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경회루에 왔습니다. '더불어 기쁘게 만난다.'라는 의미를 가진 경회루는 임금과 신하가 만나서 연회를 하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입니다. 한마디로 '경복궁의 꽃'과 같은 곳이지요."
경회루. 정면 7칸, 측면 5칸. 단일 누각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누각이다. 누마루의 넓이가 298평이나 되며 1,200명이 연회를 한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경복궁을 창건한 초기에는 경복궁 서북쪽의 습지에 작은 누각이 세워져 있었다.
기쁘게 만나는 연회공간, 경회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집권한 태종은 경복궁에 들어가는 것을 꺼려합니다. 형제간의 골육상쟁을 한 곳이고 정적인 정도전이 주도하여 세운 궁이니, 그 마음을 이해할만하지요. 그래서 기거와 국정의 공간은 창덕궁에 새로 마련하고, 경복궁에 행사와 연회의 공간인 경회루를 지어 법궁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합니다."
태종 12년(1412) 경복궁을 수리하고, 서쪽으로 옮겨 못을 파고 4 각형의 인공섬 위에 큰 누각을 세웠다. 하륜이 경회루라는 이름을 짓고 경회루 기문을 적었고, 세자 양녕대군이 현판의 글씨를 썼다. 경회루 공사는 공조판서 박자청에 맡겨 완공했다.
박자청은 개국공신 황희석의 가신인 미천한 신분 출신이지만 태조와 태종, 세종 3대에 걸쳐 임금의 신뢰를 받은 인물이다. 성균관 문묘 건설과 건원릉(태조 능), 제릉(태조 왕비 신의왕후 능)의 산역을 주관하여 그 능력을 인정받아 공조판서에 오른다.
경복궁 수리, 청계천 호안공사, 경회루 공사를 완수한 조선 초기 토목건축 분야의 최고 기술자였다. 한양의 실제 모습을 그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위대한 토목 기술자는 대신들의 수많은 견제 속에도 끝까지 자신을 믿어준 태종의 헌릉을 조성한 다음 해 치열했던 삶을 마감한다. 세종은 제문을 손수 써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익위공'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경회루는 사신의 영접, 종친 간의 연회, 유생들의 시험장,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 등으로 이용된다. 1429년 중수되었고, 1475년 고칠 때 48개의 돌기둥에 꽃과 구름 속의 용을 새겼다. 연산군 때 경회루 서쪽 만세산을 화려하게 치장하여 배를 타고 만세산을 오가며 흥청망청 연회를 열었다고 한다. 중종 때 다시 제 기능을 회복했으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소하고 아래층 돌기둥만 남는다.
흥선 대원군의 경회루 복원
270여 년 폐허 상태로 있다가 1865년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공사 때 복원을 시작해 1867년 완공된다. 양녕대군의 현판은 소실되고, 추사 김정희의 제자 신헌이 현판 글씨를 다시 썼다. 앞면 7칸, 옆면 5칸의 중층 건물로, 팔작지붕인 이 건물은 48개의 민흘림 돌기둥(밑동은 굵고 위로 올라가면서 직선으로 가늘게 한 기둥)이 상층 목조 부분을 받치고 있다. 바닥에는 방전을 깔았고, 우물천장을 아름다운 단청으로 꾸몄다.
"경회루의 중요한 건축적 특징은 '주역'의 이론을 적용하였다는 점입니다. 신선의 세계로 만들려고 했지요. 1층에 48개의 기둥이 있습니다. 안 밖의 기둥 모습이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 것 같아요."
"밖에 것은 각이 지고 안의 것은 둥그네요."
"그렇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고 생각했습니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관념이 깃들어 있습니다. 집을 짓고 기둥을 세우면서도 그곳에 하늘과 땅, 우주의 원리를 담으려 했던 철학적인 면모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경회루 이층은 마루가 깔려 있습니다. 그 바닥의 높이가 3단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정면 7칸, 측면 5칸으로 총 35칸의 가운데 세 칸이 가장 높습니다. 그 세 칸을 둘러싼 12칸은 한 뼘쯤 낮고, 그 바깥을 두른 20칸은 또 한 뼘 더 낮습니다."
높이가 다른 3 구역의 경계에 복합문(젖혀서 들어 올리는 문)이 달려 있다고 한다. 이 문을 올리고 내림에 따라 터진 공간이 되기도 하고 닫힌 방이 되기도 한다. 이 내부 구조에도 임금과 왕실의 전용 공간임은 드러나 있는 셈이다.
"당연히 맨 위 가운데가 임금의 자리지요. 내려오면서 신분과 지위에 따라 자리가 정해집니다. 보이지 않는 공간을 설명드리니 재미가 없지요. 봄에서 가을까지 특별관람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관람을 신청하시면 경회루에 올라가서 아름다운 주변 경치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경회루는 4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7개월간 1일 4회 10시, 11시, 14시, 16시 (매회 20명, 화요일 제외) 특별관람 신청을 받고 있습니다. 인터넷으로만 사전 예약이 가능합니다."
다시 옛이야기로 돌아간다. 경회루는 커다란 연못 가운데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지은 누각이다. 구조를 살펴보면 섬은 동쪽 편으로 육지와 돌다리 셋으로 연결되어 있다. 다리 반대편 섬의 서쪽에는 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배를 타는 곳이다.
예전에는 연못 가장자리에 담장이 둘러싸고 있었다. 경회루의 동쪽에 연결된 다리 쪽으로 함홍문, 서쪽으로 천일문, 남쪽에 경회문이 있었지만, 왕의 허락 없이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었다.
경회루의 아름다움에 얽힌 설화
문장이 뛰어나고 역학과 경학에 밝았던 구종직이란 인물이 교서관의 종 9품 하급 관리로 궁궐에서 숙직을 하다가 몰래 경회루 담을 넘는다. 경회루의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궁금증이 생긴 것이다. 야음을 틈타 경회루를 몰래 구경하던 구종직은 산책 나온 세종을 만나 황급히 임금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이제 죽었구나'했는데 구종직의 신분과 밤중에 경회루에 나와 있는 연유를 물은 임금은 난데없이 "경전을 외울 줄 아느냐?"라고 묻는다. 구종직은 '춘추'한 권을 막힘없이 단번에 외운다. 이를 듣고 세종은 크게 감탄하여 바로 다음날 구종직을 종 5품의 부교리에 임명하였다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모르겠으나 경회루가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경회루지만 그 화려함 뒤에 슬픈 역사도 함께 품고 있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옥쇄를 넘겨준 곳이다. 이를 지켜본 성삼문과 박팽년이 훗날 단종 복위를 도모하지만 실패하고 죽임을 당하고, 단종 역시 사약을 받는다.
경회루는 경복궁의 수난사와 함께 여러 차례 수난을 겪는다. 일제는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 건물을 헐면서도 경회루는 남겨둔다. 조선총독부 2대 통감 환영연을 여기서 연다. 이러한 수모를 겪은 경회루는 해방이 되자 일반에게 공개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5.16 쿠데타로 수경사 30 경비단이 주둔하면서 다시 일반인 통제구역이 된다. 이러한 아픔 끝에 참여 정부 때인 2005년 6월 1일부터 일반인 관람이 시작되었다.
경회루 출입문
요즘 관람객이 경회루를 탐방하려면 보통 근정전의 서쪽 문을 통해 바로 들어온다.
"저기 담장이 보이지요. 옛날에는 서쪽과 남쪽도 다 담장으로 막혀 있었습니다. 동쪽 세 개의 문이 보이지요. 강녕전이나 교태전에서 출입하는 문입니다. 왕이 출입하던 문은 어느 문일까요? 가운데 문일까요?"
"여기가 더 웅장해 보이네."
강녕전과 교태전에서 경회루로 들어가는 세 개의 다리마다 출입문이 설치되어 있다. 제일 남쪽에 있는 문이 '이견문(利見門)'이다. 다른 다리보다 폭을 넓다. 가운데 어도가 있다. 이 문이 임금이 출입하는 문이다.
"이견문은 '대인을 만나 본다'라는 뜻으로 '하늘에 나는 용이 있으니 좋은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좋은 신하들을 두어야 한다'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보는 경치가 참 아름답습니다. 사진 한 장씩 찍으시지요. 문 사이로 보이는 인왕산이 문과 잘 아울립니다."
세자와 종친이 출입하는 가운데 문인'함홍문(含弘門)'은 너그럽게 포용한다'라는 뜻이다. 북쪽의 문은 '만물이 여기에서 비롯된다'라는 뜻을 가진 '자시문(資始門)'으로 신하들과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출입하는 문이다.
경희궁 연못 출토 용,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자시문에서 보면 연못 가의 북쪽 담장에 바짝 붙은 육모지붕을 얹은 하향정(荷香亭)이 보인다. 이 정자 앞 연못을 청소하다가 구리로 만든 용 한 마리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이 용은 경회루를 세울 때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연못에 넣은 구리로 만든 용 두 마리 중 하나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그리고 하향정은 흥선 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의 모습을 그린 북궐도에 없는 건축물이다. 조선의 마지막 목수로 불리는 배희한 대목장(大木匠)이 1959년 지은 13.8㎡ 규모의 정자다. 이승만 대통령의 휴식을 위한 공간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광나루에서 낚시를 하던 중 방귀를 뀌자 옆에 있던 당시 경기도지사였던 이익흥 내무장관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하고 아부했다"라는 이른바 ‘이승만 대통령 방귀사건"이 세인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다.
이 장관은 사실을 부인했고, 이 대통령과 이 장관은 사망했으니 폭로의 진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대통령이 낚시를 자주 했던 것은 사실인가 보다. 이승만 대통령이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하향정에서 낚시하는 사진이 '나무위키'에 게재되어 있다.
이 사진은 경복궁의 원형을 훼손한 하향정의 철거논란에 불을 붙인다. 김영삼 정부의 경복궁 복원사업 당시 격렬한 논쟁 끝에 철거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하향정은 '부당한 권력으로 문화재를 훼손한 이승만의 개인 낚시터'라는 부정적 의견도 있었지만, '존치해도 경복궁과 조화를 이룰 것'이라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