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선생 LA에 잘 도착했습니까? 며칠 전 옛 동지들이 자리를 함께 하여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임에서 김 선생을 만날 수 있을까 하고 기대했는데 참석하지 않아 서운했습니다.
나는 요즘도 산으로 들로 골목으로 걷고 있습니다. 오늘은 제주곶자왈도립공원에 왔습니다. 곶자왈은 여전히 뭍에서 온 사람들에겐 낯선 말입니다. 언젠가 김 선생이 곶자왈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을 때 나는 무척 당황했습니다. 아는 것 같은데 막상 설명을 하려니 막연했습니다.
작고하신 김 선생의 어머니께서 사학민주화운동을 하던 김 선생에게 '와 데모를 하노. 너거 이사장이 니 월급을 안 주더나'고 물었을 때 설명하기 쉽지 않았다던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곶자왈을 제대로 정리해 보자는 마음에 이 편지를 보냅니다.
곶자왈
숲의 천이
제주는 화산섬이지 않습니까. 이곳은 화산이 폭발하여 용암이 흘러내리고 화산탄과 화산재가 날아와 온통 돌과 바위로 덮였을 것입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흙 한 줌 보이지 않고 습기가 적은용암의 틈새에서 자랄 수 있는 것은 소수의 지의류와 이끼뿐입니다. 이와 같이 빗물이나 용암으로부터 녹아 나오는 무기 염류를 흡수하여 살아가는 천이의 첫 번째 식물인 지의류를 ‘개척자’라고 합니다.
지의류
지의류가 생기고 이끼가 끼고 그 이끼가 습기를 머금자 풀씨가 날아와 싹을 틔우고 뿌리가 내려 돌 틈을 메웁니다. 한해살이풀, 두해살이풀에 이어 여러해살이풀인 억새나 띠 등의 종자식물이 침입하여 풀이 무성해져 초원이 형성됩니다. 그 억새밭에 가시덤불이 들어서면 거기서부터 숲이라 합니다. 길을 가다가 가시덤불이 쳐져 있으면 아 저건 숲을 보호해 주는 수위대구나 생각하면 됩니다.
신평무릉곶자왈 새왓
처음에는 어릴 때 빛을 많이 받아야 잘 자라는 소나무와 같은 양수림 숲이 형성됩니다. 숲의 아래층에는 빛을 적게 받아도 잘 자라는 졸참나무, 종가시나무, 서어나무, 전나무, 동백나무 등음수림이 자라지요. 이 음수림이 점차 키가 크면서 소나무, 자작나무, 낙엽송과 같은 양수림을 덮고 마침내 숲의 주인이 됩니다.
소나무, 종가시나무, 동백나무(왼쪽부터)
생태계의 기후조건에 맞게 숲이 안정화되는 마지막 단계를 '극상림'이라 합니다. 이는 거의 변화 없이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하는 군집을 말하는데요, 숲이 생겨서 극상림으로 이어지는 단계를 '숲의 천이'라고 합니다.
지역적인 환경조건에 따라 천이가 멈출 수도 있는데, 천이를 멈추면 그 상태가 극상입니다. 나무가 자랄 수 없는 고산지대는 초원이, 사막은 선인장과 같은 다육식물이, 한대지방은 침엽수림이 극상림이 됩니다.
곶자왈이란?
제주곶자왈도립공원의 숲길에는 오름이 없습니다. 전망대가 오름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한번 올라가 보겠습니다.
전망대
오름만은 못하지만 곶자왈의 숲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높은 곳에 오르면 눈이 우선 먼 곳으로 가지요. 한라산, 남송악, 도너리오름, 정물오름, 문도지오름, 금오름이 곶자왈 숲과 하늘의 경계선에 펼쳐집니다. 원경의 시원함을 만끽하고 이야기 주제인 숲으로 가시권을 좁혀 봅니다.
전망대에서 본 제주곶자왈도립공원
전망대 주변의 더 가까운 숲을 내려다보면 아직은 양수림인 소나무가 이 숲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키 큰 소나무 아래서 어린 활엽수가 햇빛을 찾아 경쟁하고 있습니다. 또 덩굴식물이 맹렬한 기세로 교목을 타고 오릅니다.
교목을 덩굴식물이 타고 오른다.
제주곶자왈도립공원에는 높이가 10m 안팎인 종가시나무가 많습니다. 참가시나무, 아왜나무, 팥배나무, 생달나무, 동백나무, 육박나무들이 함께 자라는 상록활엽수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음수림이지요. 가시나무 왕초피도 하늘 높이 치솟습니다.
팥배나무, 육박나무, 왕초피(왼쪽부터)
곶자왈(Jeju Gotjawal)은 숲을 뜻하는 제주어 ‘곶’과 가시덤불을 뜻하는 ‘자왈’을 합쳐 만든 용어입니다. 곶자왈은 용암숲입니다. 용암이 크고 작은 바위 덩어리로 쪼개져 요철(凹凸) 지형이 만들어진 곳에 상록활엽수, 낙엽활엽수, 가시덤불, 덩굴식물 등이 한데 뒤섞인 원시림을 곶자왈이라 합니다.
활엽수, 덩굴식물, 암괴가 뒤섞인 용암숲
곶자왈 용암지대는 표층에서 심층까지 크고 작은 암괴들로 이루어져 있어 빗물은 암괴 사이로 금방 빠져버려 물이 적습니다. 지표는 온통 바위 덩어리라 토양의 발달이 빈약하여 식물이 자라기 어려운 환경이지요. 그러니 식생의 발달 속도가 매우 느립니다. 곶자왈 숲은 일반적인 '숲의 천이'와는 달리 천이가 매우 천천히 일어나고 있어 양수림과 음수림이 공존합니다.
빗물은 암괴 사이로 금방 빠져버린다.
지하로 유입되는 빗물은 지하수의 함량을 풍부하게 합니다. 널린 화산 암괴 곳곳에 '숨골' 또는 '풍혈'이라 불리는 바위틈이 있습니다. 겨울에 바깥 기온이 떨어지잖아요, 지하와의 온도 차이 때문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옵니다. 반대로 더운 여름에는 서늘한 기운이 돌지요. 지하수의 영향으로 보온, 보습 효과가 뛰어납니다. 그래서제주 곶자왈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열대 북방한계 식물과 한대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하는 제주도만의 독특한 숲이 생겨나게 되었고 합니다.
숨골
제주곶자왈도립공원
화산석과 가시덤불과 나무, 풀이 뒤엉켜 경작이 불가능한 곶자왈은 숯 굽는 사람들과 사냥꾼 외는 드나드는 사람이 없어 방치되었던 곳입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버려졌던 숲이 자연자원과 생태계의 보전가치가 높은 지역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숲 너머로 모슬봉이 보인다.
제주도는 신평리 마을회 소유의 신평곶자왈의 일부(약 48만 5천여 ㎡, 공원 전체 면적의 약 32%)를 무상 사용할 수 있도록 주민들의 동의를 받아 대정읍 영어교육도시 내에 ‘제주 곶자왈 도립공원’을 조성하였습니다. 최초로 신평곶자왈에 대한 인간의 간섭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쾌적한 탐방로
대정읍 보성리, 구억리, 신평리 일원에 조성된 제주곶자왈도립공원은 총면적 154만여㎡이며, 생태환경을 건드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탐방로를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구간별로 테우리길, 오찬이길, 빌레길, 한수기길, 가시낭길이라 이름이 붙여져 있습니다. 탐방로는 나무데크와 야자매트로 시작하여, 돌길도 일부 있으나 산책하기에 편한 길입니다. 짧게는 40분에서 길게는 2시간 반이면 돌아올 수 있는 거리이고요.
참나무류 숲이 우거진 돌길
곶자왈에는 개가시나무 등 법정보호 야생식물의 주요 서식지이며 빌레나무 등 다양한 희귀식물과 천량금, 가시딸기, 갯취, 제주고사리삼 등 제주나 우리나라 일부 지역에서만 자라는 특산식물을 볼 수 있습니다. 곶자왈에서 자주 만나는 나무와 풀들의 이름은 적어두고 다시 검색하고 하지만 돌아서면 잊어버립니다.
제주곶자왈도립공원 산책로에는 나무 이름과 나무에 대한 설명을 단 팻말이 곳곳에 있습니다. 나무 이름은 뚜껑을 덮어 살짝 가려놓았습니다. 나무에 대한 설명을 읽고 뚜껑 젖히면 나무 이름이 나타나는데, 이 팻말은 나무 이름을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여닫는 나무 명패
처음 만난 나무 명패는 종가시나무였습니다. 이곳 곶자왈에는 참나무과의 종가시나무, 졸참나무가 많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숯은 참나무 숯이 최고랍니다. 참나무과의 활엽수가 많은 숲에는 숯을 굽던 흔적도 만날 수 있습니다.
밑둥치에 숯을 굽기 위해 잘라 낸 나무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돋아나 여러 방향으로 새로운 가지를 뻗어서 하늘을 가립니다. 노박덩굴, 다래, 으름덩굴, 마삭줄, 송악이 교목을 타고 오릅니다. 그 모습은 마치 정글 숲을 연상시킵니다.
종가시나무 밑동
곶자왈 내에서는 화석연료가 숯을 대신하고 사냥꾼도 없어지니 숯가마터와 사농바치터(사냥꾼 쉼터)의 흔적만 남아있습니다. 숯가마와 숯 굽는 사람들의 임시 거처인 숯막, 목재와 숯을 운반하기 위해 만든 '숯굳빌레'라는 길의 흔적인 돌담이 남아 있습니다.
돌담
공원 서남쪽으로 올레11코스(신평무릉곶자왈)가 지나갑니다. 신평무릉곶자왈 입구에 당산나무가 서 있습니다. 신평 본향당이지요. 신축민중항쟁 때 새로 장두가 된 대정 출신 이재수와 총포로 무장한 40여 명의 포수가 출정을 앞두고 ‘일뤠할망'께 제를 올렸던 곳입니다.
신평 본향당
그로부터 반세기 후, 4.3 민중항쟁이 일어나고 제주 주민들은 경찰과 토벌대를 피해 곶자왈로 숨어들었다가 무참히 학살됩니다. 제주도립곶자왈에 무장유격대의 은거처와 피란 주민들의 은신처가 남아있고, 독립영화 '지슬'의 촬영지인 큰넓궤도 공원 동북쪽 도너리오름 기슭에 있습니다.
큰넓궤 도너리굴, 영화 '지슬'의 촬영장
일반적으로 곶자왈 내에는 물이 귀합니다. 전망대를 지나면 커다란 못이 있습니다. 소와 말을 키우기 위해 조성한 '우마급수장'의 물은 지하수가 아닙니다. 빗물을 빌레(너럭바위) 위에 모아 저장한 곳입니다. 빌레는 방수 효과와 지지력이 좋아 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하니 귀한 수자원이지요.
빌레 위에 조성된 우마급수장
새우란 자생지를 알리는 팻말이 서 있어 이리저리 살펴봅니다. 비슷한 들꽃을 발견하고 희열에 들떠 소리를 지르지만 결론은 '아니올시다'였습니다.
비짜루과(아스파라거스과)의 여러해살이풀, '제주둥굴레'라네요. 꽃말은 '작은 추억, 고귀한 봉사'이고요. 아무튼 예쁜 녹색빛을 띤 흰색 꽃을 달고 있네요.
제주둥굴레
곶자왈의 땅바닥에서 양치식물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가는쇠고사리 군락이 가장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습니다. 윤쇠고비, 큰봉의꼬리, 애기꼬리고사리, 도깨비쇠고비, 관중 ㆍㆍㆍㆍ 이 역시 비슷비슷하여 구별이 쉽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자란 김 선생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산으로 들로 바다로 뛰어다니는 김 선생의 유년기가 눈앞에 그려지고요. 자연은 건강한 교육현장입니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지향하는 김 선생의 품성이 자연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가는쇠고사리(왼쪽), 윤쇠고비(오른쪽)
숲 속에는 여러 종류의 버섯들이 자랍니다. 공중습도가 높고 겨울에도 따뜻한 곶자왈의 기후조건 때문이지요. 털귀신그물버섯, 족제비눈물버섯, 구름송편버섯, 치마버섯이 쓰러진 나무를 분해합니다.
여러 종류의 버섯들이 자랍니다.
숲 속에 들어서면 새들의 울음소리가 나뭇가지를 흔드는 제주 바람 소리와 어우러져 숲 속의 교향곡이 되어 울려 퍼집니다. 희귀 철새인 팔색조와 긴꼬리딱새, 흰눈썹황금새, 섬휘파람새, 동박새의 울음소리는 '접촉, 경계, 비행, 짝짓기, 먹이 구걸'을 위한 조류의 언어입니다. 삶을 위한 몸부림이지요.
건강한 숲과 건강한 사회
새 지저귀는 소리가 ○○공고사학민주화운동 때 최소한의 인간적인 대우를 갈망하던 아이들이 '장사는 시장에서, 교육은 학교에서'라고 외치던 구호 소리처럼 들립니다.
나는 인공조림지의 질서 정연하고 쭉쭉 뻗은 편백나무, 삼나무 숲보다 엉클어지고 무질서해 보이는 곶자왈에 관심이 많습니다. 특목고나 자사고보다 실업계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상대적으로 더 많은 애정을 갖고 있었던 김 선생의 교육관과 맞닿는 숲입니다.
무질서하고 거칠어 보이지만 내면에 자연의 질서가 있습니다. 키 큰 나무가 키가 작은 나무나 덩굴식물, 땅바닥을 기는 하찮은 풀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또 이끼나 풀들은 수분을 머금고 토양을 움켜잡아 나무를 자라게 돕습니다. 가시덤불도 나무를 감아올라 귀찮게만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추위와 외부의 침입을 막아주면서 통풍도 원활하게 합니다. 서로도우며 함께 숲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힘 있는 사람과 힘없는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건강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아이들이 커 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참 교육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꿈이 이루어질 날은 아직도 요원해 보입니다. 승자독식의 논리가 판치고 있습니다. 승자는 패자를 죽음의 벼랑 끝으로 몰아갑니다. 최소한의 염치나 주저함도 없습니다. 아이들은 친구를 밟고 살아남는 경쟁교육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곶자왈이 있기에, 곶자왈의 가치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에 나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숲 해설사의 마지막 말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자연은 가만히 놔두면 자기네끼리 알아서 한다. 인간이 자연에서 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서로 도우며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되게 도울뿐이다."
인간의 욕심으로 만든 편백나무, 삼나무 등의 인공조림지는 죽은 숲이라는 것입니다. 특목고나 자사고,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있었던 이른바 일류 중고등학교 등의 엘리트 교육은 죽은 사회를 만드는 죽은 교육이라는 것이지요. 35년 전 우리가 이루려 했던 교육민주화운동의 정당성을 생명의 숲, 곶자왈에서 찾습니다.
김 선생, 언제쯤 귀국합니까? 돌아오면 곶자왈에서 '사람 사는 세상' 이야기를 나눕시다. 모처럼의여행이 재충전의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2023. 7.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