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화당과 집경당. 자경전을 나와서 건청궁으로 간다. 서쪽에 교태전과 향원정 사이에 독립된 영역의 건물 군이 보인다. 바로 보이는 쪽의 건물은 집경당이고, 보이지 않는 인왕산 쪽의 건물이 함화당이다.
함화당과 집경당
"주변이 후궁 영역이니 후궁들의 거처였을 것으로 추측할 뿐, 두 전각의 용도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고궁 문화체험, 온돌방 체험 및 세배드리기 행사의 공간으로 쓰이기도 하고, 소규모 회의장이나 교육장으로 사용하기도 한답니다."
북악산을 바라보며 향원지로 가는 길에 눈이 덮여 있다.
향원정과 취향교
고종이 건청궁을 지으면서 후원 일대(함화당과 집경당의 북쪽, 건청궁의 남쪽)에 향원지라는 연못을 조성한다. 천원지방 사상에 따라, 연못은 사각형이고 가운데에 둥근 섬을 만들었다. 이 섬에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라는 뜻의 향원정을 세웠다.
향원지. 천원지방 사상에 따라, 연못은 사각형이고 가운데에 둥근 섬을 만들었다.
향원정(香遠亭). 향원정은 익공식 기와지붕인 2층 누각으로 평면이 정육각형이다. 장대석으로 계단을 만들고 육모의 짧은 돌기둥이 세워져 있다. 기둥은 1층과 2층이 하나의 나무로 되어 있다.
향원정
취향교. 향원정에서 건청궁 쪽으로 건너는 다리가 있다. '향기에 취한다'라는 뜻의 취향교(醉香橋)이다. 한국전쟁으로 파괴되어 남쪽에 새로 만들었다가, 2021년 고증을 통해 원래의 위치인 북쪽에 복원되었다.
취향교는 2021년 11월 고증을 통해 원래의 모습으로 북쪽에 복원되었다.
궁궐 속의 궁궐, 건청궁
"1863년(철종 14), 철종이 후사 없이 요절합니다. 고종은 신정왕후 조대비의 양자로 입적되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지만, 고종이 15세가 되던 1866년(고종 3)까지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연이어 고종의 생부 흥선 대원군이 섭정을 합니다. 1873년 최익현의 탄핵 상소로 흥선 대원군이 실각된 후, 고종은 비로소 친정을 하게 됩니다. 즉위 10년이 지나 22세가 된 해였지요."
건청궁 정문
"아버지 흥선대원군으로부터 홀로서기를 선언한 고종은 경복궁 동북쪽 가장 깊은 곳에 궁궐 속의 궁궐을 짓기 시작했어요. 비밀리에 시작한 공사지만 금방 알려지게 마련이지요. 대신들은 공사 중단을 진언하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고종은 '공사비용은 국가 재정이 아니라 내탕금(임금의 판공비)을 사용하고 검소하게 짓겠다'라며 뜻을 꺾지 않았습니다. 자 건청궁으로 들어갑시다."
건청궁 현판은 청나라 전영의 글씨이며, 진품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건청궁(乾淸宮)의 ‘건청(乾淸)’이란 ‘하늘은 맑다’는 의미이고, 선대 임금의 어진을 봉안할 목적으로 지어젔다. 그러다가 갑신정변 이후 고종과 명성왕후의 생활공간으로 사용된다.
장안당
"건청궁은 양반 사대부 가옥의 건축 형식을 궁 내에 재현한 99칸의 건물입니다.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되어 있고요. 먼저 왼쪽 초양문을 통하여 사랑채로 들어갑시다."
정면의 초양문을 통해 장안당으로 출입한다.
장안당(長安堂)은 고종이 기거하던 곳이다. '오랫동안 평안하다'는 뜻의 장안당은 27칸, 측면 3칸, 7량(집)의 건물인데, 행각이 딸려 있다. 특히 북행각은 조선 최초로 전깃불을 밝힌 곳이다. 미국 에디슨 전기회사가 1887년 발전기를 설치했다.
고종의 거소, 장안당과 추수부용루. 아름다운 한옥을 지었지만 고종과 명성왕후는 오래 기거하지는 못한다.
"장안당의 현판은 고종의 친필입니다. 우측 상단에 어필(御筆)이라는 글씨가 씌어 있지요."
왼편으로 "추수부용루"(秋水芙容樓)가 이어져 있다. '가을 물속의 연꽃'이란 서정적인 이름의 이 누각에 오르면 그림 같은 연못 속의 향원정을 바라볼 수 있다.
장안당과 왕후의 거소는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다시 초양문으로 돌아 나온다.
곤녕합
함광문(含光門)을 지나면 안채에 해당하는 명성 왕후의 거소, 곤녕합(坤寧閤)이다.
명성왕후의 거소, 곤녕합
남쪽 누각에는 ‘옥호루’(玉壺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동쪽 누각에는 ‘사시향루’(四時香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옥호(玉壺)는 '옥으로 만든 호리병(깨끗한 마음)을 뜻한다. 사시향루(四時香樓)는 '사철 끊이지 않고 꽃향기'를의미하고.
"옥호루는 1895년 일본인 자객의 칼에 명성왕후 민비가 시해된 가슴 아픈 현장입니다."
옥호루와 사시향루. 옥호루는 명성왕후 시해된 을미사변의 현장이다. .
을미사변(명성왕후 시해 사건)과 건청궁의 운명
청ㆍ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견제한다. 이를 본 명성왕후는 러시아에 의지하여 반일 정책을 펼친다. 불안해진 일본은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주도로 명성왕후 민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를 을미사변이라 한다.
을미사변 이듬해(1896년)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망명한다. 아관파천으로 건청궁은 그 기능을 상실한다. 1909년, 일제는 궁을 헐어버리고,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짓는다. 해방 후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 철거된다.
그리고 근 100년이 지나 건청궁은 복원된다.
2007년 개문식에서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은 '하나를 짓더라도 제대로 짓겠다는 각오로 복원했다'며 '21세기 들어 가장 잘 지은 한옥'으로평가한다.
"여러분 추운 날씨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저와의 시간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
해설사는 시간이 있으면 집옥재도 둘러보고 북문(신무문)으로 나가서 서쪽 담장을 따라 산책하길 권한다. 추위에 몸이 꽁꽁 얼었다. 우리는 다음날을 기약하고 여기서 일정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