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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깨달았다.
이 두 조직의 차이를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비유가 있다는 것을.
야구다.
대기업 임원은 코치에 가깝다.
중견기업 임원은 플레잉코치에 가깝다.
같은 야구를 하지만 경기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대기업에는 체계가 있다.
오너가 있고,
CEO가 있고,
각 사업부를 책임지는 임원이 있다.
그 아래로 팀장과 실무자들이 촘촘하게 배치된다.
마치 잘 짜인 프로 구단 같다.
구단주가 있고 감독이 있고 코치가 있다.
역할의 경계가 분명하다.
대기업 임원에게 주어지는 과제는 단순하다.
“당신의 포지션에서 최고가 되어라.”
전략의 큰 그림은 CEO와 경영기획 조직이 그린다.
예산의 우선순위는 오너와 이사회가 결정한다.
임원이 집중해야 할 것은 자신이 맡은 영역이다.
자기 선수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어떤 성과를 만들어낼 것인가.
이 구조에서 살아남는 임원의 무기는 깊이다.
10년, 20년 동안 한 분야를 파고든 전문성.
업계의 흐름을 꿰뚫는 통찰.
같은 조건이라면 경쟁사보다 조금 더 정교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능력.
그래서 대기업에서 오래 일한 임원들은
대개 특정 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인다.
마케팅을 30년 한 사람은 숫자 하나만 보고도
시장의 흐름을 읽는다.
재무를 20년 한 사람은 재무제표 한 장으로
회사의 건강을 진단한다.
이것이 깊이의 힘이다.
중견기업의 풍경은 다르다.
오너가 있다.
그런데 오너가 감독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날은 오너가 덕아웃에 내려와 작전 지시를 한다.
어떤 날은 경기장까지 직접 뛰어 들어온다.
경계가 흐릿하다.
역할이 넘쳐흐른다.
중견기업 임원의 하루는 예측하기 어렵다.
아침에는 내년 사업 전략을 보고 받고
오전에는 핵심 고객사 미팅에 직접 나간다.
점심에는 팀원의 고민을 듣고
오후에는 갑자기 터진 현장 문제를 해결하러 뛴다.
저녁에는 채용 면접을 보고
퇴근길에는 오너의 전화를 받는다.
내일 또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
이 환경에서 살아남는 임원의 조건은 넓이다.
전략도 어느 정도 알아야 하고 영업도 뛸 수 있어야 한다.
사람도 관리해야 하고 재무 숫자도 읽어야 한다.
오너의 언어도 이해해야 하고 실무자의 고충도 감으로 알아야 한다.
좋게 말하면 팔방미인이고
솔직하게 말하면 만능 해결사다.
그리고 이 넓이는 단순히 아는 것이 많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떤 상황이 와도 무너지지 않고
판을 읽고
움직이고
결과를 만들어내는 적응력.
그것이 진짜 넓이다.
나도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중견기업이 더 힘들다고 생각했다.
역할이 많고, 구조가 불안정하고, 오너 변수까지 감당해야 하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대기업 임원의 어려움은 또 다른 차원에 있다.
수백, 수천 명의 경쟁자 속에서
자신의 전문성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조직이 크면 클수록
한 사람의 기여는 흐릿해지기 쉽다.
깊이를 유지하면서도
조직의 흐름을 읽고
위와 아래를 동시에 관리하는 것 역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어느 쪽이 더 힘들다는 답은 없다.
다만, 어떤 종류의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냐의 문제일 뿐이다.
한 가지를 끝없이 파고드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에너지를 얻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른 것은 아니다.
어느 야구장이 자신의 본능에 맞는가의 문제다.
나는 두 가지 야구를 모두 경험했다.
코치로서 한 포지션을 깊이 파던 시절이 있었고
플레잉코치로서 경기 중 배트를 들어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어느 쪽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배웠다.
자신이 어떤 경기에 맞는 선수인지 모른 채
덕아웃에 서 있는 것.
그것이 가장 위험하다.
깊이가 맞는 사람이 억지로 넓이를 감당하면
지치고,
넓이가 맞는 사람이 좁은 포지션에 갇히면
갑갑해진다.
성과도 잘 나지 않고 오래가지도 못한다.
지금 당신이 서 있는 덕아웃은 어디인가.
그리고 그 구장은
당신에게 맞는 경기를 하고 있는가.
야구는 같지만 경기는 언제나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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