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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지윤서 Jan 22. 2022

맛있는 타박

막내는 아이 셋 중 유일하게 나를 타박하는 아이다. 첫째에게서도 둘째에게서도 '타박'이란 걸 맞아본 적이 없는 탓에 막내의 타박은 낯설다. 하지만 막내에게서 받는 타박은 싫기보다 살가운 느낌이 강하다. 아이가 '엄마'라는 존재를 스스럼없이 대한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막내가 던진 타박 중에 가장 기억나는 일은 고등학교 시절 가족의 별명과 관련해 던진 타박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지은 거야?"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엄마의 핸드폰에서 자신의 이름 앞에 '서까래'라는 단어가 붙은 걸 보고 막내가 물었다. 항변에 가까운 말투였다.  


"아, 그거? 한옥을 보고 지은 거야. 주춧돌, 지붕, 기둥, 대들보, 이렇게 네 개였는데 네가 태어나는 바람에 서까래가 추가됐지. 왜?"


"언니가 왜 기둥이야? 그냥 첫째, 둘째, 셋째로 해."


마음이 뜨끔했다. 북촌을 방문했을 때 한옥의 아름다움에 젖어 나름으로 지은 별명이었다. 큰아이는 기둥, 둘째는 대들보, 셋째는 서까래, 남편은 지붕, 나는 주춧돌. 언젠가 남편의 별명을 알게 된 손위 시누가 동생이 기둥이 아니라는 사실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비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서 지붕이라 지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 설명이 시누의 표정에서 떨떠름한 기색을 사라지게 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막내는 2002년 11월에 태어났다.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축제에 휩싸여 지내던 행복한 그 시절이 막내가 세상에 나온 해이다. 엄마의 나이 서른일곱. 첫째와 둘째를 거치며 나름 시행착오를 겪어낸 엄마를 맞이한 것은 막내에게는 행운이었다. 불운이라면 언니, 오빠가 두 살 터울이어서 늘 함께 무언가를 했던 반면 자신은 일곱, 다섯이라는 터울 탓에 거기에 끼지 못했다는 정도라고나 할까.  


첫째, 둘째를 키우던 1990년대 반은 육아서 대부분이 훈육에 초점을 두던 시기였다. 낯선 세상에 던져진 아이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는 육아서보다는 아이의 버릇을 어떻게 통제하고 길들여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춘 육아서와 강사들의 말이 득세하던 시절이었다. 오은영 박사가 대세인 지금 시절에 비추어 본다면 말도 안 되는 말들이 오가던 시절이었다. 그 영향을 받은 탓인지 첫째와 둘째에게 무심하고 엄격한 것을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를 살뜰히 챙기는 엄마들을 유난하다 흉봤었다. 그랬는데... 셋째를 낳고 내가 그런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그 충족감이 얼마나 거대한지 알게 되었다. 


천진하고 구김이 없는 아이. 어둠을 감추기 위해 전등을 켜야만 하는 밝음이 아니라 태양 아래 그 자체로 빛나는 해바라기처럼 눈부신 그것. 축복 속에 태어나 온전한 사랑을 받으면 그러리라 상상하던 그런 모습을 막내는 온전히 지니고 자랐다. 막내를 키우며 종종 첫째와 둘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건 그런 밝음을 두 아이에게는 주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엄격한 엄마 탓에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 버린 첫째. 무심한 엄마 탓에 '늦되다'는 말을 듣고 자라야 했던 둘째. 실수에 너그러운 엄마, 그리고 자신보다 한참 늦은 동생에게는 번도 '늦되다'는 말을 하지 않는 엄마를 보며 첫째와 둘째는 얼마나 억울하고 어이가 없었을까.


창 시절 내내 학교 수업 외에는 해금과 모작과 팬픽을 쓰는 일에만 파묻혀 지내는 막내를 보면서 어떤 기대도 표현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알게 되었다. 스스로가 택한 일에만 열정을 쏟는 것. 막내는 20년의 시간을 온전히 그런 즐거움 속에서 살았고 그 세계로 한 발짝 나아간 어른이 되었다. 앞서 염려하지 않는 것. 저마다의 모양새로 빚어지리라는 믿음을 간직하는 것. 부모가 지녀야 할 태도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막내를 키우며 깨달았다. 




"그러게. 우리 막내 말을 들으니 그러네. 엄마가 잘못했네. 잘못했어. 지금 당장 고칠게!"


핸드폰을 열고 첫째의 프로필을 클릭했다. '기둥'을 지우고 '첫둥이'라고 입력했다. 다음으로 둘째의 프로필을 클릭했다. '대들보'를 지우고 '가운둥이'라고 입력했다. 드디어 셋째. '서까래'를 지우고 '막둥이'라고 입력했다. 내친김에 남편의 프로필도 열었다. 이름 옆에 자리 잡은 '지붕'을 지웠다. '남편'이라고 새로 입력했다.     


별명에 대한 막내의 타박은 약이 되었다. 그러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은연중에 식구 각자에게 역할을 배분하고 있었던 나를 돌아보게 했으니 말이다. 내게 막내의 타박은 맛있는 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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