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전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다. 그래서 그 중요성은 쉽게 간과된다. 그러나 현시대는 보이는 전쟁보다 보이지 않는 전쟁이 더 무서운 시대이다. 끝을 모르고 군비경쟁을 하던 냉전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 결정적 원인 중 하나도 소련의 경제문제였다. 무역과 금융을 위시한 경제전쟁은 미사일보다 훨씬 더 강력한 영향을 국제사회에 미치고 있다. 또한 문화전쟁은 총 한 방 쏘지 않고도 그 나라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급속하게 변화시킨다. 전쟁의 위력은 그대로이지만,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다. 전쟁의 양상이 어떠하든, 우리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전쟁의 근원은 오직 한 가지, 생명전쟁이다.
생명전쟁은 마음의 생명을 두고 벌어지는 전쟁이다. 사람은 몸의 생명과 마음의 생명으로 이루어져 있고, 생명의 본질은 두 생명이 활력 있게 움직임으로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임을 밝혔다. 그런데 하루를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마음은 공허하고 몸도 더욱 지칠 때가 있다. 마치 충치균이 치아를 조금씩 썩어가게 만드는 것처럼, 우리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때론 강탈당하듯이 삶과 마음이 뿌리 채 뽑혀나가는 듯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이것이 생명전쟁에 패배한 결과이다.
즉 우리의 삶이 생존으로 떨어져서 아름다움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곧, 아름다움을 지키는 전쟁,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전쟁이다. 살아있는 모든 순간에서 지금-여기의 아름다움을 이어가고자 하는 삶의 방식을 놓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생존 대 삶의 전쟁이다. 밥벌이를 지키기 위한 ‘생존경쟁’이 아니라 살아 있기 위한 생명전쟁이다. 무감각하게 사는 콤마상태와 깨어있는 의식의 전쟁이다. 내 안의 아름다움과 추함의 전쟁이다. 이것은 시대와 국가, 인종을 초월하여 벌어지고 있다. 1분 1초도 휴전 없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지상전 상황에서는 중요한 고지를 누가 점령하느냐에 따라 전세의 판도가 달라진다. 그래서 그 고지를 탈환하고자 하는 적군과 지켜내고자 하는 아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이루어진다. 뺏고 빼앗기는 사활을 건 전투가 계속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명력을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는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 전제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만약 더 많은 개인과 사회가 생명을 지키는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그런 개인과 사회 전체는 위대함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명전쟁에 대해 무감각하다. 전쟁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사건을 잊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며 노란 리본을 단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건을 통해 진정으로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사실은 무엇인가? 지금도 수백만 명이 넘는 십대들의 정신이 매일매일 익사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왜 그만큼 비통해하지 않는 것일까?
‘생존’의 상태를 유지하기만 한다면 만족한다는 것인가? 우리가 생명에 대해 이러한 낮은 기준을 바꾸지 않는 한, 제2의 세월호는 또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생명존중은 자살예방의 오래된 구호가 아니라 마음의 생명에 대한 높은 기준으로 되살아나야 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백 Ulrich Beck 은 현대사회를 위험사회로 규정했다. 전쟁의 위험뿐 아니라 세월호 사건과 같은 대형참사와 환경문제 등의 위험에 상시적으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시는 물이 위험하고, 미세먼지로 인해 호흡하는 공기가 위험하다. 그러나 이런 표면적인 것 외에 더 본질적인 위험은 따로 있다.
적 enemy은 내 안에 있다. 적은 내 밖에 있는 어떤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외부의 적을 향해 에너지를 집중하는 것은 적에게 속는 것이다. 승리는 내 안에서부터 밖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전쟁은 생명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영토나 자원을 얻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고, 일부 사람들은 노예로 쓰거나 저항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방식이었다. 그들에게 많은 사람의 목숨 자체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생명전쟁은 우리의 생명을 노린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명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적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의 가치에 대한 무지’이다. 이 무지無知가 인류사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전쟁과 위험의 주범이다. 이 무지는 생명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갖는다. 이러한 반생명적 anti life 태도는 생명을 경시할 뿐 아니라 차등한다. 모든 생명체에게 부여되어 있는 생명의 절대적 가치를 부정한다. 그래서 우월한 생명체가 열등한 생명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을 정당한 것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히틀러는 독일 민족의 우수성을 자랑하며, 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자서전《나의 투쟁》에서 유대인들을 없애버릴 수만 있다면, 전선에서 수백만 명이 희생되는 것도 헛된 일이 아니라고 여겼던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이러한 히틀러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는가? 자살이었다. 그는 세계지배의 야욕을 품고 전쟁을 일으킬 때부터, 유대인들을 학살할 때부터 이미 자기 생명을 파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보다도 자기 생명에게 가장 적대적인 행동이었다. 그는 자기가 가진 생명의 가치를 진정으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학살했다. 그가 인종을 초월하는 모든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는 보편적 아름다움을 알았더라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유대인에게 있는 아름다움을 몰랐다는 것은 곧 자신의 아름다움도 몰랐다는 것이다. 그는 콤마상태의 환자였다. 그래서 그는 우월한 인종이 있고, 열등한 인종이 있다는 오류에 빠졌다. 자기가 갖는 우월함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결국 이러한 오류가 수천만명의 사람의 삶을 빼앗가 버린 것이다.
생명에 대한 무지와 적의는 히틀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내면에도 있는 것이고, 사회 곳곳에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생명의 가치 모르기 때문에 오로지 외적인 성공만을 추구하게 된다. 심지어는 생명의 중요성을 구분하며 낙태도 저지른다. 사회적으로는 사람들을 착취하는 갑을관계와 세계적으로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앞장에서 내가 직장 상사로부터 4개월 짜리라는 말을 들었던 사건을 이야기했다. 그때가 바로 생명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순간인 것이다. 고 다 큰 어른이 되어서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은 직장상사의 표현방식이나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나의 자신의 가치에 대한 기반이 약했기 때문이다. 즉 전쟁에서 적군의 공격에 방어할 수 있는 보호장비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반응과 상황에 따라 항상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체제'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더더욱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정신'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세계 3대 사회학자 중의 한 명인 막스 베버는 자신의 저서《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서문에서 이렇게 밝힌다.
"획들을 위한 무제한의 탐욕은 결코 자본주의와 동일한 것이 아니며 자본주의 정신과는 더욱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아마도 이러한 비합리적 충동의 절제, 아니면 적어도 그러한 충동의 완화와 동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지속적이고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경영에 의한 이윤 추구, 그리고 영원힌 재생되는 이윤의 추구와 동일한 것이다."
즉, 자본주의 체제의 병폐는 자본주의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정신은 '자본'을 숭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다움을 지켜갈 수 있는 물질적 기반, 즉 생명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최소한의 무기를 제공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