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지윤서 Jan 10. 2022

나를 울린 부엉이

"엄마 시간 있어?."


설날을 며칠 앞두고 둘째가 물었다.


"응, 당근 있지. 왜?"


"엄마랑 가고 싶은 데가 있어서."


둘째가 데려간 곳은 강서구에 위치한 서울식물원이었다. 둘째는 표를 끊어 오겠다며 매표소로 걸어갔다. 멀어지는 둘째의 뒷모습을 보니 벌써 머리가 꽤 자라 군인의 태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 표를 건네받고 개찰구로 들어섰다.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는 밖의 풍경과 달리 식물원은 따뜻하고 축축했다. 둘째와 거의 동시에 겉옷을 벗어 팔에 걸었다. 식물원은 열대기후에 속하는 4개 도시(자카르타, 하노이, 보고타, 상파울루)의 식물을 전시해 놓은 열대관과 연중 온화한 기후인 지중해 8개 도시(바르셀로나, 샌프란시스코, 로마, 아테네, 퍼스, 이스탄불, 케이프타운, 타슈켄트)의 식물을 만날 수 있는 지중해관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둘째가 앞장서며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둘째는 첫째에 비하면 모든 것이 느렸다. 발육도 느렸고 학습도 느렸고 행동도 느렸다. 게다가 답변도 느려서 어려서는 놀이를 함께하던 첫째가 답답해하기 일쑤였다. 다그치면 입을 닫고 더 움츠러드는 아이. 둘째에게는 기다려주는 게 답이었지만 학교는 그런 곳이 못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초등 1, 2학년 때 둘째의 학교생활이 얼마나 외로웠을지 가늠이 되지 않아 가슴이 저린다. 아이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으므로 알지 못했다. 아니, 이것은 변명일 뿐이다. 뭣이 중한지도 모르고 개폼을 잡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부끄러울 뿐이다. 어린 동생을 돌보고 동네 누나 형들과 모여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거나 다가갈 곁이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3학년 이후 느긋한 선생님들을 만난 건 복이었다. 선생님들의 격려와 기다림은 둘째에게 로봇공학자의 꿈을 꾸게 했고, 웃고 재잘대는 아이로 자라게 했다.


중학교에 진학하고 둘째는 다시 입을 닫았다. 사춘기가 왔나 했지만 문제는 학원에 다니지 않음에도 귀가 시간이 점점 늦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친구와 놀았다거나 자전거를 탔다는 짧은 답만 돌아왔다. 친구에게 확인할 수도, 뒤를 밟을 수도 없어 답답한 날이 이어졌다. 그러다 어느 날 흘리듯 둘째가 말했다. 동생과 엄마의 목소리가 시끄러워 집에 들어오기가 싫다고. 그때서야 알았다. 저녁을 먹고 나면 초등 저학년인 막내의 숙제를 봐주느라 내내 막내 곁에만 머물렀다는 사실을. 둘째가 다시 혼자된 시간을 견디고 있다는 사실을.


둘째의 외로움에는 온전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온전한 사랑이 무얼까. 엄마가 보내는 사랑의 신호가 아니고는 메워질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무엇으로, 어떻게 사랑의 신호를 보낸담.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해야만 했다. 엄마는 너에게도 온전히 집중하고 있다는 신호를 둘째에게 보내야만 했다. 기꺼이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것, 그것을 찾아야 했다.


음식은 똥손이니 요리도 아니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니 원하는 물건을 사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때 막내 학교에서 하고 있던 활동이 떠올랐다. 막내는 엄마가 도서관에서 가져온 여러 권의 그림책 중에서 자신이 골라준 그림책을 들고 교실에 들어가는 모습을 몹시 좋아했다. 하지만 중학교에서 그 방식을 택할 수는 없었다. 궁리 끝에 중학교 사서 선생님을 찾아갔다.


큰아이 때부터 안면이 있던 사서 선생님은 일주일에 하루, 점심시간에 도서관 한쪽에서 책을 읽어주고 싶다는 제안을 흔쾌히 받아주셨다. 감사한 일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중학교에서의 책 읽어주기. 매주 수요일 12시 20분이면 어김없이 집을 나서 둘째의 학교로 향했다. 둘째에게도 일정을 알렸다. 시간이 되면 친구들과 도서관으로 오라고. 고맙게도 둘째는 친구들과 혹은 혼자서라도 도서관을 찾아와 책 읽어주는 소리를 듣다 교실로 돌아갔다. 꼬박 1년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중2라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물러가고 있었다.


중3이 된 어느 날, 둘째가 A4 용지 한 장을 내밀었다. 선생님이 엄마에게 꼭 보이라고 했다며 건네준 종이에는 시 한 편이 쓰여 있었다. 제목은 '어머니'.


누우면 내 베개가 된다 / 그 베개에선 항상 편안한 냄새가 난다 // 힘들어 보이는 데도 / 내가 힘들다면 안마기로 변한다 // 매의 눈으로 쳐다보고 / 부엉이처럼 목을 돌릴 수 있어도 / 가끔은 맹인이 되어준다 // 목줄은 있는데 잡기가 싫은지 / 통 잡질 않는다 / 그러면 난 저만치 갔다가 / 다시 오겠지 // 몇 번을 반복하다가/어느새 나보다 작아진 기둥을 발견하고서는 / 쓰러지지 않게 옆에서 지켜주어야지 // 누구보다 큰 자랑스러운 기둥이 되면 / 나무처럼 두 팔 벌려 말해야지 / "어머니" / 라고.


아들의 시를 읽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자라며 보여 준 모든 모습이 선물임을, 이미 자랑스러운 기둥임을 말하며 펑펑 울었다.




식물원 관람을 마치고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카페는 식물원에 있는 카페여서 그런지 인테리어가 특이했다. 벽면 하나를 몽땅 식물로 채워놓았는가 하면 구근류 상자를 쌓아놓고 판매하기도 하고, 널찍한 테이블 한가운데에는 연못을 들여놓기도 했다. 실내가 넓어 개방감이 남달랐다. 둘째는 커피를 사 오겠다며 겉옷을 내려놓고는 카운터로 향했다. 조각 케이크와 커피 두 잔을 들고 돌아온 둘째는 자리에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실내가 더운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아들이 제대한 지 벌써 두 달이 다 돼가네. 훈련소에 들여보낸 게 엊그제 같구만."


"그러네. 근데 제대 아냐. 전역이야. 예비군까지 다 마쳐야 제대야."


"아, 그래?"


"예비군은 몇 년인데?"


"8년 정도 될걸."


"그렇구나. 오늘 아들 덕에 호강했어. 여기 너무 좋다." 


"엄마가 좋아할 거 같았어. 사실은... 여자친구랑 왔는데 너무 좋더라고."


커피를 마시다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큰아이의 연애사는 몇 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둘째의 연애사는 처음이었다. 짐짓 놀라지 않은 체하며 차분하게 물었다. 엄마가 묻는 말에 둘째는 선선히 대답을 이어나갔다. 발그레하게 홍조 띤 얼굴로.


그러고 보니 둘째도 어느새 20대 중반을 향해 가고 있었다. 연애도 하고 이별도 할 나이였다. 그 사실을 이제야 자각했다는 사실이 민망했다. 좋은 거 많이 보고 맛난 거 많이 먹으며 예쁜 연애를 이어가라 아들에게 당부했다. 둘째는 이제 정말 진정한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식물원 이야기는 2020년 2월의 일입니다. 이제 둘째는 더 이상 밤을 새워 엄마와 수다를 떨지 않습니다. 대신 여자친구와 핸드폰으로 이야기를 나누다 이어폰을 꽂은 채 잠이 듭니다.



작가의 이전글 유일한 육아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