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정리하다 육아일기를 발견했다. 얇은 노트에 검정펜으로 쓴 일기. 아이가 셋이지만 육아일기는 첫째를 낳고 쓴 일기가 유일하다. 얇은 페이지를 다 채우지도 못한 육아일기를 읽으며 그 시절의 내가 낯설어 한참을 바라봤다. 둘째 때도 셋째 때도 육아일기를 썼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그럴 열정이 내게는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나는 아이들의 영유아 시기를 언제나 쓰나미처럼 느꼈으니까. 지나고 보니 아이들을 키우느라 내가 고생한 게 아니라 미숙한 엄마를 견뎌내느라 아이들이 고생했다는 생각이 든다. 성숙하지도 자상하지도 살뜰하지도 못한 엄마. 그런 엄마 밑에서 자라느라 아이들은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1.
지금 세상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시끄럽다. 사망자와 부상자, 실종자가 천여 명에 이르는 대형 참사다.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감사해야 할 요즘이다.
지금은 7월 21일(1995년) 오후 5시 30분이다. 이층 집에서 커피를 같이 마시자기에 너를 안고 마실을 다녀와 빨래와 청소를 막 끝내고 이 자리에 앉았구나. 젖을 먹을 시간인데 너는 지금 정신없이 잠을 자고 있다. 밤낮이 바뀌어 낮에는 흔들어 깨워도 모를 정도로 잘 자고, 밤이면 엄마의 인내심을 시험하듯 끝없이 울어대는 너. 엄마 나이 서른과 아빠 나이 서른셋에 태어난 너는 이제 엄마에겐 더없는 기쁨이다. 너를 돌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럴수록 하루가 다르게 쌓이는 정을 이다음 네가 엄마가 되는 날 이해하게 되겠지. 이 편지를 네가 언제쯤 앍게 될지 모르지만 엄마가 쓰는 이 편지를 희한하다는 듯 읽으면서 "엄마, 내가 이랬어?"하고 물을 너의 미래가 눈에 잡히는 듯하다. 사실 엄마는 결혼을 하고 너를 얻은 것이 때때로 낯설고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단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는 독신주의에다 스스로도 엄마가 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던, 조금은 고집불통의 선머슴 같은 여자였거든. 이 엄마에 비해 너는 어떤 모습의 여성으로 커갈지 모르지만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그리고 남의 아픔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다운 여성으로 커주길 이 엄마는 바란다. 지금 막 네가 깨어나 젖을 달라며 운다. 그래서 이만 쫑-.
2.
오늘은 7월 24일 월요일. 지금은 시계가 10시 30분을 향하고 있다. 빨래를 하려다 네가 잠든 사이 몇 자 적어야겠다 싶어 책상머리에 앉았다. 어젯밤에는 네가 얼마나 잘 잤는지 엄마 아빠도 오랜만에 일찍-이래 봐야 12시지만-잠들 수가 있었다. 일요일이라 아빠가 낮에 내내 너와 놀아준 덕분이다. 그제인가는 너를 낳고 오랜만에 집 밖을 나선 엄마가 차를 몰고 하루 종일 여기저기 돌아다닌 덕분에 엄마 아빠 모두 피곤했었단다. 그런데 밤에 너는 자지도 않고 오래 그렇게 울어대는지. 너를 달래다 달래다 지친 이 엄마가 너의 엉덩이를 때리기도 했구나. 나중에 아빠 품에 안긴 넌 이 엄마에게 오려고도 하지 않았지. 본능이란 것이 그렇듯 무서운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3.
지금은 오후 3시 35분. 자던 네가 깨어나 씨름하다 졸다 빨래하다 다시 펜을 들었다. 언제쯤이면 새삼스럽지 않을까. 너를 안고 어르면서 "OO아, 내가 엄마야" 그런 말들을 네게 들려주면서 여전히 네가 내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믿기지 않는다. 한 달이 지났는데 너의 뺨에는 살이 오를 대로 올라 깨물고 싶을 만큼 오동통하다. 네가 얼마나 이쁜지! 네가 얼른 목을 가누고, 앉고, 걸어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 너를 데려가고 싶은 곳이 얼마나 많은지! 너를 안고 있다 보면 하루가 다르게 쌓이는 사랑을 느낀다. 아빠와의 행복한 시간 때문이기도 하지만 너를 낳고 나서 더욱 이 엄마는 결혼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젊은 날의 호기처럼 더 이상은 우울을 표현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 정말 기뻐하고, 사랑하고, 꿈을 이루기에도 인생은 짧다.
4.
광복절이었던 어제는 대구가 무려 39.2도를 기록하는 폭염의 날이었다. 광복 50주년을 기해 중앙청 건물을 철거하고 행사도 여느 해에 비해 다채로웠다. 중앙청 건물은 진작 헐렸어야 했는데... 뒤처리가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지금은 하늘이 소나기를 뿌리려는 듯, 무더운 오후 시간인데도 마치 저녁시간처럼 어둑어둑하다. 엄마가 꽤 좋아하는 날씨. 엄마는 맑고 쾌청한 날보다는, 비가 오는 날보다는, 비가 오기 전 흐린 날씨를 좋아한단다. 그래서 하루 중 해가 서녘으로 막 꼬리를 감춘 저녁 무렵을 좋아한다. 그때 세상은 수채화처럼 촉촉이 젖은 푸른빛이다. 요즘 너는 꽤 잘 자고 잘 먹고 잘 논단다. 우는 것도 많이 나아져 조금만 달래면 금방 울음을 그치고 가끔 생글거리기도 한단다. 그동안 네가 칭얼거린 이유가 아마도 엉덩이가 짓물렀던 탓이 아닌가 싶다. 장마라, 그리고 네가 설사를 하는 바람에 7월 한 달을 종이 기저귀로 사용했거든. 그 바람에 네 엉덩이가 빨갛게 짓물렀단다. 파우더를 바르면 더 크게 울어대던 널 지금 와 생각하면 엉덩이가 몹시 따가워서 그랬구나 싶다. 아무래도 처음 아이를 기르는 엄마다 보니 너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하는 서투름이 있단다. 그것이 곧 네게는 아픔과 언짢음과 불편함을 초래했을 테지. 유난히 큰 목청 탓에 커서 노래 잘하겠다는 주위의 평을 듣고 있는 너. 커서 어떤 사람이 되든 지금은 그저 건강하게 아무 탈 없이 자라주길 이 엄마는 간절히 바라고 있단다. 간혹 무엇이 눈에 보이기도 하는 모양인데 아직은 눈이 뜨이지 않아 같이 놀기에도 그리 썩 재밌지만은 않다. 조만간 눈도 뜨이고 목도 가누게 되면 이 엄마와 얼마나 놀려고 들까. 그때가 빨리 되었으면 싶다. 걸어 다니고 뛰어다니게 되면 더 신나겠지. 요람에서 잠든 너를 보며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어느새 통통하게 살이 오른 발가락이 길던 네 발가락을 짧아 보이게 한다. 정말 두 달 사이에 부쩍 컸구나 싶다. 지현아, 사랑해! 네 입을 통해 '엄마'라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어떨지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갑자기 냉커피가 너무 먹고 싶어 타 마셔야겠다. 엄마가 네 곁에 24시간 붙어 있느라 커피숍에 가본 지도 아득하다. 그런 사소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언제쯤 네가 이해할 수 있을까.
5.
문득 잠든 너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다 아빠처럼 눈썹이 너무 잘생겨 그 얘기를 해주고 싶어 펜을 들었다. 오늘은 8월 29일. 8월도 이틀밖에 남지 않았단다. 세월이 살과 같다더니 그 말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실감이 나는구나. 어느새 너도 잘 먹고 잘 자 주어서 무럭무럭 자랐다. 이젠 그 크던 요람 밖으로 발이 쑥 불거져 나올 정도로 키도 크고 종아리도 살집이 꽤 잡힌단다. 머리 모양이 이상한 듯해 늘 이리저리 살펴보지만 아마도 자라면서 변하지 않을까 싶다. 항상 양 옆으로만 머리를 두고 자서 귀가 당나귀처럼 쫑긋해 친할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을 듣고 있는 너는 엄마 아빠를 닮아 얼굴이 굉장히 감성적으로 생겼다는 거 아니? 감성적인 게 뭐냐고? 글쎄, 낭만이 풍부한 거라고 해두자. 며칠째 계속 '신기한 아기나라'라는 아기 교재를 팔려고 어떤 아줌마가 찾아왔는데 엄마는 너와 놀아주며 엄마 나름대로 너의 두뇌와 감각을 발달시켜 줄 계획이다. 돌이 지나면 수영도 배워줄 거구. 뭐니 뭐니 해도 튼튼한 게 최고거든. OO아, 중요한 건 건강한 육체와 여러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건강한 정신이란다. 아무리 똑똑한 천재라도 이것들을 갖추지 못했다면 불행한 거야. 너는 나름대로의 굳은 심지와 이해심을 가질 수 있겠지? 엄마는 그래서 우리 OO이에게 마음 아픈 일이 생기는 걸 두려워하지 않을 참이다. 아픔도 느껴봐야 배려심도 생기고 깊은 사고도 하게 되는 법이거든. 들판의 야생화처럼 말이야. 시간과 사랑은 비례하는 걸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너에게 향하는 엄마의 애정이 얼마나 깊어지는지 모른단다.
6.
하루가 다르게 햇살이 짙어지고 있다. 어느새 너의 백일도 5일이나 지났구나. 9월 17일. 이날에는 한진 할머니, 인천 큰고모, 개봉 막내 고모, 혜진 언니, 장호 오빠, 그리고 너와는 20년 넘게 나이 차이가 나는 인천 오빠 세 명이 모두 모두 너의 선물을 사들고 왔단다. 아참! 가장 중요한 작은아버지를 빼먹을 뻔했구나. 외가에서도 물론 많은 분들이 오셨고... 어느새 너는 목도 가누고 할머니 표현대로라면 정말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단다. 넌 정말 잠도 없다. 무슨 어린애가 토끼잠을 자니? 깨어나 우는 바람에 또 이만 끝-
네가 이젠 목도 빳빳이 가누고, 뒤집고는 기려고도 애쓴다. 보행기에도 제법 오래 앉아 놀아 많이 편해졌다. 깨어 있을 때도 청소할 수 있고 화장실에 갈 수도 있다. 백일 전에 비한다면 얼마나 편해진 건지 모른다. 그전에는 화장실에도 널 안고 다녀야 했거든. 그래도 여전히 외출은 자유롭지 못하다. 요즘은 날씨가 추워져 더하다. 시장에 못 간 지도 2주일이 넘은 듯싶다. 한동안 감기로 네가 고생했는데 이젠 콧물도 기침도 깨끗하게 나았다. 기침하면 간이 오싹오싹 다 졸아붙었는데... 내일 하루만 지나면 어느새 12월, 95년도 한 달밖엔 남지 않는다. 너는 부쩍부쩍 자라고, 나의 서른은 이제 서른하나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방긋방긋 웃는 너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다. 잠투정하느라 눈 비벼대는 것만 빼면 다 큰 어른 같다. 이런 걸까. 자식에 대한 애정이 깊어간다는 게. OO이가 나중에 결혼을 해 아이를 낳으면 지금의 내 감정을 똑같이 느낄 수 있게 되겠지. 그러고 보면 결혼이란, 해도 꽤 괜찮은 거란 생각이 든다. 이젠 젖이 모자라 '세레락 혼합식'과 함께 먹이고 있다. 젖병도 잘 빨아서 다행이다. 아빠는 새벽 3시나 되어야 올 것 같다. '가정'이라는 작은 세상에 갇혀 지내야만 하는 걸 빼면 결혼도 정말 괜찮은데...
돌아보면 옷도 나이에 맞게 입히듯 사랑도 나이에 맞게 입혀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작고 여린 아이에게 일관되게 어른의 옷을 입혔다. 사랑은 수고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 영향으로 첫째는 좀체 자신의 불편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이 대견하면서도 마음을 저미게 한다. 사랑을 온전히 받지 못한 것도 결핍이지만 사랑을 온전히 주지 못한 것도 결핍이어서 자꾸만 그 시절이 떠오른다.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온전한 사랑을 주기에만도 모자라는 시간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