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일기는 요컨대 어제의 일기의 (하)편으로 취급해도 좋다. 그렇게 장황하게 말하고도 아직 할 말이 남았다니. 말에 관해서도 얘기하자면, 나는 말을 못 한다. 누군가와 말싸움해서 이겨본 적은 평생 손에 꼽고,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거나 승리해본 기억 자체가 없다. 오늘 저녁 계란볶음밥보다는 신라면 투움바가 나을 것 같네요, 치킨은 너무 비싸니까 햄버거로 가시죠, 따위의 제안 외에는 논리적으로 완벽히 상대를 설득하거나 인생 선배 같은 느낌으로 구멍 하나 없는 조언을 해준다거나 몇 번 해본 적 없는 토론에서 이겨본 적이 없다. 글 잘 쓰는 사람들은 말 잘하는 거 아닌가요? 그렇다고들 하는데, 물론 내가 아는 사람 중 글 잘 쓰는데 어눌한 분은 없지만 나 같은 돌연변이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글을 잘 쓰는 비결인 것 같다. 툭하면 삐지고 불만은 많은데 어디다 의견 표출할 때가 없다 보니 초대하지도 않은 등장인물들이 나타나 내가 왜 패배자인지, 패배의 원인은 뭔지, 승리자로 될 확률은 몇 퍼센트인지 등의 토론을 하기 시작한다. 브런치스토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미 고등학생 때부터 소심하고 음침하던 나는 나를 고발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주변인을 비난하거나 닮고 싶은 롤모델을 찬양하는 반면 왜 너는 그것밖에 못하냐는 식의 일기를 써왔다. 어린 시절부터 입은 퇴화했고 말은 손으로 한 것 같다. 욕은커녕 누군가에게 짜증을 낸 적도 없다. 단, 어머니와 누나 제외. 남들 앞에서는 개쭈굴이로 살면서 그 누구보다 소중한 가족에게 울화와 열변을 토해낸다. 그 순간만큼은 진중권이든 아리스토텔레스든 내 무적의 논리에 무릎 꿇고 그걸 받아 적으면 한강 이전에 노벨문학상 쥐어졌을 수준으로 거침 없어진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아 왜 그랬지, 맞다 나는 병신이지, 하면서 그걸 또 일기에 적고 성찰하는 척하지만 결국 재발한다. 사춘기에서 우화하지 않은 밀웜으로 여태 지내고 있다. 김광석 노래처럼 서른 살까지 처먹고도.
어제 만났던 그는 50대이고, 전 직장 동료이자 친구다. 서른이라 서글프다는 응석을 부리면 젊음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한 가치라며, 본인도 50대가 됐지만 여전히 70~80대의 삶은 모른다, 엄마나 이모 얘기로 지레짐작만 할 뿐이라며 나이를 먹어야만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했다. 철학과 출신의 성찰과 15년 동안의 잔뼈 굵은 기자 생활의 연륜에서 예상치 못한 단어들이 튀어나와 지루할 틈이 없다. 이명박이나 전두환 얘기가 나오면 내가 정치를 잘 몰라도 귀 기울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는 비관적이고, 다혈질이며, 자기중심적이다. 그렇기에 훌륭한 작가의 소질이 보이는 것도 같다. 당신이 브런치스토리에 나처럼 받아쓰기만 해도 구독자 만 명은 달성할 것 같은데. 당장 시도조차 못 했지만 유료 멤버십이나 후원 같은 것도 쓸어가실 것 같은데, 그럼 더 이상 그 일은 안 하셔도 될 텐데. 주변에 파란만장한 삶이나 듣기만 해도 가슴 먹먹해지는 분들 많지만 당신 사연은 유독 가슴이 아픈데. 정치나 유행, 옷 입는 스타일이며 말투, 음식 기호 등 모든 면에서 세대 차이로 압축할 수 있는 이 공백이 참 좋다. 잘 모르니까 듣는 재미가 있고, 그는 내가 잘 들어줘서인지 더 신나게 얘기해주는 편이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 친구들도 비슷한 것 같다. 단지 할 얘기가 없거나, 피곤하거나, 딴생각 중이거나, 어색하거나 등 각종 이유나 핑계로 낯선 사람과 심지어 낯익은 사람한테조차 말수가 적은 편이라 단지 듣기만 할 뿐이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알아서 얘기해주니 나도 편하고 상대도 가슴이 후련해지는 걸까? 대화가 길어지고 통화나 소주가 새벽을 쭉 달려도, 막상 돌이켜보면 그 대본에 내 대사는 몇 줄 안 된다. 3시간, 5시간을 있어도 마찬가지다. 그게 상대랑 잘 소통하는 비결인 것 같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목성의 아침>을 얼른 퇴고하여 이 일기를 공개하기 전에 끝내고자 했는데, 당시 시간이 부족했든 수면이 부족했든 어쨌든 내가 낳은 내 새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원래 글을 쓰자마자 바로 퇴고하기보다 좀 덮어뒀다 나중에 보면 그제야 보이는 것들이 있긴 하다. 또 변명 한 줄만 추가되는 것 같은데, 내가 정치인이 안되길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스팀 게임하면서 묵혀뒀다 잊힐 때쯤 꺼내서 써야지~ 라는 타협을 하려면서도 얼굴에 흙이 묻었는데 빨리 닦아줘야지, 하는 부모의 마음이 줄다리기하고 있다. 부모? 네가? 그 고귀한 이벤트는 평생 발생하거나 달성될 일이 없을 텐데? 설마 반려견 데리고 와서 부모의 마음, 으로 포장하려는 거 아니지? 나를 좋아해 줄 특이 취향의 여인이 없다면 집 안의 대는 여기서 끊기겠지. 수염도 깎고, 살도 빼라고? 수염이야 새벽에 깎아도 정오만 되면 얼굴이 다시 푸르스름해지니 어쩔 수 없고, 살은 머 할 말이 없네. 퇴직하고 벌써 6~8kg은 찐 것 같으니. 쿠팡이나 각종 까대기, 상하차를 해도 살은 잘 빠지지 않았다. 그야 매일 하는 건 아니고, 그만큼 많이 처먹으니까.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고 숨도 쉬기 힘들어 퇴직했는데, 정작 더 몸이 무겁고 호흡이 어려운 건 지금인 것 같다. 목성에서 탈출했다 생각했는데, 여기가 중력이 더 깊고 굵직하다. 백수 히키코모리에게 집 밖은 숨 쉴 수 없는 우주다. 사회복지사 일을 하면 삶이 더 고단하고 굴곡진 분들을 많이 마주하겠지. 그 사명감 하나로 나는 그곳의 무거운 중력을 버틸 수 있을까?
실시간으로 추가하려다 벌써 자정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한다. 뭔가 결말이 마음에 안 드는데, 제목의 날짜와 발행 날짜가 달라지는 건 왠지 불편하다. 또 이상한 강박이 억죄어온다. 오늘 하루는 머 했더라, 숭고한 낮잠에 성공하여 피곤이 조금 가셨지만 한편으로 또 밤을 새울지도 모르겠군. 이 굴레를 끊고자 노력도 했는데, 6개월의 야간 근무에서 벗어나도 시차 적응은 아직인 것 같다. 단지 내 의지 병약인지도 모르겠다. 갈색거저리로 되는 게 최선일까, 그냥 밀웜으로 살아가는 게 나은 걸까. 오늘 일기를 통해 뭔가 하려던 말을 하지 못한 느낌이다. 글을 쓰다 보면, 특히 이런 식의 의식의 흐름 받아쓰기를 하다 보면 종종 하려던 말을 까먹곤 한다. 그럼 머 떠오르면 내일 일기에 적으면 그만이겠지. (이제 얼른 마치고 맞춤법검사기나 돌리고 또 스팀을 키는 현재 시각 오후 11시 53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