를 지키려 했지만 실패하고 유배된다.

목은 이색 선생 영당

골목을 들어선다. 솟을대문에 '목은선생영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종로구 수송동 한산이씨 대종회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 고려 말의 대표적 충신으로 정몽주, 길재와 함께 '여말삼은(麗末三隱)'으로 불리던 이색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영정(보물 제1215호)이다. 마당을 쓰는 소리가 들린다. 관리인은 영당을 개방하지 않는다고 한다.



기미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 옛 터에서


영당 옆에 작은 쌈지공원이 있다. 도심 한가운데 빌딩으로 싸인 수송공원이다. 다소 산만할 정도로 여러 개의 표지석과 기념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이들은 이곳의 역사적 가치를 알려준다. 이 좁은 공간에 어떻게 보성사, 대한매일신문, 여러 학교가 함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들은 시ㆍ공간을 조금씩 달리하며 시대 상황의 변화에 따라 변천해 왔다.


구한말에 신문이 등장한다. 신문을 통해 격변하는 사회의 이슈들이 일반 국민에게 알려지게 된다. 신문은 여론을 형성하고 이를 확산시켜 사회운동의 동력이 된다. 그 중심에 보성사와 대한 매일신보가 있었다.

옥파 이종일(1858~1925) 선생의 상

공원에는 옥파 이종일(1858~1925) 선생의 상이 우뚝 서 있다.

왼손에 신문을 들고 오른손을 불끈 쥐어들었다. 그는 1898년 '제국신문(帝國新聞)'을 창간한다. 기미년, 3·1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을 발행한다.


보성사 옛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또, 보성사를 기념하는 '3인의 군상과 민족정기'라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높이가 약 6m에 이른다. 수송공원 동쪽의 기와 담장 안이 조계사다. 조계사는 옛 보성사와 보성학교가 있던 곳이다.


여기서 보성학교와 보성사에 대해 살펴본다.

1906년 고종의 측근이었던 이용익(李容翊)은 한성부 중부 박동(지금의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보성중학교를 설립한다. 1910년 한일병탄 후 학교가 경영난에 빠지자 경영권을 천도교에 인계한다. 1913년 일제 당국에 의하여 보성학교로 개칭된다. 훗날 여러 차례 학제 개편에 따라 현재의 보성 중고등학교가 된다.


보성사는 보성학교의 부설 인쇄소였다. 1910년 말 천도교에서 보성학원의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보성사는 천도교 관계 서적 및 교회 기관지를 간행하던 천도교 중앙 교당의 인쇄소 창신사와 합친다. 명칭은 그대로 보성사라 하였다.


1919년 3·1 만세운동 때 발표한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이 보성사다.

그 해 2월 27일 사장 이종일은 (공장 감독 김홍규, 총무 장효근과 함께)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를 총 2만 1000부 인쇄하여 다음날 전국 각지에 보낸다. 이로써 3·1 만세운동이 예정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 일제는 보성사를 즉각 폐쇄하고, 1919년 6월 28일 밤에 불을 지른다. 이후 터만 남아 오늘에 전한다.

기미독립선언문, 소장 / 독립기념관


"3인의 군상과 민족정기"는 화강석과 청동으로 만들어져 있다. ​

여기에서 3인은 특정 인물이 아니다. 상단부 청동 구조물은 기미독립선언서를 하늘로 치켜들고 있는 상징적인 인물들의 모습으로 민족의 기상과 단결을 의미하고 있다.

3인의 군상과 민족정기

하단부의 석재 조형물에는 보성사의 옛 모습과 3·1 운동 장면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보성학교 정문 오른쪽 홰나무 뒤에 지붕만 보이는 건물이 보성사다. 조계사 경내에 그 홰나무가 아직 남아 있다.

"3인의 군상과 민족정기" 하단부의 석재 조형물에 새겨진 보성사의 옛 모습(상)과 3·1 운동 장면(하)

음각으로 새겨진 기미독립선언서 밑의 석판은 3.1 운동이 우리 민족사의 초석이 되었음을 상징한다. 이 조형물을 위에서 보면 태극 문양을 하고 있어 민족의 얼을 상징하며, 민족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영욕이 교차한 '정론직필의 산실' 옛 대한매일신보 터​

옥파 이종일 선생 상 너머 공원의 북서쪽 가장자리에 '대한매일신보' 창간 사옥 터 표지석이 있다. 지금 연합뉴스가 들어서 있는 자리가 옛 대한매일신보 터다.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7월 18일 영국 출신의 언론인 베델(裵說, 1872 ~1909)과 양기탁(梁起鐸, 1871~1938)이 함께 창간한 일간지다. 국한문판과 한글판, 영문판을 합쳐 1만 3,000여 부를 발행한 당시 가장 영향력이 큰 신문이었다.

'대한매일신보 창간 사옥 터' 표지석

대한매일신보는 칼날 같은 정론직필의 예리한 필봉을 휘둘러 일제의 침략 행위를 규탄한다.

일제의 탄압이 심했던 때지만, 발행인 베델이 가지고 있던 치외법권적 지위와 항일 투쟁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던 언론인 양기탁의 소신이 환상적인 조합을 이루어 독자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다. 독자들의 올바른 가치관과 세계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베델은 한국 언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독립 유공자다.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고종의 친서를 '대한매일신보'와 '런던 트리뷴(London Tribune)'지에 게재하는 등 활발한 항일 언론 활동을 벌였던 베델은 1909년 5월 심장병으로 사망하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혔다.


대한매일신보는 경술국치 후, '매일신보'로 바뀌어 총독부 기관지로 전락한다.

일제가 대한매일신보의 제호를 '매일신보'로 바꾼 후, 베델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공동 창간한 양기탁의 합류를 설득한다. 양기탁은 이를 거절하고 독립운동의 길로 나선다.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 8월 28일 지령 1461호를 끝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일제가 만든 매일신보는 대한매일신보의 지령을 이어받고, 해방 후 서울신문이 그 지령을 이어받지만 일본 총독부의 기관지, 독재 정권의 기관지로서의 오욕은 점철된다.


그 후 서울신문은 '매일신보의 역사'를 도려내고 제호를 ‘대한매일’로 바꾸기도 하고 ‘서울신문’으로 재환원하기도 하였지만 '대한매일신보'의 역사성을 계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간의 오욕을 깨끗이 씻어내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숙명, 보성, 중동학교의 옛 터​

소송공원의 많은 표지석의 또 다른 한 축은 민족학교 옛 터다.


대한매일신보가 시청 앞으로 옮겨가고, 중동학교가 이곳에서 문을 열었다. 1906년 5월 10일 관립 외국어학교 내의 교실 3개를 빌어 한학, 산술을 가르치는 야학으로 시작했다. 1907년 중동 야학교라 칭했고, 중동고등학교의 전신이 된다.

'중동학교 옛 터' 표지석

중동학교와 담장을 이웃하고 숙명여학교가 며칠 사이에 개교한다. 숙명여학교의 역사는 용동궁터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용동궁터(龍洞宮址)는 조선 왕실의 별궁으로 조선 명종의 장남 순회세자가 살았던 곳이다. 순회세자가 13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용동궁은 덕빈 윤 씨의 사유 재산으로 내려오다가 훗날엔 사도 세자빈 혜경궁 홍씨와 효명 세자빈 신정왕후 조 씨의 궁으로 이어진다. 고종 때에는 명성왕후의 친척 민겸호, 고종의 정치고문 독일인 묄렌도르프가 살았으며, 독일 공사관이 있었던 때도 있다.

'숙명여학교 옛 터'표지석

1905년(광무 9년) 이후로 용동궁은 비어있다가, 고종의 후궁인 순헌왕귀비 엄 씨의 소유가 된다. 교육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순헌왕귀비는 용동궁 자리에 명신여학교를 설립했다. 숙명여학교의 전신이다. 학제의 변경으로 여러 차례 교명이 바뀌어 오늘날의 숙명여중과 숙명여고가 된다. 숙명여중고가 1980년 강남구 도곡동으로 옮긴 이후, 현재 용동궁 터에는 대한재보험공사의 코리안리재보험빌딩과 대한석탄협회의 석탄회관 빌딩이 들어서 있다.

언론인의 사명과 민족교육을 생각한다.

중동고등학교도 1984년 강남으로 이전하고 옛 대한매일신보 터에는 ‘연합뉴스’가 들어와서 '대한매일신보'와 '보성사'의 장소성을 계승하고 있다. 단순한 공간의 계승이 아니라 대한매일신보의 정론직필의 정신과 이종일 선생의 언론인으로서의 사명감을 이어받길 기원한다. 장소는 옮겨 갔지만, 사학 역시 민족교육으로 민족학교의 전통을 이어가길 바란다. (2022.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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