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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수토 Nov 03. 2021

걱정 인형

아이들 가을 방학기간인데 비가 많이 온다. 비가 오면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오늘도 아침에 반짝 해가 나는 거 같더니 비가 오락가락한다. 아이들은 목 늘어난 내복 차림으로 놀다 싸우다를 반복했다. 집에서 이러고 있으니 화낼 일이 무궁무진했다. 찬밥을 볶아서 점심을 먹이고 요거트를 후식으로 줬더니 뺏다가 흘리고 터트리고 난리다. 아무래도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빗방울이 듬성듬성하기에, 우리 몽마르트 언덕 갈까? 했더니 둘째가 강력하게 그러자고 대답한다. 서울에서 얘가 가본 "몽마르트 공원"은 달리기와 축구가 가능한 잔디 공원인데, 이 아이의 머릿속에는 그 장소가 떠오른 거 같다. 착각을 모른척하며 짐을 챙기는데 막내는 나는 지하철 싫다. 발가락이 아파질 거 같다. 무서운 사람을 만나면 어떡하냐 등의 이야기를 하며 징징거린다.


막내는 원래 걱정이 많아서 내가 걱정 인형이라 불렀다. 앤서니 브라운의 '어떡하지?"라는 그림책에 우리 막내가 나온다. 친구네 초대받아서 가는데, 아들이 엄마에게 줄기차게 묻는다. 집 못 찾으면 어떡하지, 못된 애들이 있으면 어떡하지, 무서운 놀이하면 어떡하지, 음식이 맛없으면 어떡하지. 엄마는 안 그럴 거야 재밌을 거야, 하면서 데리고 간다. 저도 잘 모르면서.


막내의 걱정은 프랑스에 와서 더 심해졌다. 축구를 사랑하는 둘째를 축구 클럽을 보냈더니 잘 다니기에 막내도 등록했다. 막내는 물론 가기 싫다고 했다. 안 그럴 거야, 재밌을 거야 하면서 세 번을 보냈다. 세 번째 날 수업에선, 짓궂은 프랑스 아이들이 막내에게 뭐라 말하며 저들끼리 웃었고 줄을 서 있는 막내 앞으로 자꾸 새치기를 했다. 땅에 있는 막내 물통을 괜히 걷어차 넘어트리기도 했다. 막내는 그 물통을 주워다 세워놨다. 끝나고 막내가 나오면서 말했다. 엄마 애들이 너무 나빠. 나는 바로 등록을 취소했다.


이번 휴가에서는 자전거를 빌려 타고 호수를 돌았다. 아주 큰 호수였다. 막내는 빌린 자전거가 작네 크네 하면서 여러 번 바꿔서 나를 피곤하게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고른 자전거가 기어가 안 바뀌고 체인에서 덜덜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빠와 누나와 형은 저만치 갔는데, 막내는 힘들어서 혼자 쳐졌고 나는 그 뒤에서 안간힘을 쓰는 막내의 등을 쳐다보며 따라갔다. 막내는 왜 내 자전거만 고물이냐며 화를 냈다.


짚라인과 흔들 다리로 나무를 연결한 숲을 지나가는 것도 했는데, 막내는 하기 전부터 무섭다고 싫어했다. 나는 괜찮을 거라고 했다  막내는 하는 도중에 두 번 울었다고 했다  아빠도 무섭다고 했으니 무서운 게 사실인 모양인데, 첫째와 둘째는 날다람쥐처럼 날아다니니  할 수도 없었다. 마지막 단계는 포기하고  막내에게, 대견하다고 오버해서 칭찬을 해주었다.  버거운 기억을 심어서 마음속에 걱정을 하나  얹었을  속상한데 돌이킬 방법이 없어서 그랬다.


아직 새나라에 익숙하지 않은 막내는 낯선 도전이 힘들다. 내복을 입고 집에서 뒹굴 때 가장 안전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온 식구가 이러고만 있을 수 없으니, 또다시 막내를 채근했다. 살살 달래서 아프다는 발가락에 반창고를 붙여주고 집을 나섰다. 나가보니 비가 더 많이 내리고 있었다. 이게 옳은 선택 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의구심을 가지고 쳐다보기에 괜찮아. 여기 날씨는 매번 바뀌잖아. 가면 그칠 거야,라고 했다. 내가 뭘 안다고.


목적지인 Abbesses 역까지는 지하철을 타면 30분도 안 걸리는데 아이들은 너무 멀다면서, 이곳이 머냐 할머니 집이 머냐 지난주 다녀온 안시가 머냐 이런 질문을 했다. 그 역은 과연 파리의 고지대에 있는 역답게, 계단이 더럽게 많았다. 나는 막내가 힘들다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밖에 나왔더니 아직도 비가 왔다. 그렇지만 관광객은 많았다. 사람이 이토록 많은 장소이니 뭔가 있을 것이라는  깨달았는지 아이들은 비교적 온순하게 언덕을 올라갔다. 언덕  위에 있는 성당 앞까지 가니 비구름이  파리가 한눈에 보였다. 도시가 흑백사진처럼 무채색이었다. 나는 멋있었는데 애들에게도 멋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날이 추워서 손이 시리다기에 핫초코를 사주었다. 구석에서 핫쵸코를 마시는데 따뜻하다고 좋아했다. 그즈음 남쪽 하늘에서는 구름이 걷히더니 햇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말했다. 엄마엄마 무지개다!! 무지개!!


진짜 무지개가 있었다. 무지개는 도시의 북쪽에서 동쪽을 둥글게 연결했다. 성당에서는 성가가 들렸고, 한쪽 하늘에선 햇빛이 내려왔고 반대편 하늘에서는 구름 위로 무지개가 그려져 있었다. 무지개의 일곱 빛깔은 점점 선명해졌고, 우리는 그걸 지켜봤다.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특히 우리가 서있던 구석이 무지개 명당이어서 사람들이 우리 뒤편으로 가득 몰려왔다. 아이들은 자기 자리를 사수하면 무지개를 한참 봤다.


막내는 "엄마 나 태어나서 무지개 처음 봐"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근사한 풍경 위로 걸쳐진 무지개는 나한테도 처음이라고 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막내는 "내가 저번에 똥을 밟아서 운이 좋은가 봐!"라고 했다. 너는 운이 정말 좋다니까, 하고 맞장구쳐주었다. 이렇게 막내 마음속 걱정 인형 하나 정도는 떠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봤다. 그렇게 한참 쳐다보다가 내려왔는데, 비도 그쳤고 언덕을 내려오는 건 당연히 올라가는 것보다 쉬웠다. 나는 당당하게 물었다. 이것 봐, 비 오는데도 나오길 잘했지? 아이들은 그렇다고 했다. 다행이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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