콤마상태가 갖는 위험성을 정리해보자.
첫째, 삶을 경험하지 못한다. 가령, 어떤 사람의 몸에 암세포가 생긴 경우를 가정해보자. 그는 아직까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자기 생활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건강검진도 받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암세포는 그 사람의 몸속에서 점점 더 퍼져가고 있다. 암세포를 발견하였을 때는 이미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한 말기 상태이다. 그는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이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무엇이 상태를 이렇게 악화시킨 것인가? 그것은 건강하다는 착각이었다. 암 바이러스를 조기에 발견했다면, 충분히 치유받을 수 있었다.
잘못된 착각은 목숨까지도 잃게 만든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 가지이다. 한 번뿐인 유한한 인생을 다 소진한 다음에야, 삶을 삶답게 살지 못했다고 후회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콤마상태에 있으면서도, 자신은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삶’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 자신은 평생 ‘생존’을 ‘삶’이라 착각하며, 일생을 다 낭비해 버릴 수 있다. 자신이 경험하는 것이 삶이라 착각하기에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착각은 자유지만, 착각에 대한 결과와 책임은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둘째, 모든 것이 헛수고다. 인생을 농사에 비유해보자. 농부가 농사를 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씨 뿌리는 일이 아니다. 씨를 뿌리기 전에 밭을 일궈야 한다. 밭에 있는 여러 잡초와 돌을 빼내야 한다. 씨앗이 뿌리를 내려가는데 잡초와 돌 때문에 막힐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비료도 듬뿍 뿌려서 밭의 영양상태가 좋도록 만들어야 한다. 씨앗이 밭의 영양소를 흡수하여 더 건강하게 크기 위해서이다. 밭이 안 좋으면 아무리 좋은 씨앗도 열매 맺어 자라지 못한다. 콤마상태는 온갖 잡초와 돌들로 가득한 밭의 상태와 같다. 초중고 12년 동안 배웠던 그 무수한 지식과 여러 경험들의 씨앗이 탐스러운 극상품 열매로 자라지 못하는 이유는 콤마상태 때문이다.
셋째. 기계에게 지배된다. 사람으로서의 존재와 살아가는 삶의 가치가 기계보다 열등해질 수 있다. 인공지능기술은 갈수록 발달하고 있고, 로봇은 인간이 수행하는 거의 대부분의 직업기능을 대체하고 있다. 어떠한 직업 분야에서든 인간이 로봇과 경쟁하여 이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면 공상과학영화가 현실이 되어, 로봇의 명령을 따라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 신세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러한 현실을 가상세계로 도피하여 말초적인 쾌락에만 탐닉하여, 더 심한 콤마상태가 될 수 있다.
넷째, 동물보다 못하게 된다. 2014년 4월 16일, 304명의 사망자를 낸 세월호 침몰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건이 더 큰 충격을 주는 이유는 사망자의 대부분이 고등학생들이라는 사실이다. 그 사건에서 선장은 구조활동을 펼치기보다는 자신이 가장 먼저 탈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는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세월호 선장의 행동을 보여주며, 학생들에게 질문한다.
"선장의 행동을 볼 때, 선장은 사람입니까? 동물입니까?"
학생들은 대답한다. "동물보다 못해요"
이뿐 아니다. 신생아를 냉장고에 버리는 젊은 부모, 여아를 성폭행하는 범죄 등 동물보다 못한 사람들이 벌이는 수많은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또 해서는 안될 행동들이 있다. 그런데 그런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사람의 겉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정신은 동물보다 못하다. 사람보다 나은 행동을 하는 동물이 있고, 동물보다 못한 짓을 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도 동물보다 못하고 싶지 않지만, 그 사람의 의식상태가 계속 콤마상태에 있게 되면, 그는 짐승 같은 행동을 선택을 하게 된다.
코마상태의 경우, 그 기간이 길어질수록 회복은 어려워진다. 콤마상태도 마찬가지이다. 최대한 빨리 자신의 상태를 진단하고 회복되어야 한다. 학생들을 만나보면 초등학교 3, 4학년만 되어도 벌써 마음이 굳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굳어진 가치관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십대라는 인생의 시간은 골든타임이다. 어릴수록 좋다.
또한 콤마상태는 한 번 회복되었다고 해서, 영구적으로 그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시간마다, 분초 단위로 의식의 상태가 바뀐다. 의식상태를 잘 관리하지 못하면 회복되었다가도 금세 다시 콤마상태로 떨어진다. 의식의 회복은 떨어지는 시간적 간격이 좁아지고, 덜어지는 의식의 폭도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콤마상태를 회복하는 터닝 포인트에 대해서는 마지막 장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문명화된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대부분 비슷하다.
사람마다 얼마간의 시간차가 있긴 하지만, 큰 틀은 위의 그림과 동일하다. 태어나서 3년 정도 집에 있다가, 어린이집부터 시작해서 대학교까지 20년 정도 학교를 다닌다. 그리고 30년 정도 직장을 다니면서 일을 한다. 그 사이, 자녀를 낳고 교육도 시킨다. 그리고 퇴사 이후에 나이가 들면 몸이 아파오면서 병원에 있다가 생을 마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큰 인생의 틀 안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하루의 모습도 대부분 똑같다. 하루의 2/3는 자고 일하는 데 사용한다. 나머지 1/3로 밥도 먹고 TV도 본다. 이렇게 놓고 보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별것 아닌가? 이렇게 큰 틀 속에서 하루라는 작은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특별히 다른 인생의 패턴은 없다. 이게 전부다. 지구 상의 어떤 위인도 콧물 찔찔 흘리는 아기 때가 있었고, 하루하루 먹고 자고 일하며 살다가 나이가 들어 죽었다.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십 대들의 생활이 너무 반복적이라고 불평하지만, 인생은 본래 반복적이다. 어른이 되어도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어른이 되면 안정적으로 반복되는 생활을 동경하여, 어떻게든 정규직이나 공무원이 되려고 난리이지 않는가! 결국 남겨진 문제는 반복적인 인생의 패턴을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 것인 가의 선택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에는 생존과 삶이라는 2가지 방식이 있다. 생존은 동물이 살아가는 방식이고, 삶은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런데 사람도 삶을 살지 못하고 생존의 방식으로 사는 경우가 생긴다. 그것은 그의 의식 수준이 콤마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콤마 상태의 사람이 아무리 부유하고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는 동물적인 생존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삶을 ‘생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다 먹고살려고 하는 짓”이라는 이야기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먹고사는 것’이다. 살기 위해 먹는 게 아니라 먹기 위해 사는 것이다. 생존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없다. 생존 그 자체가 목적이지, 생존해야 할 그 이상의 목적은 없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모든 생계유지 활동을 생존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돈을 벌고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생존이 될 수도 있고, 삶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삶이 생존이 되어버리면, 칼 마르크스가 150여 년 전에 예언했던 4가지 소외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소외는 미래의 직업생활뿐만 아니라 현재의 학교생활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첫째, 직업(교육) 활동으로부터의 소외이다. 직업은 생계유지를 위한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다. 무슨 일 하느냐, 그 일을 통해 어떤 의미를 느끼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떤 보상을 받느냐이다. 교사에게 의미가 되는 것은 가르치는 활동이나 학생들이 아니라 정년 보장과 월급과 연금이라는 경제적 보상만이 의미를 가진다. 학생들 입장에서도 학교 교육 기간은 상급학교를 진학하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갖지 못한다.
둘째, 직업(교육) 생산물로부터의 소외이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여러 가지 지식을 생산하여 전달하지만, 그 지식이 교사 자신에게 의미 있지도 않고, 학생들이 그 지식을 얼마큼 받아들이느냐도 그리 중요한 문제가 되지 못한다. 학생들 편에서도 열심히 익히고 암기한 교과지식들은 자신의 생활과는 아무런 의미 연결이 되지 않는다.
셋째, 동료들로부터의 소외이다. 직장에서 일하는 동안은 친한 척 하지만, 퇴근하면 끝이다. 아주 계산적이고 경쟁적인 인간관계를 맺는다. 조직 내에서 부처들 간에 업무를 떠넘기거나 소통하지 않는 ‘부처 간 칸막이’ 증상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공동의 목적을 이루어간다는 유대감은 조금도 찾을 수 없다. 학교교육에서도 친구들은 성적을 놓고 경쟁해야 하고, 겉으로는 어울리지만 마음을 나눌 친구를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넷째, 일을 통한 자아실현의 기회로부터의 소외이다. 사람은 동료들과 관계를 맺고 협력하는 생산활동과 그 생산물을 통해 자아실현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 사람이 하는 일이 곧 자기를 반영하는 결과물인 것이다. 그 사람이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과 삶의 연결이 완전히 차단되어버린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소외의 원인을 사회구조에서 찾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콤마상태와 같은 낮은 의식 수준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의식 수준이 높아진다면 소외의 반대 경험을 얼마든지 맛볼 수 있다.
생존으로서의 삶은 ‘살아 있다’가 아닌 그냥 ‘있다’이다. 영어로 표현하면, 리빙 Living이 아니라 빙 Being이다. Being은 ‘존재하다. (어디에) 있다.’라는 뜻을 가진다. 특정 공간에 특정 시간 동안 머무르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사물들을 보라. 그대가 쓰고 있는 학용품, 교재, 가구들은 모두 일정한 기간 동안 사용한 이후에 버려지게 된다. 어떤 특정한 물건에는 애착을 느끼고 추억으로 간직할 수도 있겠지만 극소수이다.
내가 매일 사용해서 점점 더 없어지고 있는 지우개의 존재는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 지우개가 존재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남지 않는다. 그렇게 하나의 지우개는 사라지고, 또 다른 지우개가 등장한다. 그렇게 우리 주변의 수많은 물건들은 왔다 간다. 이것이 Being의 방식으로 생존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람도 똑같이,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직장으로, 직장에서 병원으로 위치 이동을 하며, 지우개처럼 점점 낡아간다. 그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 사람도 지우개처럼 어떤 이의 기억 속에도 남아 있지 못한다. 지구라는 별, 한국이라는 땅 그보다 더 작은 어느 한 귀퉁이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우주의 먼지로 사라졌을 뿐이다. 혹 누군가가 이 사람을 찾아 삶을 살펴본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냥 먹고, 그냥 자고, 그냥 일하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일생을 분주히 움직였지만, 여름날 귓가를 빙~ 소리를 내며 맴돌다가 죽어버리는 하루살이처럼,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못한 채 소멸해 버린다. 체코 작가 밀란 쿤데 Milan Kundera라의 표제처럼, 정말 지독히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한 승려의 마지막 유언처럼, ‘괜히 왔다 간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다.
이제 진짜 삶을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