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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나 Apr 16. 2016

03. 발 밑의 봄

- 늦게 도착한 사랑이 떠나는 속도

당신도 보고 있나요?

벚꽃이 지고 있어요.
꽃 소식이야 무심하게 넘기려면 그럴 수 있었지만 내 슬픔처럼 무참히 피어나는 꽃은 안 볼 방법이 없어서, 한창 눈부시던 꽃그늘 아래로 지나갈 때는 발끝만 봤던 나예요.  
당신은 아마 뭐가 그렇게 슬프냐고 바보같다고 할지도 몰라요. 그래요 사실은 나도 내가 정말 슬픈건지 그저 허무한 느낌에 그러는 건지 잘 모르겠을 때가 있어요. 고집스럽게, 당신이 없으니 지금 나는 슬퍼야한다며 일부러 그런 감정 속으로 집요하게 파고 들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하지만 어떻다고 해도 당신이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어요. 그럼 나는 그때만큼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도 변함이 없죠. 그러니 지나친 감정이라고 나무란대도 이렇게 있을게요.
오늘도 발 밑을 보며 걷는데 차도와 보도블럭이 맞닿은 모서리에 부쩍 떨어진 꽃잎이 많았어요. 흩날린 꽃잎은  언제나 그런 구석 어딘가에 모여 쌓이기 마련이잖아요. 내 마음의 구석에도 그렇게 당신이 남은걸까요.
아직은 그리 생채기 나지 않은 꽃잎들은, 아주 살짝만 짓물러져서 오히려 분홍빛이 진해진 고운 빛깔이었어요.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이 계절을 보내리라던 내 생각은 봄이 벚꽃 가지 위에만 있는 줄 알았던 어리석음 때문이었는데, 거기 발 밑에도 봄이 있더군요.
그제서야 나는 고개를 들었어요. 머리 위로 드리워진 꽃그늘은 한창 때의 환한 빛보다는 덜할테지만 햇살 아래에서 충분히 근사했어요. 그렇게 나는 당신도 없이 꽃잎을 맞았어요.
그런데 말이죠 사실 나에겐 당신이 있던 봄이 없었네요. 네 계절을 함께 볼 정도의 시간이 우리에겐 없었잖아요. 봄이라고 유난스러운 내 마음은 그래서 좀 우습기도 해요. 그렇지만 당신은 이해하죠? 이 계절을 당신과 함께 보고 싶다고 내가 여러 번 말했었으니까.
발길 닿는대로 걷다가 공원 풀밭 한구석에서 제비꽃을 봤어요. 보라색 그 꽃을 보니 그날 당신과의  대화가 떠올라서 탄식 비슷한 것이 흘러나와 버렸어요. 기억하나요. 서로의 무릎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앉아야 했던 그 좁은 술집에서의 밤을.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아니 정확히는, 묻지도 않는 이야기들을 나는 이상할 정도로 재잘거렸고 당신은 들어 주었죠. 별 것 아닌 것부터 평소에는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아했던  것들까지, 나는 왜 그렇게 당신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던 걸까요ㅡ 밤 때문이거나 늘어난 술잔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아니 사실 당신 때문이었어요, 당신의 그 다정하고 고마운 표정과 눈빛에 나는 당신이 나와 아주 닮은 사람이라고 확신했거든요ㅡ

새벽녘에 당신은 담담하게 나에게 말했어요. 예전 언젠가 내 생각을 하며 오랜 산책을 했었다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마음을 부치지 못할 편지로 적어 어딘가의 벽에 그저 붙여두었었다고. 뜨거운 마음이 지난 뒤에 추억으로 꺼내 놓은 말이니 당신은 당연히 담담했을테지만 그 담담함에 나는 잠깐동안 당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바보처럼 어리둥절해서, 그러니까 나를 좋아했었다는 말인거냐고 되묻는 바람에 결국 둘 다 웃어 버렸잖아요.

그 때 난, 어디선가 나 모르게 나를 위한 꽃이 피었던걸 뒤늦게 알게 된 기분이었어요.  구석에 곱게 피어있던 제비꽃이 내 눈에 딱 들어온 순간처럼요. 그리고 앞으로 살면서는 비참하거나 외로운 기분이 들 때가 있어도 그 이야기를 떠올리면 절대 외로워하지도 비참해하지도 않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의 마음은 그렇게 오랜 길을 걸어서  나에게 왔던거죠. 그래서 이렇게 떠나는 것도 더딘가봐요. 그래서 좋아요 나는. 당신을 생각할 시간이 넉넉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의 사랑에 어울리는 속도로 천천히 추억을 되짚을거예요 나는.

시작 없이 시작한  글은  마무리를 어찌 해야할 지도 막막했다. 어쨌든 더 이상 떠오르는 말이 없는 상태가 되었으니 그걸로 된 것 같아 그녀는 천천히 편지를 접었다. 그대로 봉투도 없이 주머니에 넣고는 집을 나선다. 비가 올 모양으로 흐려진 길을 걷는다. 빗방울에 젖어 이내 번져버릴 그 마음을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며, 어디에 붙이면 좋을까 생각한다. 이 마음도 오랜 길을 걸어서라도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달할까, 그런 생각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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