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나 Nov 08. 2017

06. 청춘 자전거

- 풋풋한 사랑이 불어오는 곳으로 달려가기를

 자비없이 열기를 쏟아내던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한낮엔 태양의 기세가 여전했지만 저녁 무렵의 공기는 이제 곧 가을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소년은 가을이 좋았다.

최근의 날씨라는 것은 가을이 오는가 싶으면 이내 추워져버리는 모양새라 온통 여름이나 겨울만 존재하는 것 같은 지경이긴 하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욱 실패한 술래가 도망치는 아이들의 꽁무니를 바라보는 듯한 안타까운 심정으로 계절의 변화를 예리하게 인식하려 애쓰는지도 몰랐다.


수업을 마치는 오후가 되면 소년은 늘 신경질이 났다. 잠시나마 완벽한 계절을 느끼며 가벼운 산책 정도의 여유를 즐겼으면 싶은 그 시간은 한 치 여유도 없이 딱 학원 셔틀 버스를 타도록 정해진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소박한 바람이 나라를 팔아먹는 일처럼 부정한 것도 아니고, 학원에 앉아 공부하는 것이 나라를 구하는 것만큼 중차대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 소년이 딱 한 번 그 일정을 자체 취소했던 적이 있었다. 학원 선생에게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않을 때는 잠깐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목적없이 강가를 걸으며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는 동안에는 어떤 불안감도 없이 마음이 넉넉해졌다. 하지만 짧은 즐거움의 대가로 그보다 두 배는 긴 시간을 엄마의 잔소리에 시달려야 했기에  그 후로는 그 어떤 소박한 바람도 단념한 채 오후가 되면 최고조로 예민해지는 것이었다.


오늘은 그런데 하필 날씨가 더없이 화창하다.

 '계절은 당연히 하루 하루 더 가을의 한가운데로 향하고 있는데 지금이 내 17살 가을날의 정점이 아닐까, 이런 날의 강바람은 정말로 끝내줄텐데....  17살의 가을날의 정점이라는 것은 두 번 있는 것도 아닌데!'  

소년은 생각할수록 억울했고 짜증과 무력감에 기운이 빠졌다. 고작 학원에 가는 지겨움을 위해 짜증을 억눌러야 하는 것에 또 짜증이 났다. 이 짜증을 눌러 참음으로써 대체 난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걸까.


그래도 별 도리가 없었다. 엄마의 얼굴이 머릿 속에 떠오른 순간 소년은 한숨 한 번 쉬고는 예정된 운명을 따르기로 했다. 저지르지도 못할 갈등에 늦췄던 걸음 탓에 셔틀 버스마저 놓쳐버린 소년이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얼굴이 되어 시내 버스에 올라탔다. 기울어 가는 해가 버스 안으로 주황빛을 가득 뿌려승객들의 실루엣을 희미하게 만들고 있었다.




버스가 다음 정류장에 도착해 승객들이 하나 둘 올라타는 순간 태양이 유난히 소년의 눈을 부시게 하는 각도에 위치했다. 소년은 반사적으로 가볍게 미간과 눈살을 찌푸리다가 석양을 등지고 버스에 올라서는 소녀를 보았다. 단정한 교복 차림에 턱선까지 가지런한 단발머리를 하고 있는 유난히 하얀 얼굴을 한 소녀였다. 쏟아지는 빛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아니 저빛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정말 아주 굉장히 하얗다 - 고 소년은 언뜻 생각했다. 자신이 앉은 자리 옆을 지나쳐 뒤로 갈 때 살짝 눈을 들어 보니 역시 빛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새하얀 얼굴을 한 아이였다. 고개를 돌려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상적인 하얀 피부라고 생각하는데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려서 소년은 괜스레 학원까지 남은 정류장을 헤아렸다.


늦지 않을까 생각한 버스는 생각보다 빨리 소년의 목적지에 가까워졌다. 지겨움이나 짜증은 어느새 사라졌지만 뒷문을 향하는 소년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뒷문 앞에는 소녀가 벨을 누르고 있었다.


버스가 서고, 문이 열리고, 소녀가 내리고, 소년이 내리고.  소녀는 자꾸만 소년이 가야하는 길로 걸어갔다. 소녀를 따라가는 것도 아닌데 세 걸음 뒤에서 같은 길을 걷는 소년의 가슴이 자꾸만 빠르게 뛰었다.




수업 시간 내내 칠판보다 오른쪽 앞에서 두 번째 줄을 더 자주 바라보던 소년은 집으로 돌아가면서는 자신의 자전거를 떠올리고 있었다. 지난 봄 아빠를 졸라 입학 기념 선물로 받았던 소년의 자전거는 아파트 자전거 거치대 어딘가에 자물쇠가 채워진 채로 먼지가 쌓여가고 있을 것이었다. 타지도 않을 걸 뭐하러 사달라고 하느냐는 아빠를 설득한 근거는 따로 시간 들이지 않아도 등하교 시간을 이용해서 운동을 하면 공부할 시간도 늘어나고 좋지 않겠냐는 것이었지만 사실 다른 이유로 갖고 싶었던 자전거였다.


그건 어떤 영화, 정확히는 친구들보다 한 뼘쯤은 키가 작았던 중학생 시절의 소년이 친구들과 함께 보았던 한 영화 때문이었다. 소년처럼 어린 남자 주인공을 그가 좋아하던 여자 친구가 자전거 뒤에 태워주던 장면, 어른이 된 그가 이젠 다시 그 여자 친구를 자전거에 태우고 달려가던 장면이 인상적이던 영화. 모두가 시시하다고 하는 바람에 그렇다고 맞장구쳤지만 그 장면들이 마음 속에 오래도록 남은 영화였다. 그래서 고등학생이 되면 어쨌든 예쁜 자전거 한 대는 가지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영화였다. 그리고  일주일의 자전거 통학 끝에 현실은 한없이 시시하구나 싶은 생각에 치워버리고 말았던, 아빠에게 그러면 그렇지란 핀잔을 듣게 했던 그 자전거였다.  


그 저녁, 학원 수업 시간 내내 소녀가 끄덕거릴 때마다 단발머리가 찰랑거리는 것을 자꾸만 쳐다보고 있자니 왜 불현듯 그 영화와 자전거가 새삼 떠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주말에는 꼭 자전거를 닦고 바람도 넣어 아직도 가을 한복판일 거리를 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소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매거진의 이전글 05. 행운의 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