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나는 개미가 되었다.
오늘도 내 안에서만 하루를 보내다,
익숙한 뉴스 한 줄을 마주쳤다.
'청년 자살률 역대 최고'
나는 한때 너무 막막해서 죽음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조심스럽게 생각을 이어가 본다.
나는 왜 죽음을 고민했을까. 해부해 보면 답은 단순했다.
나는 특별한 거인이 되고 싶었다.
멀리 보고 싶었고, 높이 날고 싶었고,
어쩌면 세상의 주목을 받는 삶을 살고 싶었다.
내 그림자가 남들보다 길어 보이길 원했고,
내 목소리가 더 멀리 퍼지길 바랐다.
주머니에서는 늘 황금이 쏟아지길 꿈꿨다.
그 황금으로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충만함’이 뭔지 보여주고 싶었다.
20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왔다.
그 사이 사회의 공기를 나름대로 받아들이며
내린 결론은 당연하게도.
현실은 뼈가 시릴 만큼 차가웠다는 거.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극은 피부에 느껴지는 온도만큼
상상보다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었다.
그 충격은 다양한 틈에서 왔었는데,
요즘 청년세대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자아가 오염되고 있지 않았을까?
마음도 몸처럼 일정한 온도가 필요하다.
오염된 자아가
그 냉기가 들어오는 틈을 계속 벌려 놓고 있었다.
그 틈을 인식하지 못하면 더 벌어진다.
그 거대한 괴리감은 결국
삭제해야 할 자아가 만들어내는 착각이라는 것을
나는 다행히도 몸과 마음으로 알아차렸다.
오랫동안 오염되어 온 자아는 불태우는 데 생각보다 많은 힘이 들었다. 아직도 그 자아는 활활 타는 중이다.
재만 남을 때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성장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는데,
그 문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말이 하나 있었다.
'꿈을 크게 가져라'
꿈을 크게 가지라는 말은 맞다.
나 역시 글쓰기로 믿는 미래가 있다.
하지만 꿈을 크게 갖는 것과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자신을 학대하는 태도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경쟁 사회에서 자라온 환경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스스로 비교의식이 강하다는 걸 인지 못할 때가 있었다.
어느 세대든 힘들지 않았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다만 지금의 청년 세대는 조금 더 슬픈 조건 위에 서 있다.
앞선 세대는 일하면 집을 살 수 있었다.
지금은 물려받지 않는 이상 그 말이 쉽게 성립되지 않는다.
집이 가난하거나 제로에 가까운 환경이라면
이 현실은 더 노골적으로 다가온다.
내 집은 제로가 아니라 마이너스다.
그래서 이 말은 내 기준에서는 꽤 객관적인 증언이다.
이런 조건 속에서 청년들은 결국 두 가지 선택지 앞에 선다.
미친 듯이 일하거나, 한 방을 노리거나.
나 역시 단기간의 성공담을 보면서 도박성 짙은 시도들에 쉽게 손을 댔다.
미끄러지면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공포가 속을 채웠다.
그리고 세상은, 패자 부활전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오염된 자아와 착각 속에서
거인이 되려 노력하는 날들은
남은 기억도, 실제로 남은 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더 작아지기로 했다.
거인이 아니라, 한 마리의 개미가 되기로 했다.
몸을 바닥까지 낮추고 나서야 비로소 맡을 수 있는 냄새가 있었다.
높은 곳에 있을 때는 바람 냄새만 났다.
하지만 개미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니
비로소 모래의 비릿함과 나무의 묵직한 향이 났다.
삶의 가장 낮은 곳에서만 느껴지는
투박하지만 정직한 냄새였다.
개미로 사는 시간은 단순하다.
질문하지 않는다. 억울해하지 않는다.
그저 내 몸보다 큰 짐을 짊어지고 여섯 개의 다리를 부지런히 놀릴 뿐이다.
그 짐이 나의 3,600만 원의 빚이든,
지금 내가 직업으로 삼고 있는 일이든 상관없다.
개미는 묻지 않았다.
“왜 나만 이렇게 무거운 걸 들어야 하지?”
그저 옮긴다. 옮겨야 하니까.
그것이 입력된 유일한 알고리즘이기 때문이다.
이 단순한 반복을 인정하는 과정에서
나는 착각이 아닐까 싶을 만큼 낯선 평화를 느꼈다.
대다수의 청년이 걸어야 할 길은
잘 닦인 포장도로가 아니다.
발이 푹푹 빠지고 진득하게 달라붙는 '갯벌'이다.
거인이 되려 했을 땐 이 갯벌이 지옥 같았다.
무거운 욕심을 짊어지고 뛰려 하니 자꾸만 발이 빠졌다.
내 발에 맞지 않는 화려한 구두를 신고 뻘밭을 뛰는
꼴이었다.
그러나 개미가 되어 걷기로 했을 때,
갯벌은 그 자체로 생존이자 생명력이 넘치는 땅으로 변했다.
가벼운 개미는 펄에 빠지지 않는다.
가볍기에,
그저 그 진득한 표면을 밟고 지나갈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의식적으로 생각한다.
이곳은 나를 집어삼키는 뻘이 아니라,
내가 밟고 가야 할 유일하고 단단한 땅이라고.
땅에 붙어 음미하며 사는 삶은 안전하다.
이미 바닥에 있기에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다.
넘어져도 무릎 정도만 까질 뿐, 치명상은 없다.
개미의 시간은 초라해 보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개미가 발에 차일까 걱정하고,
누군가는 개미를 아예 보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개미가 되고 싶어졌다.
이 작은 움직임들이 쌓여 결국 굴을 만들고,
겨울을 버틸 식량이 된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시선을 강제로 뜯어고쳤다.
저 멀리 보이지 않는 10년 뒤의 영광이나
남들의 꼭대기를 보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나의 시선을 나의 턱밑으로 떨어뜨렸다.
지금 내 발이 닿은 흙,
그 까슬한 감촉과 미지근한 온도,
갯벌에서 섞여 올라오는 비릿한 냄새에 집중한다.
오늘은 화려한 환상 속 미래를 위해
가벼이 태워버릴 땔감이 아니다.
오늘은
내가 서 있는 유일하게 단단한 땅이다.
거인이 되려다 오늘을 버리는 짓은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나는 개미의 눈으로 오늘을 산다.
이것은 비굴한 다짐이 아닐 것이라 믿는다.
내 삶의 감각을 되찾겠다는 선언이다.
가장 좁은 시야로, 보이고 느껴지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
그렇게 현재를 감각하는 것.
그것이 이 불안한 세대를 건너는 개미의 유일한 생존방법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오늘을 살기 위해, 개미가 되기로 했다.
거대한 자연의 바닥에서 오늘도 개미는 노력한다.
나는 개미가 이제는 작은 거인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개미는,
오늘 다시 한번
거인의 유서를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