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구상 한강 백일장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오늘 하루는 패배감과 상실감에 젖어 익사했을지도 모른다. 무슨 낯짝으로 최초에 공개했던 일기처럼 2시간만 자고 출석한 걸까. 일찍 자려다 시간이 아깝다고 여겨 또다시 스팀에 접속한 것이 문제였다. 이는 습관과, 잠을 소홀히 하는 오만함 또는 안전불감증으로 해석된다. 건강은 결국 예방이고, 몸에서 신호를 보낼 때면 이미 늦은 거니까. 오만과 비슷한 얼굴인 자만을 덧붙이자면, 나는 당연히 우승할 줄 알았다. 당장 브런치스토리만 대충 둘러봐도 나보다 글 실력 후달리는 사람들 많다고 생각하니까. 적절한 자신감은 세상 풍파 강풍에도 꺾이지 않게끔 내 허리를 지탱해 주지만, 지나친 자아도취로 수면을 포함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채 목성의 중력만큼 내려앉은 눈꺼풀로 더듬거리며 아침 버스에 올랐다. 다시 생각해 보면 엄청 어려운 글제도 아니었는데. 수치스러운 나의 작품을 공개하기를 잠시 미루고 불평을 토해본다.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 그러나 교장선생님 훈화 같은 구청장의 말씀으로 9시를 조금 넘기고서야 백일장은 시작됐다. 시간이 지체된 또 다른 아쉬운 점은, 백일장 준비가 미흡한 것인지 줄을 서는 구간이 중구난방이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고등부 운문부와 산문부 및 일반부 운문부와 산문부가 있었는데, 고등부와 일반부의 구분도 애매했지만 운문부와 산문부의 대기열이 명확하지 않아 중간에 한 번 줄을 바꾸느라 시간은 더 지체됐고, 슬슬 MCU 인크레더블 헐크에 빙의되기 시작했다. 바닥에 테이프나 가림막 따위로 운문부와 산문부의 경계가 뚜렷했으면 좋았겠지만, 내 앞줄이 거의 다 빠질 즈음에서야 내가 선 대기열이 운문부인 것을 알게 됐고, 전완근의 핏줄이 한숨을 토해냈다. 헐크하니까 또 생각난 건데, 고등부 제외하고 일반부 신청자들은 전부 비리비리했다. 여의도 선착장 진성나루 앞이 아니라 내 동네에서 마주쳤다면 다들 한주먹감인데, 턱에 꽂으면 최소 기절 및 뇌진탕이겠지, 따위의 생각이 들 정도로 연약한 외관이었으나 줄이 점점 빠질수록 은둔고수처럼 비쳤다. 8kg 아령은 못 들어도 사람 목숨줄 왔다 갔다 하는 펜촉은 가벼이 휘두를 듬직한 장군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마블 시리즈에서 헐크를 좋아하는 까닭은, 브루스 배너라는 또렷한 대비가 있기 때문이다. 스마트 헐크가 된 MCU 최신 헐크는 꺼지시고. 태양이 촛불처럼 꺼질 만큼의 긴 한숨과 함께 드디어 산문부 안내서와 메모지를 받고 나만의 보금자리를 찾아 배회했다.
나는 병신이다. 몸이 편찮으신 분들을 폄하하는 의도는 단 한 스푼도 없다. 서두에 깐 복선처럼, 수면이 부족해서인지 뇌가 잘 작동하지 않았다. 원고지에 즉시 적다 보면 첨부된 첫 번째 사진처럼 오타가 나거나 긴 문장을 수정하기 어렵기에 안내서 뒷면에 떠오르는 대로 내 생각을 필사 중이었다. 일기에 자주 소개했던 내 손에 들린 각본들. 그러나 불면에 시달릴 정도로 지독한 수다가 왠지 잠잠했고, 아파트가 낫지, 아니야 감기가 나아, 따위의 고민만으로 이미 20분이 지나버렸다. 결국 뻔한 소재일 것 같아 하기 싫었던 '그때처럼'을 선택해서 되는대로 끄적이다가 목성이라는 나름 구체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기까지 약 40분. 자리를 찾아 배회하던 시간을 10분 정도라 가정하면 이미 1시간 10분을 날린 셈이었다. 헐크 얘기하면서 빈정댄 훈화와 대기열을 포함하면 10~20분 정도 추가되니까 아주 넉넉하게 잡자면 1시간 반. 정오까지 남은 시간 역시 1시간 반.
지금 실시간으로 적으면서 첨부된 사진을 다시 보니, 역시 첫 장까지는 그럭저럭 봐줄 만하다. 이미 참가자 절반의 모가지는 따고 시작한다. 그토록 싫어하는 모기들을 위한 진수성찬이 잔디와 아스팔트의 균열 곳곳을 메워간다. 어차피 심사 위원의 취향을 찾아 아첨하는 글이 장원이 되겠지만, 이 정도면 기호를 벗어나도 음, 꽤 써본 솜씨네, 이렇게 훌륭한 일반인이 있었다니! 라며 무릎을 탁 치고 무릎 반사 때문에 엄지발톱에 이마가 닿아 그 운동 에너지로 의자째 고꾸라질 정도로 최소 장려상은 노려볼 만하다. 그럼 일단 20만 원, 쿠팡 주간조 허브를 이틀 출근하는 것보다도 조금 많은 액수에 몸의 훼손과 비경제적인 시간 활용은 없던 것이 된다. 비록 가작이라도 상장과 부상이 있기에 이력서에 끄적일 한 줄도 마련된다. 여기까지 좋았다.
쓰다 지우다 반복하며 힘겹게 원고지를 채우다 보니, 두 장을 넘기자마자 확인한 시간은 오전 11시 30분. 그대로 받아쓰기하면 일기가 쭉 완성될 정도로 정교하거나 재치 있는 단어들은 각본에 없고 오로지 30분 남았어! 이제 어떡하지! 같은 확성기 소음이 머릿속을 장악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계란 껍질은 그만큼 연약한 내 의지를 대변한다. 사실 그녀라는 존재도 없는 것이었는데, 퇴직 후 쓸쓸한 시간을 보내던 목성에서의 고즈넉한 아침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배가 산으로, 호흡이 불가능한 안드로메다로 향했다. 이렇게 설명하려는 행위 자체도 추잡스럽다. 열린 결말을 매우 싫어하는 작가 지망생이자 한 명의 독자로서, 어떻게든 마무리 짓고자 휘갈긴 마지막 문장 및 원고지 반납은 정확히 정오. 평상시의 힘든 일상이나 인간관계의 상처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혐오와 수치심으로 삶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부풀었다. 이러니 헤밍웨이가 자살했구나. 그 자식은 나처럼 백일장 나간 것도 아니고, 작가로서 성공했으니 역시 배부른 새끼지. 아니야, 오히려 성공한 작가이기에 더 큰 부담이 존재하지는 않았을까? 자살하는 재벌들도 있잖아, 단 한 번도 부자인 적 없는 나 같은 인간은 평생 이해할 수 없겠지. 돈보다 중요한 가치, 그건 뭘까? 애초에 이 백일장도 돈만 보고 지원한 거였잖아. 구상 시인의 깊은 뜻도 헤아리지 않고 스스로 불면을 초래한 나태한 네가 할 말은 아니지.
파손되어 눌러도 작동하지 않던 테이블 벨은 밥 먹는 내내 거울을 보는 듯했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오늘 하루는 패배감과 상실감에 젖어 익사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50대이고, 전 직장 동료이자 친구다. 우리 사이에 20여 년의 공백은 드라마 <시그널>이 연상된다. 세대 차이가 나서 소통이 재밌고, 편협한 30살 뇌로는 담기 어려운 연륜도 깊어 배울 점 투성이다. 그는 위로했다. 문학계는 썩었다, 시인은 아름답게 세상을 바라본다 하지만 심성이 고약한 작가들을 많이 목격했다, 애당초 이 백일장은 명목과 형식만 존재할 뿐, 드러나지 않은 인맥 등으로 이미 우승자는 정해져 있을 수 있다, 와 같은 어두운 문장들로 파손된 껍질을 보드랍게 감싸주었다. 오늘 하루는 요약하자면 깨진 계란 껍질이었다. 대신 그와 함께할 수 있어 아프지만 맛있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끝내려다 실시간으로 추가한다. <목성의 아침>은 퇴고하여 조만간 발행해 볼 생각이다. 문예창작학과에서 내가 배운 것은, 이런 백일장에 나갈 때 기존에 쓴 본인 작품들을 잘 저장해두었다가 현장에서 글제가 발표되면 응용해서 쓰는 것이 기본이라고 했다. 확실히 앉은 자리에서 짧은 시간 동안 아예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기란 몹시 어렵다. 그러나 이런 행위 자체가 온전한 창작이 아닌 자기복제 같은 느낌을 주어 개인적인 거부감은 든다. 기존 문장들을 외웠다가, 혹은 대놓고 보면서 단어들만 바꿔서 제출하는 것이 백일장 본연의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러나 나 같은 인간보다 실력이 뛰어나신 어르신들이나 다른 경쟁자들은 즉석에서 창작하여 제출했고, 또 그것이 인맥이나 학연 같은 음모론적인 곡해 없이 순수하게 장원으로 채택될 수 있다. 나는 단지 신 포도라고 읊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확실히 백일장의 시간은 짧고,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성공적인 백일장의 팁이며, 또 하나 덧붙이자면 원고지 자체가 이제는 낡았다는 생각도 든다. 요즘 시대에 누가 원고지를 쓸까? 각 교실에 스마트 태블릿을 보급하여 '1인 1디바이스' 교육 정책이 시행되는 세상이다. AI 사용 우려가 염려된다면 이런 식으로 인터넷 되지 않는 스마트 태블릿 등으로 작성 및 제출이 되면 훨씬 나을 것 같다. 어차피 1년에 한 번 뿐인데, 구청장도 몸소 행차하실 정도인데. 어느 세월에 원고지에 다 옮겨적고, 중간에 문장 싹 다 고치려면 다시 새로 쓰고 해야 하나? 이러니까 개인 작품의 촌철살인 문장들을 달달 외어 붙여넣기 하게 되는 것이다. 안 그런 분들도 계시지만 자기복제가 성공의 길이라며 가르치는 게 현실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나 이 씨발놈아. 일기는 이렇게 장황하게 잘 쓰면서 왜 그까짓 긴장을 하는 거냐? 남 탓과 피해의식은 못 버리는 거냐? 네 전공인 시를 오래도록 쓰지 않아 자신이 없어서 산문을 선택했다면, 예쁜 문장과 눈부신 비유에 집착하지 않고 그냥 지금 일기처럼, 넋두리처럼 써도 됐잖아? 피천득 작가의 수필이 시적인 문장으로 유명한 거냐? 그리고 진심으로 첫 장은 잘 썼다고 생각하는 거냐? 내가 보기엔 아닌데? 밥상 다 차려놨는데 왜 수저를 달달 떨며 드는 거냐? 네가 싫어하는 라이브 못하는 가수랑 네가 다를 게 뭐냐? 네가 창작한 신의 음성이 맞아, 너는 존나 더 고생하고 가족들도 더 아프고 씨발 생활비도 다 작살나서 굶어 죽기 직전까지 가봐야 해. 너는 백일장이 아니라 그게 네 수준에 맞아. 네 일기에 쓴 것처럼 그걸 극복하면 존나 대단한 한강 불광천 금강산 노벨문학상 작가 되는 거고 아니면 죽는 수밖에 없겠지. 시체로 살 거면 살지 마라 그냥.
이렇게 끝내려다 또 실시간으로 추가한다. 스팀 얘기가 몇 번 나오기도 했고, 까놓고 말해 존나 돈을 질러서 게임 목록이 어마무시하게 많고, 브런치스토리 집필 전에는 여가 시간에 게임만 줄기차게 했다. 어제의 불면도 평상시의 불면이 근본적인 원인이겠지만, 무대에 오르기 전 긴장보다 릴렉스하게~ 라는 명목으로 CAPCOM <몬스터 헌터 와일즈>와 <대역전재판>을 즐겼다가 힘차게 던지면 달의 뺨까지 닿을 만한 긴 탓을 늘어놓고 있다. 어쨌든 스팀에 대한 글도 써봐야지. 분노와 변명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적나라한 자기 고발을 하니 속이 시원하면서도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 같다. 오늘 하루는 깨진 계란 껍질이었다. 대신 그와 함께할 수 있어 아프지만 맛있는 시간이었다. (주제도 모르고 먹을 자격도 없으면서 계란 계란하니 공복이 느껴지는 현재 시각 오후 10시 52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