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하지 못할 태풍이라면
조용해도 좋고, 지루해도 좋고, 그저 고독하기만 해도 좋은 하루가 있다.
예전의 나라면 이 상태를 불안해했을 것이다.
“나 지금 열정이 식은 걸까?”
그렇게 조급함으로 바뀌는 게 늘 불안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내가 아닌 무언가를 바라던 어린 기억과 달리
'나'라는 존재에 집중하는 어른의 과정은 다르다.
현실의 모든 게 결핍을 가리키고 있는데, 속은 더 이상 비어 있지 않다.
내 안에서의 질문에 귀 기울이는 시간.
누구의 말도 빌리지 않은 채 스스로 답하고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지금이 충분히 가치 있게 느껴졌다.
운동을 할 때도 달라졌다. 더 이상 이를 악물지 않는다.
몰아붙여서 나를 무너뜨리지도, 무언가를 증명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쉬는 시간은 느슨하게 두고, 또 할 수 있는 만큼만 다시 이어간다.
계획대로 못 해도 상관없다.
오늘의 몸이 허락하는 만큼, 딱 내가 하고 싶은 만큼이면 그걸로 충분하다.
거울 속에서 얇아진 내 모습을 본다.
PT 트레이너였던 시절이 문득 떠오른다.
예전 같았으면 불안부터 먼저 왔을 장면이다.
작아지는 게 싫었고, 약해 보이는 건 더 싫었다.
그때 내 몸은 나를 증명해야 하는 치열한 '도구'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과거와 다르게 거울 속의 나는 이상할 만큼 초연하다.
크지 않아도, 강해 보이지 않아도, 지금의 모습이 그 자체로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다.
습관적으로 말라버린 팔을 잡고 힘을 줘본다.
작아진 근육들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나를 대신해 싸워줄 무언가'를 더 이상 찾지 않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의 나는 항상 커야 했고, 강해야 했고, 특별해 보여야 했다.
그래야 내 깊은 불안을 가릴 수 있었으니까.
지금의 나는 그런 방패가 없어도, 그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걸 느낀다.
어쩌면 나와 같은 과정을 거쳐가는 모두가 '방패'를 자기 자신이라고 믿고 있었던 건 아닐까.
과거의 나는 앞서 말한 다양한 종류의 방패 속에 살았다.
그 착각을 해부해 본다.
내 발전이 눈에 보여야 했고, 남들의 눈에 띄어야만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 특별해 보여야 했다.
그렇지 않은 일은 가치가 없다고 여겨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소를 잃고 외양간을 꾸미는 일에만 집중했던 것이다.
작게 시작했던 사업들도 그랬다.
당장 눈에 띄는 수입이 없을 수밖에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은 그 초라함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그 모든 시도는 허영심 속에서 희미해졌다.
깨닫기 전까지 나는 세상 탓을 했다.
그건 꿈만 가득하고 현실은 모르는 어린아이의 투정이었다.
아무것도 특별히 한 것 없는 오늘.
조용한 하루, 주변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분명 '평화'다.
이 평화는 행복과는 조금 달랐다.
흥분이나 들뜸이 없고, 앞날을 장담하지도 않는다.
다만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세상 속에 통과시키고 있다는 감각.
사람을 오래 살게 하는 건 쾌락이 아니라 이런 감정일 것이다.
몸부림치지 않아도 되는 순간.
상태를 부정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
조용하다는 건 포기가 아니었다.
지루하다는 건 무기력이 아니었다.
그건 이제부터 태풍밖이 아니라, 태풍의 눈 속에 들어가도 여전히 태풍 속에서 존재함을 알리는 신호,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않아도, 그 자체로 존재해도 괜찮다는 신호였다.
세상을 살아가는 나는 여전히 태풍 속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마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막막할 것이다.
그리고 그 막막함에 휘둘리는 것은 태풍 속 위치를 어디로 잡냐에 달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히려 이 하루를 기억하고 싶다.
이 조용함이 언젠가 다시 삶이 흔들릴 때, 나를 잡아줄 단단한 기준이 되어줄 것이기에.
태풍의 눈에서 나와 세상을 관찰하는 나는,
다른 누군가들 처럼 태풍 속에서 존재하는 나다.
그렇기에 조금 더 속으로 들어가 지켜보는 것이,
게으른 것도. 겁을 먹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태풍 속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는 과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