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드디어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의 핵심으로 들어왔다. 삶의 마침표 앞에서도 서성여 보고, 삶의 쉼표 안으로 들어가 보기도 했다. 이제는 삶을 그 자체로 느껴볼 차례이다.
삶은 무엇인가? 삶을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삶은 예술이다. 우리가 가진 생명이 가장 고귀한 예술의 재료이며, 우리 삶의 모든 순간순간이 예술의 과정이다. 또한 우리가 살았던 삶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이다. 예술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특별한 기교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이다. 또는 '아름답고 높은 경지에 이른 숙련된 기술'이라는 뜻이 있다. 그 핵심은 아름다움이다. 사람의 존재와 삶 속에 베여있는 아름다움을 완성해가는 활동이 예술이며 삶이다. 즉, 삶은 아름다움의 연속이다.
설탕은 단맛, 소금은 짠맛이 난다. 그렇다면 삶은 어떤 맛이 느껴질까? 삶을 맛보면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설탕을 먹었는데 단맛이 안 나고, 소금을 먹었는데 짠맛이 안 난다면 더 이상 그것은 설탕과 소금이 아니다. 그 고유의 맛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똑같은 원리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데,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 순간만큼은 삶이 아니다. 생존일 뿐이다.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쓸데없는 것처럼,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삶은 낭비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구체적인 언어가 아닌 어떤 탄성으로 먼저 표현된다. 마음의 느낌이다. 살다가 누군가로부터 큰 감동을 받게 되면, 어떤 말이 아니라 눈물이 먼저 흐르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그 뜨거운 눈물은 수많은 말로도, 어떤 표현으로도 담아낼 수 없는 진실함을 가고 있다. 이처럼 언어 이상의 감격, 환희의 느낌이 아름다움이다.
5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예언자》를 집필한 칼릴 지브란이 나눈 대화는 삶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많은 영감을 준다. 그가 폐허가 된 한 사원을 구경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무너진 기둥에 걸터앉아 무언가를 향해 깊이 응시하고 있었다. 이때 지브란이 질문한다.
“무엇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삶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것뿐인가요?”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은가요?”
그리고 칼릴 지브란은 이렇게 노래한다.
“오 삶이여, 아름다운 삶이여, 경이로운 삶이여”
삶에 대한 칼릴 지브란의 대화를 들으면서 “어제나 오늘이나 다 그게 그거지, 뭔 소리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 오늘과 똑같은 내일을 경험하며 사는 이들에게는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삶에 대해 거짓말하거나 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하루살이에게 내일을 말하는 것처럼, 그대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을 겸손하게 따져보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20세기 세계 문학사의 거장 제임스 조이스(James A. A. Joyce)의 자서전적 소설인《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그는 바닷가에선 한 소녀를 통해, ‘인간의 아름다움이 가지는 경이로움’이 느껴졌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은 독일의 천재 문학가 괴테(Johann W. v Goethe)가 60년에 걸쳐 완성한 작품《파우스트》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추구하면서도 끝내 만족할 수 없었던 파우스트 박사는 악마와 특별한 계약을 맺게 된다. 계약의 내용은 만약 자신이 삶을 향해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는 참 아름답구나”라고 고백한다면,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가져가도 좋다고 약속한 것이다. 무모한 약속이었지만, 자신의 영혼을 걸고서라도 삶의 아름다움을 원했던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파우스트처럼 악마와 계약을 맺을 필요는 없겠지만, 그대에게도 이러한 열망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번뿐인 인생에서 어떤 순간을 향해, “멈추어라”라고 외칠 만큼, 아름다운 순간을 경험해 보고 싶지 않은가!
할 수만 있다면, 매일의 삶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가.
이것이 삶이다. 이토록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 그대에게 주어져 있는 삶이다. 그대가 아직 경험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다르게 비유하자면, 아름다움은 공기와 같다. 그래서 공기를 뜻하는 영어단어 에트머스피어 atmosphere는 분위기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다. 즉, 그 공간의 분위기는 우리에게 공기와 같은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다. 실제로 공기가 부족한 상황이 아닌데, 사람들은 ‘숨 막힐 것 같다.’라고 표현할 때가 있다. 이는 그 공간의 분위기가 숨을 쉬지 못할 때의 답답함처럼 느껴진 것이다.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않는 분위기는 공기가 부족한 상태와 같은 것이다. 우리의 몸은 물리적인 산소만 있으면 되지만, 우리의 마음은 아름다움의 분위기를 필요로 한다. 인류가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아름다운 별 지구에서 산소가 결핍된 곳이 아무 데도 없는 것처럼, 아름다움은 모든 대지에 충만하게 존재하고 있다. 이제 이 아름다움을 들이마시기만 하면 된다.
한국의 스티븐 호킹이라 불리는 서울대 이상묵 교수는 사막에서 지질조사를 하던 중 자동차 전복사고로 전신마비가 된다. 함께 동행했던 제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해도 삶은 아름다움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전동 휠체어에 의지하여 대학 강단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경험담을 엮어 펴낸《0.1그램의 희망》의 표제의 한 부분을 이렇게 장식한다.
“삶의 매 순간은 신성하다.”
나는 정말 눈물이 나도록 고맙다. 인간 삶의 표준을 지켜준 그에게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하게 된다. 할 수만 있다면 거절 하고 싶은 축복이지만, 그에게 이러한 역경이 없었다면, 그의 고백과 삶이 이토록 아름답고 경이로워 보일 수 있었을까. 이제 그대에게 남겨지는 숙제는 무엇인가?
이토록 절망적인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고 견뎌내는 것으로 증명된 삶의 신성함 안으로 들어가 것이다.
삶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여기’에 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삶은 오로지 지금-여기뿐이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 구분은 관념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존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시간은 연속선상에 있다. 현재는 인식되는 순간 과거가 되어버린다. 0.01초 뒤의 시간도 미래이지만, 인식하는 순간 현재와 과거로 변해버린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다. 지금-여기라는 찰나와 같은 순간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순간들만이 우리 삶의 진정한 실재이다.
그러므로 그 순간순간을 느끼려 해야 한다. 느끼려 하지 않으면, 그 순간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없고, 그것은 삶이 되지 못한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순간만큼만 삶이 된다. 삶은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고 선언한다. ‘지금-여기’에 있는 아름다움을 찾고, 그 아름다움이 경험되고 있는지 아닌지를 끊임없이 성찰해야만 한다. 그 아름다움의 순간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삶이다. ‘순간’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인생’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간순간’을 소홀히 여긴다.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음미하지 않는다. 생존의 방식에 젖어 삶의 방식을 완전히 잃어버린 듯하다.
무성영화 시기 세계적인 인기를 누린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 Charles Chaplin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너무 많이 생각하고 너무 조금 느낀다. 인생은 가까이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없이 바쁘게 보낸다. 그런 하루들이 모여 일주, 일 년, 일생이 흘러가고 있다.
하루라는 시간 동안에도 수많은 사건과 생각, 감정들이 발생한다. 우리는 분명히 그 한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거의 그 맛을 느끼지 못한다. 안 좋은 일이면 안 좋은 대로, 좋은 일이면 좋은 대로 그 모든 사건은 삶을 더욱 맛나게 하는 재료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미각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삶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많은 이들의 가슴에 오랜 여운을 남긴 영화《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주인공 키딩 선생님은 입시에 매몰되어 있는 학생들에게 까르페 디엠 “Carpe Diem”이라고 외친다. 파우스트 박사가 했던 것처럼 “지금 이 순간을 잡으라”는 의미이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위해서 지금 이 순간의 아름다움을 놓이지 말라는 것이다. 초중고 12년은 빨리 통과해야 할 어두운 터널이 아니라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순간이다.
그러나 그 순간의 외양이 항상 쉽고 편안한 모습이 아니라 거칠고 어려울 때가 있기 때문에 혼돈이 생긴다. 까르페 디엠을 ‘현재를 즐기라’라는 의미로 왜곡하여 불편함과 어려움을 피하거나 거절하는 쪽으로 가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더 까르페 디엠 하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현재의 아름다움을 바꾸지 않는 능력이 까르페 디엠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까르페 디엠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어른이 되기 전에는 빨리 어른이 되는 것을 고대하지만, 막상 어른이 되어서는 그때가 좋아더라며 신세타령을 한다. 이것은 정말 최악의 시나리오이다. 인생 실종이다. 그런데 이런 시행착오가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더 가슴 무겁게 하는 사실은 이 길에 똑같이 들어서고 있는 수많은 십대들의 행렬이다. 어른이라는 신기루를 안고 십대의 시간을 어떻게든 참고 견디려 한다.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미래의 어떤 모습을 정해 놓고,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 채 자기 눈 앞에 잠시 찾아와 머물러 있는 그 순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해 버린다.
누가 이 피리 부는 사나이의 저주를 끊을 수 있겠는가!
지금-여기에 계속 집중하는 삶을 살면 ‘같은 공간, 다른 영역’을 체험하게 된다. 즉 몸은 교실에 있는데, 정신은 에베레스트 정상에 서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딴생각을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딴생각은 지금-여기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여 회피하는 것일 뿐이지만, ‘같은 공간, 다른 영역’은 일종에 가상현실 기기(VR)를 착용하는 것과 비슷하다. 몸에 장애가 있어서 집 밖을 나갈 수 없는 사람이 가상현실 기기를 통해 번지점프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실제로 번지점프를 한 것처럼, 엄청난 흥분을 느끼게 된다. 분명히 집 안에 있는데, 집 밖의 경험을 한 것이다.
‘같은’ 교실에서, ‘같은’ 사람으로부터,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지루해하고, 어떤 사람은 아름다움을 경험한다. 이러한 경험의 차이는 그 사람의 반응의 차이 때문이다. 별것 없어 보이는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다른 영역’으로 들어가 특별함을 만들어 낸다.
나는 강의를 하면서 이러한 경험을 자주 체험한다. 사람들에게 삶의 맛을 느끼도록 강의를 하다 보면, 크게 2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생긴다. 나의 말을 귀로만 듣고 그냥 그 공간에 계속 있는 사람과 나의 말을 링크 link로 연결하여 다른 영역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러면 어김없이 그 사람은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맛보게 된다.
이렇게 아름다움을 맛볼 때, 또 하나의 특징은 시간이 매우 빨리 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엄청 느리게 가는 것 같은 그 시간이 ‘다른 영역’으로 들어간 사람에게는 매우 빨리 흘러간다. 그래서 1시간이 10분처럼 느껴진다. 게임을 할 때 느끼는 것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빠져서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그런데 그런 경험이 게임이 아닌 공부와 삶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시공간의 변화가 일어나버린다. 이러한 경험은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지 않고 관측자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맥을 같이 한다.
인간 의식이 고도로 집중된 상태인 ‘몰입’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경험을 ‘in the zone’이라고 표현한다. 운동선수들이 그 운동 상황에 고도로 집중하여 빠져드는 상태에서 빌려온 표현이다. 우리의 일상생활도 마찬 가지이다. ‘지금-여기’에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 집중하여 들어가면, 우리는 새로운 Zone, 영역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집이라는 공간 안에 있다가, 이 Zone 안으로 들어가면, 똑같은 집이 다르게 보인다. 아름답게 보인다. 같은 공간 안에 다른 영역이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 비유처럼, 나의 갈망은 멍하게 살아가고 있는 십대들을 이 Zone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 안에서 새로운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경험시켜 주고 싶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 더 깊은 곳을 향한 열망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을 보고 싶다. 아무도 가보지 못했던 원시림을 개척하듯 들어가, 그곳에서 인류를 진보시키는 새로운 통찰, 세렌디피티 serendipity를 가지고 돌아오는 것을 보고 싶다. 그래서 우리의 가정과 학교, 사회 전체가 이러한 Zone으로 변화되기를 바란다.
이 영역은 처음에는 작은 시공간을 차지하지만 점점 더 확장되게 된다. 세미나에서 ‘같은 공간, 다른 영역’을 경험한 학생들과 애프터 모임을 가질 때의 일이다. 한 커피숍에서 만나 대화를 시작하는데, Zone 안으로 들어가는 대화가 잘 풀어지지 않았다. 커피숍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처럼 그저 시끌벅쩍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점점 더 대화가 깊어지면서, Zone 안으로 들어가 아름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별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느꼈던 커피숍의 산만한 분위기와 우리가 만들어낸 분위기는 충돌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소리들이 참기 힘든 소음으로 변했다. 그 순간 나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 공간이 우리를 담아내 지를 못한다.”
그 공간을 떠나거나 그 공간을 우리가 경험하는 분위기로 새롭게 창조하지 않는 한 더 이상 그 공간에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삶을 이루는 시공간은 아름다움의 확장이 일어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