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과 중앙청, 그리고 광화문 광장

경복궁 1

by 정순동


목은 영당을 나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로 간다. 고려의 몰락과 조선의 건국을 생각한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을 강화로 쫓아내고 정권을 장악했다. 목은이 조민수와 함께 창왕(昌王)을 옹립하고 이성계 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지만 새 나라 건국의 대세를 막지는 못했다.


이성계는 1392년 7월 17일(음)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운 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결정했다. 한양(서울)을 도읍지로 삼고, 왕의 조상을 모시는 ‘종묘’와 왕실 가족의 주거공간이며 나랏일을 돕는 신하들이 일하는 공간인 ‘궁궐’ 짓는 일을 가장 먼저 시작했다. 태조 3년 (1394) 신도 궁궐 조성도감을 설치하고, 그해 12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다음 해 9월에 완공한다. 계획부터 완공까지 종묘와 궁궐을 짓는 데 걸린 시간은 10개월 정도다. 경복궁 입주는 1395년 12월 28일에 하였다. 태조 5년 (1396)에는 경복궁 궁성 축조도 완료하고 궁궐의 이름을 ‘경복궁’이라고 지었다.




넓게 펼쳐진 육조거리(세종로)를 거쳐 광화문에 닿는다. 육조거리는 왕도 한양의 도시 계획 중심이었다.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광화문은 조선의 법궁에 해당하는 경복궁의 남문으로 정문이다. 이 위상에 걸맞게 다른 궁궐들의 정문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중층 구조의 누각을 올려, 흡사 성문과 같이 장대하게 지어졌다.

1906~1907년 광화문 앞 풍경, 출처 : 국립민속박물관

처음에는 방위에 맞춰 그냥 오문(午門)이라 하였다. '닫아서 이상하고 쓸데없는 말은 못 들어오게 하고, 열어서 사방에서 어진 이가 오가는 정문'이라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1426년(세종 8)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光化門)'으로 이름을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광화문은 '왕의 큰 덕(德)이 온 나라와 백성을 비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광화문은 윗부분을 반쯤 둥글게 무지개 모양으로 만든 세 칸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운데 문은 왕이, 좌우의 문은 왕세자와 신하들이 출입하였다. 홍예문 위 양쪽에 작은 해태 두 마리가 앉아 있다. 이 역시 홍예문 출입을 단속하는 의미로 세운 것이리라. 그러나 지금은 홍예문 세 칸 모두 일반인이 통행할 수 있다. 또한 문루(門樓)에는 시각을 알리는 종이 설치되었다.

광화문

광화문 좌우에 ‘해태'라고 하는 호랑이처럼 생긴 조각상이 있다. 지난 9월부터 시작한 광화문 월대 복원을 위한 발굴 공사 가림막에 가려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상상의 동물인 해태는 사람들의 잘잘못을 가려서 잘못이 있는 사람에게는 머리에 난 뿔로 들이받는 벌을 주었다고 한다. 원래는 광화문 앞에서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가마나 말을 타고 가던 왕 이외의 사람들은 해태 앞에서 내린다. 걸어서 궁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아마 범마(犯馬)를 막기 위한 하마비 역할을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또 궁궐 안팎을 감시할 수 있도록 궁성 담장 끝 동쪽과 서쪽의 양 모서리에 각각 동십자각(東十字閣)과 서십자각(西十字閣)이란 각루를 세웠다. 동십자각은 궁성 담장이 헐리면서 지금과 같이 길 한가운데 서있게 되었고, 서십자각은 일제 강점기 때 헐려 도로가 되었다.

동십자각, 출처 : 궁능유적본부 경복궁 관리소


흥례문과 조선총독부(훗날 중앙청)


세종로(서울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쪽에서 온 우리는 광화문으로 들어간다. 멀리 흥례문이 보이는 널찍한 광장에 형형색색 한복을 차려입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흥례문

푸른색, 붉은색 관복을 입고 창으로 무장한 수문군들이 광화문 파수의식(하루 두 번 11시, 13시 10분간)을 막 마치고 수문장청으로 들어간다. 하루 두 번(10시, 14시) 20분간의 수문장 교대의식도 이곳에서 한다. 조선시대 수문장은 도성과 궁궐의 문을 지키는 책임자였다. 수문장청에 신청하면 관람객이 수문장 복식을 직접 입고 사진촬영을 할 수 있다.

수문장 교대의식, 출처 : 궁능유적본부 경복궁 관리소

국립고궁박물관이 있는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5번 출구로 나온 사람들은 서쪽 용성문으로, 승용차를 이용한 사람들은 동쪽 협생문으로 이곳에 들어온다. 매표소도 여기에 있어 흥례문이 실질적인 경복궁 정문 역할을 하고 있다.

광화문은 임진왜란 경복궁이 불타면서 함께 소실된다. 흥선대원군이 왕조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1865년(고종 2) 경복궁을 복원한다. 하지만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하고, 1916년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인 이곳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광화문은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모두 소실되고, 석축은 탄흔으로 상처투성이가 된다.


한편 조선총독부 청사는 일본의 태평양전쟁 항복문서 조인 장소로, 미 군정청 청사로 사용된다. 일제가 조선의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 해방 후에도 중앙청으로 이름만 바꿔 계속 정부 청사로 활용됐다. 심지어 대한민국의 헌법이 공포된 곳도 이 건물이고, 그 앞뜰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을 가진다. 정부 수립 후에는 대한민국 정부청사(중앙청)로 사용되다가 국립중앙박물관이 된다.

중앙청(구 조선총독부), 출처 : 국가기록원


광화문이 복원하면서 광장을 만든다.


그 후 1968년에 광화문은 경복궁 정문의 위치로 다시 옮겨져 중앙청 건물을 가리게 된다. 그러나 목조 건축물이 아니라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한다. 이 과정에 광화문의 축을 경복궁의 중심에 맞추지 않고, 중앙청(조선총독부 청사)의 축에 맞추어 재건하는 바람에 원래의 축과 3.8도 정도 방향이 틀어진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앉은 자리도 원 위치보다 14.5m 가량 물러난 자리에 서있게 되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관악산을 바라보던 근정전의 축과는 달리 남산의 일본 신사를 바라보게 지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95년 8월 15일,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으로 중앙청(조선총독부 청사)은 철거된다. 현재의 광화문은 2010년에 원래의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아서 다시 복원한 것이다. 광화문 기둥은 강릉에서 벌목한 금강송을 사용하였고, 박정희가 쓴 광화문 현판은 떼어내고 디지털 복원을 통한 흥선대원군 당시의 현판을 걸게 되었다.

촛불집회, 출처 : 매일노동신문, 민중 총궐기 사진공동취재단

광화문을 복원하면서 육조거리에 광화문 광장을 만든다. 그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 혁명이 일어난다.

그러나 2008년 5월 27일 착공에 들어가 2009년 8월 1일에 개장한 광화문 광장은 세종대로 중앙에 섬처럼 떠있는 '거대한 중앙분리대'라는 비판을 받는다. 박원순 시장은 이를 전격 수용하고 재조성을 시작한다. 광장 조성 계획 초기부터 승효상과 유홍준이 제안한 (광장을 세종문화회관과 정부청사 쪽으로 붙이는) 안이 채택되어 2022년 8월 재개장하였다.

광화문 광장, 출처 : 연합뉴스

이제 광화문 앞의 월대와 해치상을 복원하고 육조 거리 문화재 발굴 유구의 노출 및 상부 재현이 실현되어 새로운 상징적 광장으로 거듭 태어나게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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