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따라왔다. 삶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사람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게 된다. 삶은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기 때문에 사람과 삶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그러기에 삶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갖기 위해서는 사람에 대한 탐색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사람의 존재에 대한 본능적 관심은 오랜 연구를 거쳐 인문학으로 정립되었고, 야만인(Babaritas)과 대비되는 사람다운 사람의 특성을 후마니타스 Humanitas, '사람다움'으로 규정하였다. 삶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다움의 본질이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 사람이란 뿌리가 아름답기 때문에, 삶이란 열매도 아름다울 수 있다. 삶과 사람다움은 아름다움으로 연결되어 있다.
인생에서 아름다움이 경험되지 않는다면, 그의 삶은 더 이상 삶이 아니며 생존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사람은 아무리 호화로운 생존 환경에서 산다할지라도 사람은 생존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는 삶을 찾게 되어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이 계속해서 생존의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의 상태가 사람다움을 잃어버리고 동물적 상태로 전락했다는 반증이다. 그때는 그 사람의 존재와 생존에서는 아름다움이 아닌 추함이 드러나게 된다.
프랑스의 소설가인 폴 부르제 Paul bourget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고 했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일평생 단 한 번의 아름다움도 경험하지 못한 채, 생존을 위해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삶과 사람다움에 대한 아무런 기준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인생은 원래 다 그런 거야’, ‘사람은 다 그래’, ‘한 번 살아봐’라고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다. 삶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그렇게 ‘생각’ 하기 때문에 그의 ‘경험’이 그런 것이다. 그대 주변의 많은 이들이 살아가는 대로 생각하며 살 것인지, 다른 기준을 설정하고 추구하며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자신의 존재와 삶에서 나타나는 추함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결코 사람다움을 지켜낼 수 없다. 삶의 마침표를 가장 아름다운 정점으로 찍을 수도 없다.
사람의 내면에는 진실과 거짓, 선과 악, 미와 추가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이중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다움의 본질은 거짓이나 악, 추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선, 아름다움에 있다. 인생의 여정은 진실 대 거짓, 선 대 악, 아름다움 대 추함의 끝없는 전쟁이다. 사람다움을 지켜간다는 것은 이 대결에서 진, 선, 미가 항상 승리하도록 반응하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와 삶에서 아름다움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인생은 원래 그런 거야”라고 핑계하지 말고, “내가 ‘사람다움’을 지키는 싸움에서 오늘 실패했어”라고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 자신의 실패를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멋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나서 도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사람다움’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가?는 따져보아야 한다. 개는 사람이 될 수 없고, 사람도 개가 될 수 없다. 사람은 사람으로 살아야 하고, 개는 개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이 ‘사람다움’을 지켜내지 못하면, 동물처럼 아니 동물보다 못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비록 지금 자신이 그렇게 살아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람다움’과 ‘삶’의 표준을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기준이 불분명하면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이정표를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해상에 배가 없다 하여도, 밤하늘에 북극성은 그 자리를 지켜주어야 한다. 언제 가는 그 북극성을 따라 대양을 건너고자 도전하는 배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과 추함의 대결에서 추함을 정복하고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더 많은 사람들과 사회 전체를 이 아름다움 안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그들이 '위대한 십대'이다.
광활하게 펼쳐진 대자연을 보고 감탄해 본 적이 있는가? 우리나라에도 멋지고 아름다운 곳이 많지만, 해외에 나가보면 정말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미국의 그랜든 케년 국립공원은 그 면적이 제주도의 2.7배에 해당하고, 공원 내에 흐르는 강은 무려 443km가 된다. 매년 전 세계의 수백만명의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든다. 관광객들은 신의 손으로 조각한 듯한 그 거대하고 정교한 협곡들에 압도당하여,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다만 ‘우와~’라는 탄성만을 쏟아낸다.
그러나 최고의 탄성은 그 어떤 대단한 자연경관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한 존재에 의해서 생겨나게 된다. 그대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얼마나 감탄하고 있는가?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지금으로부터 1500년도 전에 불후의 명저인 《고백록》에서 이렇게 밝힌다.
인간은 산의 정상에 올라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잃고
풍랑이 이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세상을 휘몰아치는 대양을 보면서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별들의
운행을 바라보면서 넋을 잃지만
정작 인간 내면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의 내면세계, 영혼의 세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는데 말이다.
이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고백한다.
“눈에 보이는 바깥세상의 아름다움은 실제로 대단한 것이 아니다. 솔직히 나는 아름다운 산을 충분히 보게 된 것을 만족했다. 그리고 나는 내면의 눈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때부터 나는 산 아래로 내려올 때까지 단 한마디도 입술에서 내뱉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 침묵 속에는 그토록 경이로운 인간 존재에 대한 아름다움을 발견한 자의 탄성, 이를 알지 못한 채 살았던 순간들에 대한 뼈아픈 회한, 그리고 여전히 이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가는 동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깊은 연민, 더 나아가 이 사실을 전파하기 원하는 절규의 외침이 소용돌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년이 가까운 시간이 지나, 이탈리아의 시인 페트라르카(1304~1374)는 몽방뚜 정상에서《고백록》을 읽고, 아우구스티누스의 바통을 이어받아서 역사의 대전환을 이루는 르네상스 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흐름이 근대 시민혁명으로 이어지며, 지금 현대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누려지는 자유, 평등과 같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하는 기본적 권리가 확립되게 된 것이다. 인류 역사는 사람다움을 지켜가는 투쟁에 의해서 진보되어 온 것이다.
칸트도 그의 역작《실천이성비판》마지막 구절에서 인간 존재의 경이로움에 대해 언급하며 그것을 자신의 묘비명으로까지 남긴다.
“내가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새롭고 한층 더 감탄과 경외심으로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에 있는 도덕 법칙이다.”
지금으로부터 수백수천 년 전부터 사람다움을 지켜온 선진들의 숭고하고 장엄한 전통 앞에서 나는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없다. 이 엄청난 유산의 상속자로서 갖는 놀라움과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고, 이것을 계승하여 발전 시겠노라는 결연하고 비장한 맹세를 하지 않고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그대는 어떠한가?
‘사람다움’을 지켜가며, 하루하루를 ‘생존’이 아닌 ‘삶’으로 살아낼 때, 우리의 내면은 점점 더 아름다운 세계로 재창조되기 시작한다. Zone 안으로 들어가서 아름다움을 맛볼 때면, 나의 내면이 마치 깊은 산속 옹달샘이 흐르는 곳 같다. 푸른 하늘과 따스한 햇빛, 울창한 나무들과 새들의 지저귐 소리가 있는 자연처럼 느껴진다. 너무 아름다웠다. 그 어떤 자연경관보다도 나의 내면 풍경이 나 자신을 더 매료시켰다. 그래서 점점 더 마음의 길이 나면서 누구라도 이제 내 마음의 길을 따라오면 나의 내면에 있는 옹달샘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강의와 상담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옹달샘을 마시고 가는 것을 보았다.
그랜드 케년을 다 돌아보기 위해서는 하루 이틀로 안 된다. 우리의 일생도 우리 존재의 광대함과 아름다움을 알아가는 여행과 같다. 이 얼마나 멋지고 즐거운 여행인가!
삶이 아름다움으로 짜이는 이유는 무언가 특별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의 본질적 아름다움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