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들에게 자신의 값을 돈으로 말해 보라고 하면, 옆 친구를 골탕 먹이고 싶은 마음에 O원이라고 말하는 아이들부터 시작해서 경쟁하듯 금액이 올라간다. 결국 도달하는 대답은 ‘너무 비싸서 살 수 없다’는 것으로 모이게 된다. 너무 뻔한 결론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는 엄청난 혼돈이 숨어있다.
사람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절대적 가치를 가진다. 그러한 사람의 가치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늘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천부인권’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존엄함은 국가나 그 어떤 세력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가치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최고법인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헌법 10조)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여 측정한다는 발상 자체가 틀린 것이다. 그러나 교과서밖에 현실 세계는 온통 틀린 발상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옳은 생각은 교과서 속에서나 찾을 수 있다.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생들은 알게 된다. 그래서 옳은 생각을 버리고, 현실을 따라간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어떤 것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된다. 가치가 많을수록 그 가격은 더 높아지고, 가치가 없을수록 가격은 낮아진다. 사람의 가치도 연봉, 월급, 시급이라는 가격으로 측정된다. 그래서 ‘몸값’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몸값이 사람마다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 혼란을 가져다준다. 똑같은 시간을 일하는데, 아니 더 많은 시간을 더 힘들고 더 어렵게 일하는데, 훨씬 더 적은 보상을 받게 된다. 이러한 갈등을 줄이기 위해 ‘최저임금제도’를 통해, 어떤 사람의 한 시간 가치는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기준을 정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정해 놓아도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본다면, 밀려오는 서글픔을 막을 길이 없다. 그럼에도 최저임금제에서 얼마라도 인상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오랜 시간 투쟁하고 있다.
한 시간 동안, 나는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웃고 싶지 않아도 웃어야 되고, 말하고 싶지 않아도 말해야 되고, 서 있고 싶지 않아도 서 있어야만 한다. 그러고 있으면, 자신의 존재가치가 시간당 그 얼마의 가격으로 정해지는 것 같은 운명의 굴레를 느끼게 된다. 상황이 이쯤 되면, 정체성의 혼란이 생기기 시작한다. “어 이상하다. 내 마음속에 그랜드 케년보다 더 아름다운 대자연이 있다고 했는데, 학교에서 천부인권이라고 배웠는데, 현실은 무언가 다른 건가? 나하고 저 사람은 가치가 다른 건가?”하고 생각하게 된다.
나 역시, 직장이 없던 기간에 이전 직장의 상사가 전화 와서 이렇게 말했다. “4개월짜리 있는데 한번 해볼래?” 나를 생각해준 고마운 제안이었지만, 그 말은 내게 이렇게 들렸다.
"너는 4개월 짜리야"
그런 의도로 말하지 않았겠지만, 그 말은 나의 가치가 ‘4개월짜리’인 것처럼 느껴지도록 들렸다. 학교 밖 사회에서는 그 사람의 소득과 지위에 따라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나 다르다. 이러한 경험들로 가득 찬 현실세계에서 ‘사람다움 ’의 가치를 지켜가는 것은 여간 쉽지 않은 일이 분명하다.
앞에서는 그랜드 케년을 말해 놓고는 지금은 4개월짜리 현실을 말하니 혼란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정체성의 혼란은 십대 시절에 꼭 거쳐야 하는 유익한 경험이다. 그대가 사람다움에 대한 견고한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이 혼란을 바로잡을 수 있어야만 한다. 혼란은 이상과 현실, 양쪽의 경험을 가진 사람만이 겪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그대에게 이상과 현실을 모두 제시하는 이유이다.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위기가 없다면, 그대는 자신의 사람다움에 대해 치열한 고민 없이 십대의 시간을 그냥 평온하게 통과해버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정체성 이론으로 유명한 발달심리학자 제임스 마샬(James E. Marcia)은 정체성 단계를 4가지로 구분하며, 위기를 경험하는 중요성을 설명한다.
이상과 현실의 혼돈이 그대 앞에 놓여있다. 두려워하지 말고 치열하게 고민하며 그 한가운데로 걸어가라.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정체성 혼란의 상황은 마크 트웨인의 소설《왕자와 거지》를 연상시킨다. 소설에서 왕자 에드워드 튜터와 거지 켄트 톰은 옷을 바꿔 입으면서 역할이 바뀌게 된다. 왕자는 거지 생활을 하고, 거지는 왕자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해프닝이 일어나게 되고, 결국 에드워드가 왕위를 되찾아오는 내용으로 마친다. 만약 소설 속에서 에드워드가 거지 생활에 익숙해져서 안주해버리고, 왕위를 찾는 시도를 포기해버렸다면, 에드워드의 인생은 거지로 마치게 되었을 것이다.
에드워드가 왕궁에 있든 거지 옷을 입고 있든, 그는 왕자이다. 에드워드가 왕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문제는 에드워드가 거지 생활 속에서도 왕자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왕자의 품격에 맞는 생활을 하며, 왕이 될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대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대가 받게 될 연봉과 월급의 액수가 그대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절대적인 존재가치는 에드워즈가 왕자인 것처럼,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실의 생활이 아무리 고달프고 힘들어도 ‘사람다움’의 가치를 타협해서는 안 된다.
그대 안에 그랜드 케니언이 있다. 이 사실에 근거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하루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나가야 한다. 그러면 에드워즈가 왕위를 되찾은 것처럼, 내 안에 있던 그랜드 케니언이 내 밖으로 드러나서 모두가 보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정체성이 삶의 방식을 결정한다. 거지 톰이 아무리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춘다 할지라도 그는 거지이다. 그대는 거지가 아니라 왕자로 태어났다. 그것이 모든 이들에게 부여된 사람다움의 가치이다.
영화《나니아 연대기》를 보면, 주인공인 4명의 아이들이 나니아로 들어가게 되면, 나니아의 사람들이 아이들을 왕으로 영접하며 모두 바닥에 엎드리는 장면이 나온다. 비록 현실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상을 상상으로 그려낸 것이지만,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사람으로서 누려야 할 영광이다. 수십 년 전의 공상과학 영화가 지금은 기술 발달로 인해 현실이 되어 있는 것처럼, 사람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상관없이 서로의 사람다움을 존중하는 사회를 상상하며 만들어가야 한다. 헌법 10조가 법조문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모든 사람들의 정체성과 삶, 우리 사회의 문화에서 생생하게 움직여지는 것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는 형상을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형상과 같아지려 한다”라고 했다. '사람'이란 존재는 그 ‘사람다움’에 걸맞은 '삶'을 덧입기를 항상 갈망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내면이 ‘사람다움’을 경험하지 못하는데, 삶의 아름다움을 추구할 가능성은 없다.
사람의 아름다움은 어떤 것인가? 단순히 외모가 잘 생겼거나 예쁘다고 해서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다. 화려한 옷을 입고 값비싼 액세서리로 꾸민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많은 돈을 벌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고, 유명해진다고 해서 아름다워지는 것도 아니다. 아름다움은 내면에서부터 솟아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과 자신의 삶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일치되기를 갈망하게 된다. 자기 내면의 아름다움이 잘 드러나는 방식으로 삶을 구성하고 싶어 진다. 그래서 어질러진 책상을 보면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껴지고, 깔끔하게 정돈하고 싶어 진다. 말을 한마디 하더라도, 옷을 하나 입더라도, 그 아름다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상태를 좋아하지 않게 되는 것다.
그대가 최상의 존재가 되어 최상의 삶을 사는데 가장 큰 방해물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느 정도 괜찮은 삶이다. ‘Best’의 적은 항상 ‘Good’이다. ‘Bad'가 아니다. 남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나름 만족하며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거지가 된 왕자가 왕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거지 생활에 만족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과연 왕위를 포기하고 거지 생활에 만족한 왕자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십대 청소년들에게 사람의 존재와 삶에 대한 아름다움의 표준을 제시하면 대부분 하는 말이 있다. “저는 그런 것 까지는 바라지 않아요. 그냥 행복하게 살면 좋겠어요” 그러면 나는 그 학생들의 눈을 바라보며 단호히 말한다. “그렇게 살면, 절대로 행복을 경험할 수 없다고”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났다. 사람이 가진 생명을 다 쏟아부어야만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언제 자신이 가진 모든 에너지를 다 쏟을 만큼 열정적이게 되는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와 현실의 차이가 분명할 때이다. 그 간격이 열정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사람다움’이란 목표가 너무 이상적으로 보여도, 지키고 있어야 되는 이유이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것이 행복의 전부라고 착각하거나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거지가 된 왕자가 거지 생활에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결코 어느 정도 괜찮은 삶을 사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런 삶을 살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하버드 대학교를 중퇴하고 마이크로소프트사 입사하여, 빌 게이츠의 개인적인 기술 조언자 역할을 하며, MS-Word를 최초로 개발한 리처드 브로디 Richard Brodie는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그럭저럭 살고 있는 것 같아. 그 반대편에는 어떤 삶이 있을까?” 그리고 그는 안정된 직장의 억대 연봉을 포기하고 의미 있는 삶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 나선 자신의 삶을 책으로 출판했는데, 그 제목이《나는 그럭저럭 살지 않기로 했다》이다. 브로디와 같이 아무리 화려한 성공을 거두어도 그 안에는 사람다움과 삶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고향을 찾는 연어처럼, 사람다움을 찾아 회귀하게 되어 있다.
‘호모 사피엔스’는 사람을 다양한 생물들 중에서 하나의 종으로 분류하여 표현한 말이다. 그 뜻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사람은 그 지혜를 이용해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를 주관하는 ‘만물의 영장’으로서 군림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질문해 보자.
사람은 정말 지혜로운가? 이 세계를 보다 좋은 방향으로 리드하고 있는가? 인류 역사에서는 이 질문에 확신을 가지기 어려운 여러 사건들이 너무 많이 있었다. 도저히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자연 생태계를 파괴시켰다. 동물들도 자기 종 간에는 싸움을 하지 않는데, 세계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도록 하였다. 모든 사회 집단에서 사기, 절도, 폭행 등 동물 이하의 범죄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아무런 노력 없이 자동적으로 지혜로워지고, 만물의 영장으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다움을 향한 끝없는 추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다움의 또 다른 일면은 외부세계에 대한 외경심과 겸손이다. 이러한 태도는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지위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더 견고하게 만드는 자질이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선언하며, 주체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가장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추앙했던 그의 탁월한 학문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람의 지혜가 오만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증거가 되었다. 그는 “동물들은 오감이 없어서 통증도 느낄 수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함으로써 동물학대의 문을 열어주게 된다.
반면,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의 지혜에 대해서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그것이 ‘생각하는 갈대’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것, 갈대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는 생각하는 갈대다. 그를 으스러뜨리는 데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 그를 죽이는 데 한 줌의 증기, 한 방울의 물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만약 우주가 그를 으스러뜨린다 해도, 그는 여전히 그를 살해한 그것보다 고귀하리라. 왜냐하면 그는 그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우주가 그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걸 알지만, 우주는 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
생각하는 갈대는 흔들린다.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지위와 자신의 한계 사이에서의 갈등이다. 우주 공간에서 한 줌의 티끌보다 작은 존재가 온 세계를 다스려야 한다. 그러기에 끊임없이 생각하고 탐구하여 세계를 바르게 이해하고자 힘쓸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겸손이 진정한 지혜이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았던 호모 사피엔스들은 결국 개인과 사회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