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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지윤서 Jan 05. 2022

"이게 최선입니다."

산책을 나갔던 남편이 레 빈손으로 들어왔다.


"빵은?"


"문이 닫혔던데..."


시계를 보니 시침이 막 4시를 향해 가고 있다. 문을 닫을 때는 아니고 화요일이 원래 쉬는 날이었나? 싶어 인터넷으로 검색해 살펴보니 '매주 화요일 휴무'라고 적혀 있다. 아하.




빵집은 동네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는 공장 건물에 지난해 늦은 봄, 둥지를 틀었다. 공장 근로자들을 상대로 백반을 팔던 자그마한 식당이 있던 자리였다. 번듯한 간판도 조명도 갖추지 않은 빵집은 이색적이고 세련된 인테리어를 갖춘 베이커리 카페가 즐비한 서울에서 이런 가게로 영업을 한다고? 싶을 만큼 허름했다. 출입문도 시골의 낡은 슈퍼에서나 볼 법한 미닫이문이었다. 그렇다고 이름이 독특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동네 이름을 따 'OO빵집'이라고 작명한 게 다였다. 그런데 더 가관인 건 그 이름을 새긴 간판이었다. 크기가 A3 용지만 하려나. 짙은 갈색의 나무판 위에 흰색 페인트로 굴림체로 써놓았는데 그것을 가게 머리 위도 아니고 바닥에 세워놓았다. 가게로 들어가자면  2칸 정도 올라야 하는 계단 옆 벽에. 어떤 개성도 드러나지 않는 소박함. 그게 그 빵집의 개성이라면 개성일 것 같았다.


그 집의 정체를 제일 먼저 파악한 건 큰아이였다. 하루는 갈색 종이봉투를 안고 들어온 큰아이가 식탁 위에 봉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쪽 공장에 빵집 생겼어. 대박! 어떻게 그런 곳에 빵집이 생기지?"


알고 있다는 반응에 큰아이는 들어가 봤냐고 물었다. 들어가지는 않고 지나가기만 했다고 했더니 큰아이는 흥분한 목소리로 방문기를 풀어놓았다. 식사빵만 취급하는데 가격이 너무 싸다, 내부가 별다른 인테리어를 하지 않았는데 꼭 유럽에 있는 시골 빵집 느낌이 난다, 주인이 전혀 빵을 만들 사람처럼 안 보인다, 홍보도 안 하는지 후기도 찾을 수 없다, 그렇게 싸게 팔아 남는 게 있는지 모르겠다...     


큰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봉투를 열었다. 한 번도 직접 사본 적 없는 빵들이 봉투 속에 가득했다.


"다섯 종류밖에 안 돼서 하나씩 다 사봤어."


빵들은 여느 빵집에서 파는 흔한 빵이 아니었다. 깜빠뉴, 치아바타, 휘셀, 바게트, 쁘띠빵. 깜빠뉴가 호밀가루와 밀가루에 천연 발효종을 섞어 만든 프랑스 정통 식사 빵이고, 휘셀이 바게트와 비슷하지만 훨씬 얇은 빵으로 '끈'이라는 뜻을 지녔다는 사실은 이날 처음 알게 되었다. 큰아이는 그 허름한 빵집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모양이었다. 빵을 좋아해 웬만한 빵집을 섭렵하고 다녀서인지 이런 가격에 이런 빵을 만들 수는 없다고 연신 열변을 토했다. ‘이건 말이 안 돼’라고 큰아이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빵은 속이 거북해 즐기지 않는 남편도 큰아이의 말에 마다하지 않고 맛을 보았다.


제일 먼저 사라진 건 휘셀이었다. 크기가 작기도 했지만 그보다 올리브가 통째로 박혀 있어 자르는 족족 다섯 식구가 손을 뻗었다. 쫀득한 바게트와 촉촉한 올리브가 어울려 묘한 고소함이 입 안을 가득 메웠다. 다음은 깜빠뉴. 대표적인 식사 빵이라더니 맞는 말이었다. 겉껍질은 프라이팬에 갓 구워낸 누룽지 맛과 흡사했다. 어찌나 고소하던지 껍질만 벗겨내 먹고 싶었다. 속은 밀도가 높으면서도 말랑했다. 색깔도 가무잡잡. 두어 조각 먹으면 금세 포만감이 들 것 같은 빵이었다. 치아바타는 샌드위치로 판매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빵만 보기는 처음이었다. 이탈리아어로 ‘납작한 슬리퍼’라더니 모양이 정말 그랬다. 쁘띠빵은 주먹만 한 크기의 동그란 빵인데 가격 때문에 놀라고 말았다. 10개에 5천 원! 이제는 붕어빵조차도 5천 원에 10개를 살 수 없는 시대인데 놀라웠다. 쁘띠빵은 맨입으로 먹자니 뭔가 허전했다. 급하게 올리브유에 양파와 마늘을 저며 달달 볶아 내놓았다. 큰아이는 쁘띠빵의 속을 파내고 마늘과 양파로 채워 넣더니 납작하게 구겼다. 다들 따라 했다. 그러다 보니 쁘띠빵도 순식간에 동이 나고 말았다. 속이 거북할까 봐 걱정하며 잠이 들었던 남편은, 다음 날 속이 편하다며 신기해했다. 


“천연 재료만 쓰는 게 맞나 봐. 속이 불편하지 않네.”


반가운 소리였다. 이제는 빵으로도 아침을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빵은 깜빠뉴...였지만 지금은 쁘띠빵을 대체한 호두건포도빵이다. 건포도 덕에 유일하게 달콤한 맛이 나는 빵. 이후 빵이라면 고개를 내젓던 남편도 이제는 빵을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  다행한 일이다.


 빵집의 단골이 된 이후 식빵은 우리 집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여타 빵집으로의 발길도 뚝 끊겼다. 깜빠뉴는 가게에서 사 오자마자 잘라서 냉동실에 쟁여 놓는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일반 식빵처럼 먹고 남은 빵을 상온에 방치했는데 며칠 뒤 돌덩이와 마주했다. 칼질을 할 수도 없어 고민하다 우유에 불렸다. 주인장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남은  지퍼백에 넣어 냉동실에 보관하라는 조언을 들려주었다. 냉동실에서 꺼내 바로 오븐이나 에어프라이기에 데우면 갓 구운 빵보다 더 맛있을 수 있다고.    




얼마 전, 문을 여는 시간보다 이른 시간에 빵집에 들렀다. 혹시나 싶어서였다. 문은 꼭 닫혀 있었다. 오후에 다시 들러 아침에 조금 일찍 문을 열 수는 없느냐고 주인장에게 물었다. 주인장은 예의 그 푸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게 최선입니다. 하하"


멋쩍어하는 주인장의 웃음에, 따라 웃었다. 값을 치르고는 미닫이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와 집으로 향했다. 그러다 걸음을 멈추고 빵집을 되돌아보았다. 시커먼 공장의 외벽만 보였다. 그곳에 빵집이 있다는 사실은 그 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고는 모를 것 같았다. '최선'이라는 주인장의 말을 떠올리는데 슬몃 웃음이 났다. 그렇지, 누군가에겐 9시가 최선이기도 하지. 


사람에겐 저마다의 최선이 있다. 그 최선을 망각하고 남의 최선을 따라하다간 정신과 육체를 상하기 십상이다. 큰아이 말대로 어쩌면 주인장은 부러 가게도 작게, 홍보도 전혀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집밥 같은 빵맛을 떠올리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최선'이라는 주인장의 말에서 욕심에 한눈 팔지 않고 자신의 뜻한 바를 지키려는 꿋꿋함을 엿보았다. 그 때문일까. 집으로 가는 발걸음 내내 빵맛이 변하지 않을 거라는 이상한 믿음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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