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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은 Nov 21. 2023

#17 캔들 샤워가 필요한 순간

  

 요즘 뭔가 많이 지치고 주눅이 들면서도 만사가 귀찮은 기분이 든다. 마음의 여유만큼은 가득했던 나였던 것 같은데 이제는 여유가 없이 허덕거리고 있는 것 같다. 상대방의 말투, 행동은 물론이고 사소한 것 하나까지 나에게 돌덩어리처럼 쿵쿵 다가온다. 아, 나 요즘 예민한가 보다.      


 어딘가에 치여 깎이고 깎인 나는 지금 되게 날카로우면서도 무기력한 상태다. 글로 적고 보니 되게 모순적이지만 실상이 그렇다. 예를 들어, 점심시간에 식당에 왔다. 태블릿으로 주문하는 형태의 식당이었는데, 그냥 내 음식만 눌러놓고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평소 같았으면 “뭐 드시겠어요?”하고 물어봤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자기 것만 누르네.”하는 말이 되게 뾰족하게 다가오지만 굳이 대응하지 않는다. 사실 회사 생활에서, 상사를 대하는 입장에서 정말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마음이 지치고,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점점 지치고 무거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고개도 떨어지고 입도 꾹 닫게 된다.     


 지금 같은 상황이 바로 캔들 샤워가 필요한 순간인 것 같다. 캔들 샤워는 예전에 자주 가던 캔들샵 사장님이 알려준 방법이었는데 심신 안정과 힐링을 갈구하던 나에게 신세계를 보여줬었다. 캔들 샤워를 위해서는 우선 집에 있는 캔들을 모두 모아서 욕실로 가져간다. 그리고 캔들을 하나씩 켠 후 좋아하는 노래를 튼다. 이왕이면 잔잔한 음악이 좋다. 그리고 따뜻한 욕조에 들어가도 좋고, 아니면 그냥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기를 틀어도 좋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욕실 전등을 끄고, 문을 닫는다. 고립의 길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다.      


 아른아른 수증기 사이로 뿌연 불빛들이 일렁인다. 쌓여있던 험한 말들이 귀에서 녹아내리고 뾰족한 마음이 다독여서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리고 이내 온몸이 노곤해지고 숙였던 고개가 들리고, 살 것 같은 탄성이 나오면 나의 캔들 샤워는 끝이다.      


 이사를 하기도 했고, 예전만큼 캔들을 사지도 않아서 한동안 캔들 샤워를 잊고 지냈는데 오늘이야말로 캔들샤워가 절실히 필요한 날인 것 같다.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다시 일어날 힘을 채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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