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변호인〉이라는 프리즘으로 다시 본 노무현
한때 나는 그를 바보라고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불리는 데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았다.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은 너무 익숙했다.
언론도, 사람들도, 심지어 지지자들까지 그를 그렇게 불렀다. 나는 그 말의 무게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살아 있을 때, 나는 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2013년, 한 편의 영화가 극장가를 뒤흔들었다.
누적 관객 1136만 명, 한국 영화사 아홉 번째 천만 영화.
양우석 감독의 〈변호인〉이다.
평점 9.3이라는 압도적 호평 속에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던 이 작품은,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다시 대중 앞에 섰다.
설 연휴 초입,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며 나는 자연스럽게 그날을 떠올렸다.
나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감명 깊게 봤었다.
영화관을 나서던 날, 마음이 오래도록 가라앉지 않았다.
송강호 배우의 연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촘촘하게 쌓아 올린 서사와 연출의 힘이었을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내 마음을 흔든 건
영화적 완성도만은 아니었다.
그 속에서 비춰진 한 인간의 얼굴이었다.
돈 잘 버는 세무 변호사로 안주할 수도 있었던 사람.
굳이 위험한 사건에 발을 들이지 않아도 되었던 사람.
그러나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던 사람.
타협하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
쉽게 돌아가지 않는 사람.
손해를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사람.
그 모습이 스크린을 넘어 현실의 노무현과 겹쳐졌다.
조금만 계산했더라면 덜 다쳤을 것이다.
조금만 유연했더라면 덜 미움받았을 것이다.
조금만 현실적이었더라면 덜 외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정치적 위기 속에서도,
그는 말과 행동의 간격을 줄이려 했다.
상황에 따라 입장을 바꾸기보다 스스로 세운 기준에
맞추려 했다.
때로는 그것이 전략적으로 미숙해 보였고,
때로는 고집처럼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고 불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대개 손해 보지 않는 사람을 똑똑하다고 말한다.
타이밍 좋게 입장을 정리하는 사람을 유연하다고 말한다.
관계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타협하는 사람을
현실적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 기준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영화 〈변호인〉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해 그의 삶을
다시 바라보니, 그 일관성은 고집이 아니라 책임에 가까웠다. 권력을 쥐기 전에도, 권력을 내려놓은 뒤에도,
그는 늘 같은 질문을 붙들고 있었다.
원칙은 어디까지 지켜야 하는가, 국가는 누구의 편이어야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늘 자신에게 불리했다.
우리는 종종 영리함을 지혜로 착각한다.
하지만 어떤 선택은 계산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태도.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말을 바꾸지 않는 용기.
외로움을 감수하면서도 기준을 낮추지 않는 결기.
그것이 내가 뒤늦게 발견한 노무현 대통령의 본모습이었다.
영화는 한 시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 안에는 한 사람의 평생이 스며 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에서 인권 변호사로, 그리고 대통령으로. 그의 삶은 언제나 ‘유리한 길’보다 ‘옳다고 믿는 길’을 택해온 선택의 연속이었다.
10년이 지나 다시 이 영화를 떠올리는 지금, 그 메시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시대는 변했지만, 원칙과 타협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고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가 떠난 뒤에야 조금은 알게 되었다.
왜 그가 ‘바보’라고 불렸는지.
그리고 왜 그 별명이 역설처럼 들리는지.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어쩌면 우리는, 끝까지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를 쉽게 ‘바보’라고 불렀는지도 모른다.
〈변호인〉은 내게 한 정치인을 다시 보게 한 영화가 아니라, 한 인간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한 프리즘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별명을 조금 다르게 부른다.
바보가 아니라,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배신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