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은 단순히 달력이 바뀌는 날이 아니다.
시간의 한 귀퉁이가 조용히 접히고,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새 장이 펼쳐지는 순간이다.
‘설다’는 익숙하지 않다는 뜻이고,
‘낯설다’는 아직 길들여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설은
아직 나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시간,
처음 마주하는 세계다.
그래서 우리는 설날에 말을 아낀다.
행동을 단정히 하고,
서로에게 덕담을 건넨다.
새로운 시간과의 첫 관계 맺기이기 때문이다.
첫인상이 한 해의 빛깔을 정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우리는 그 낯선 시간을 공손히 맞이한다.
음력 새해 첫날.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가족과 함께 차례를 지내고
조상 산소에 다녀오는 길인가.
아니면 바닷가 근처의 카페 창가에 앉아
파도 위로 부서지는 빛을 바라보고 있는가.
혹은 강이나 호수의 잔잔한 수면 위에서
조용히 흔들리며 오래 반짝이는
윤슬을 만난 적은 없는가.
나는 밝은 오후, 한강을 산책하다가
강물 위로 부서지는 윤슬을 자주 본다.
바람이 잦아들고 햇살이 수면에 기울어 앉는 시간,
물결 위로 잘게 흩어지는 빛이
눈부시게 살아 움직인다.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좋다.
그저 걷다가 문득 걸음을 늦추고
한참을 바라보게 된다.
그 빛을 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시간도 저렇게 흘러가고 있구나.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구나.
스쳐 지나간 순간들도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반짝이고 있지 않을까.
윤슬은 요란하지 않다.
빛이 물을 만나
잠시 부서질 뿐이다.
그러나 그 반짝임은
오래 마음에 남는다.
설도 그렇다.
거창한 다짐이 아니어도 좋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한 해의 첫 빛을 마음에 얹는 것.
낯설지만 두렵지 않게.
잔잔하지만 오래도록 빛나게.
윤슬처럼 잔잔하지만 오래 빛나는
2026년, 빨간 말의 해 병오년이
우리 모두의 시간 위에
그렇게 내려앉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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