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일입니다. 당시 사귄 지 한 달 정도 된 남자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술에 잔뜩 취한 남자친구는 혀가 꼬여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과한 애정 표현을 했습니다.
남자친구는 본인이 취했을 때의 무방비한 모습도 사랑해 주길 내심 기대했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그 모습을 이해할 수 없음을 넘어 불편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저에게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참을 수 없는 한 가지는 절제력 부족입니다. 예를 들어, 술에 취해 몸을 못 가누거나 감정적 결핍, 현실 문제를 술에 의존해 회피하는 모습, 술에 취해 주변 사람들에게 피곤할 정도로 주정을 부리는 모습은 연인이라도 참기 힘들었습니다. 사랑한다면 상대의 그런 모습까지도 이해하고 인정해야 할 것 같았지만, 이해하려 노력할수록 불편한 마음이 커졌습니다.
"취했을 땐 술주정 안 했으면 좋겠어. 사랑한다는 말도, 나밖에 없다는 말도 술을 빌려하는 말들이 싫고 솔직히 말하면 부담스러워. 다신 이런 모습 안 보여줬으면 좋겠어."
그날 이후 남자친구와는 다른 이유로 헤어졌지만,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술에 취해 몸을 못 가누는 모습을 보면 사랑보다는 불쾌한 감정이 먼저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술을 마신 후 몸의 긴장이 풀리며 알딸딸해지는 그 느낌을 좋아하지만, 저는 그 느낌이 무섭습니다. 알코올의 영향으로 제 생각과 감정, 몸을 통제할 수 없는 기분이 들어 무력함을 느낍니다. 그런 느낌이 두려워 술을 자연스럽게 멀리하게 된 것 같습니다.
주사(注射) 혐오
저에게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이 중요합니다. 내 삶과 몸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불쾌함을 느낍니다. 주사(注射)를 무서워하게 된 이유도 이와 비슷합니다.
19년 전, 얼굴의 모반을 치료하기 위해 전신 마취를 해야 했습니다. 저는 원래 주사를 맞아도 울거나 무서워하지 않는 씩씩한 아이였지만, 마취 주사를 맞자마자 3초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이후 약 10번의 치료과정을 거치며 내 의지대로 몸을 통제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병원 치료"라는 단어만 들어도 공포를 느꼈고 병원 치료를 받는 날이면 긴장해 장이 꼬이고 식은땀을 흘렸습니다. 심하게 장이 꼬인 날은 치료를 미루고 집에 가기도 했습니다.
제가 주사(注射)와 술(酒邪)을 싫어하는 이유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통제할 수 없는 무력감에 대한 공포입니다. 그 공포는 의식이 있을 때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잠을 자거나 심리적으로 불안정할 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없어진 줄 알았던 트라우마가 무의식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에는 제가 이런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어, 예전만큼 주사와 술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를 지나치게 싫어하고 혐오하며 멀리한다면, 그 원인은 외부 요인이 아닌 내 마음속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마음 깊은 곳에 두려움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싫어할 확률이 높습니다. 자신이 정말로 혐오하는 것이 있다면, 그 혐오 안에 담긴 진짜 감정을 인지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주사와 술에 대한 혐오를 가졌던 것처럼요.
+ P.S 여전히 주사는 아프고 술주정도싫습니다. 하지만건강하기 위해 맞는 주사, 좋아하는 사람이 날 위해 부리는 주정은귀엽진 않지만...?전보다 조금은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